생 즉 고 (1)

삶은 왜 고통스러울까?

by 임준열

어느 날 인스타그램 릴스를 내리다가 반출생주의 내지는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실존주의, 허무주의에 대한 포스트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 내용에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포스트들에 대한 찬반댓글이 많이 달리는 것을 보고

젊은 층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 고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자살자 수가 약 40.6명이라고 한다.

한 달에만 1248명, 1년이면 15000명 가까이되는 자살자가 나온다는 말이다.

게다가 자살은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망원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생이라는 가치가 무색하게도

삶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택한다.


"생 은 고"

내가 본 포스트들에 일괄적으로 달린 캡션이었다.

이것은 아마 불교의 사성제 중 생즉고에서 인용한 말일 것이다.

생즉고를 쉽게 설명하자면 삶은 곧 고통이라는 말이다.

이 말만 보았을 때는 삶에 대해 비관하는 말이라고 읽히기 쉽지만

사실 사는 것이 전부 불행하다는 비관적 인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해야 고통을 이겨낼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의

불교적 세계관의 시작과 같은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하지만, 요즘의 사람들은 생즉고를 출발점이 아닌, 삶에 대한 판결문으로 소비한다.

그들의 잘못된 관점으로 생즉고를 해석하면 결국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살아야 해?"라는 결론으로 도달하게 된다.


사실은 생즉고는 반쪽짜리 말이다.

"생즉고 고즉생"

삶은 고통이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삶이다.

이것이 불교 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살아야 해?"라는 질문은 성립할 수 없다.

삶에서 고통은 상수이기 때문에 배제가능성이 없고,

삶은 원래 고통을 포함한 채로만 존재한다는 사실.

전문을 듣고 나니, 생즉고 보다도 절망적이다.

삶이 고통스러운데, 이 고통은 삶과 떨어지지 않는다니.

과연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맞긴 한 걸까?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의 고통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고통과 기쁨은 필연적으로 결부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고,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기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우리를 투자자라고 상정해 보자.

어떤 회사의 주식을 100원에 샀는데, 이 주식이 50원이 되면 우리는 불행 해질 것이다.

반대로, 주식이 150원이 된다면,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또, 50원이 되었던 주식이 다시 원점인 100원으로 회복이 되면,

우리는 수익은 없으나, 50원으로 떨어진 시점보다 행복해질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주식의 가격변동처럼, 감정의 변동 즉 낙차를 고통과 기쁨이라고 본다.

즉 생즉고 고즉생은 결국 인간이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도 필연적이라는 인식인 것이다.


자 우리는 생즉고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내었고,

또 고통은 결국 기쁨이라는 빛의 그림자라는 것과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

그럼 우리는 삶과 결부된 고통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필연적인 삶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을 작성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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