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로운지 알 수 있을까?

by 임준열

이전에 작성한 글인 “요구하는 존재들“에서는 모든 존재가 자유의지로서 세계에 권리를 요구한다면, 누구나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이때,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번 글에서는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은 존재하는가부터,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일개 인간의 의식으로 인식할 수 있냐는 생각까지 펼쳐보자.

먼저 자유의지라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알아보자. 자유의지라는 것은 행위자가 행위를 함에 있어서 외적 강제와 필연성 등의 완전한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이다. 자유의지에 반대되는 이론은 결정론인데, 결정론에 의하면, 세계의 모든 현상은 현상 이전의 현상에 영향을 받고, 이에 의해 나비효과처럼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결국 모든 현상은 선행하는 현상에 종속되고, 이러한 인과율에 의해 모든 현상은 이미 일어날 현상으로 결정되어 있어 이 인과율에서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사실, 결정론이 자유의지가 있다는 쪽의 의견보다 더 탄탄해 보이기도 한다. 예시를 들어볼까? 어떤 사람이 저녁으로 치킨을 먹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기로는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 치킨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는 저녁식사 시간 전, 유튜브를 보다가 치킨 먹방을 보게 되었고 이 영상 때문에 치킨을 시키게 된 것이라고 하자. 그럼 유튜브에서 치킨 먹방을 본 것은 그의 의지였을까? 알고리즘이 유튜브 홈페이지의 상단에 치킨 먹방을 노출시켰고, 이 때문에 먹방을 보게 되었다면 어떠한가? 모든 행위에는 인과율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일각에서는 아무리 알고리즘이 어떤 영상을 상단에 노출시킨다 한들, 이는 선택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안일 뿐이고, 선택은 결국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의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그럼 우리의 선택에는 무엇이 관여하는가? 성격이나 취향, 선호도가 관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그가 어려서부터 자라온 환경과 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환경과 사건들이 결국 인과율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결정론과 유사하다. 인과율이 적용되는 자연세계에서 존재는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지만, 원하는 것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현상은 과거의 현상에 영향을 받아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자유의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자유의지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자유의지는 없는 것인가? 사실 결정론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모든 현상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현상에 도달했다고 하자. 이 태초의 현상은 그 어떤 현상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럼 이 현상에는 자유의지가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생각도 문제가 있다. 과연 현상이 일어남이 꼭 의지를 가진다고 할 수 있나? 태초의 현상이 의지가 없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자유의지를 탐구하는 우리의 논의는 실마리를 잡았다 싶으면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할 수 있다. 칸트의 말을 빌려와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겠다.

칸트는 그의 저서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의지는 인간의 인식 범위 너머에 존재하기에 인간의 의식으로는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의 당위성만을 따질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이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인과율의 범위 안에서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판단할 수 있고, 자유의지가 인과율의 범위 밖에 있다면, 인과율이라는 형식 안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분별하는 논의는 그 자체로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이 지점에서 우린 또 다른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유의지를 우리의 의식에서 알 수 없다면, 대체 세계에 권리를 요구하는 존재가 자유의지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아니한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자유의지가 실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실천적 판단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이 기준은 어떤 존재가 어떠한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얼마만큼의 외압을 받았고, 이 외압이 그 존재의 선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느냐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오해가 가능한 부분이, 우리가 이러한 판단을 내린다고 하여, 우리가 어떤 존재가 권리를 가지는 데에 있어 승인권자가 된다거나 검토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와 동일한 요구하는 권리를 가지게 된 존재와 함께 살아가면서, 그 존재들을 인간에 입장에서 얼마만큼의 입지를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합의의 부분에서 검토할 수 있는 정도가 될 것인데, 이 부분은 힘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글을 끝내기에 앞서서 위에서 말한 외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외압은 어떤 존재가 특정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데에 있어 그 존재 외부에서 받을 수 있는 외부의 영향을 말하는데, 우리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 데에 있어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선택을 내릴 수는 없으므로, 자유의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외압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는가 하는 범위 설정을 해야 한다. 의지의 근원이 되는 부분 외에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들은 모두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외압으로 볼 수 있는데, 물리적 강제가 있거나, 법적, 사회적 규범에 의한 것, 선택주체에 대한 위협 등은 논의의 여지없이 앞서 말한 종류의 외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이렇게 판단하는 데에는 당연하게도 오류가 섞여 들어갈 수 있고, 우리가 설정한 외압의 기준은 절대적인 세계의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도구 정도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권리 논의에 관한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다음 글에서는 권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힘의 논리와, 한계점 등을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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