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없는 야옹이
꾸루룩
침대에 늘어져 있는 머리맡 위로 무언가 소리 내며 다가온다. 매끈한 은빛 털, 촉촉한 분홍 코, 쓸데없이 단단해 보이는 흰 수염. 저 너머 보이는 눈동자는 마치 호박색 웅덩이에 걸린 초승달 같다.
“넌 왜 야옹은 안 해?”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미간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은근한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조막만 한 머리로 손등을 스치듯 부딪힌 후, 어깨 위로 풀썩 스러진다. 그러고는 골골 소리를 내며 물끄러미 나에게 시선을 던진다.
“왜? 어서 만지라고 눈치 주는 거야?”
허공에 멈춰 있는 손가락을 미간 위아래로 다시 움직이자, 오토바이 엔진음은 더욱 커졌다.
“골골골골골골…”
이 소리를 듣고 있자면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무보트를 타고 태평양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전자레인지에 오래 돌려버린 편의점 찹쌀떡처럼 녹아 늘어졌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떠나 독립한 삶은 아마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나서는 따가운 간섭이 가끔 그리워질 때도 있지만, 차치하고. 아무튼 나는 내 취향을 온전히 녹인 집 한 칸에 나와 사는 것 말고도 꿈꾼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좋은 향기가 나며 보송 말랑하다. 동그란 때도 있고 길쭉할 때도 있지만, 주로 잘 구워진 빵 모양을 유지한다.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온 세상 근심을 잊게 된다. 당신의 머릿속에 떠올린 그것이 맞다. 나의 또 다른 바람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이 소원을 이루기 전, 고양이에 대해 아는 점이라고는 생선을 맡기면 안 된다는 것과 “야옹”하며 운다는 것, 그리고 귀엽다는 것 외에는 전무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제로 많은 오해와 착각이 뒤엉켜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고양이는 그들의 세계에 무슨 원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야옹”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귀엽지만 무서울 때도 많다. 특히 나를 응시한 동공이 확대되며 엉덩이를 씰룩거릴 때는 더욱 그렇다. 생선을 맡기면 안 되었으나, 닭고기를 맡기는 것보다는 나은 듯했다. 이처럼 굉장히 무수한 오해들을, 고양이를 모셔 본 경험이 없는 이라면 어떻게 알겠는가. 학교에서 오리는 “꽥꽥”, 병아리는 “삐약”, 돼지는 “꿀꿀”, 고양이는 “야옹”하며 운다고 가르치는 걸. 오리, 병아리, 돼지와는 한 방을 써 본 적이 없기에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런데 고양이 뿐일까?
나는 칠판보다 창밖 하늘에 집중하는 아이들의 정신을 붙잡아 다시 교실 안으로 데려오는 일을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조용히 해라”와 “뛰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도 주된 업무이다. 쉽게 말하면 초등교사라는 이야기다. 어쩌다 초등교사가 되었냐고 묻는다면, 어디선가 들어본 식상한 레퍼토리로 답할 수밖에 없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의 모습이 꽤나 멋있었기 때문에, ‘나도 선생님이 되면 좋겠는걸’ 가볍게 생각해 버리고 만 것이다. 막상 교단에 서보니, 나의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교사에 대해 할 수 있는 오해들. 예컨대 원하는 급식 메뉴를 마음껏 퍼 담을 수 있다든지. 칠판에 여러 지식들을 써 갈긴 뒤 반짝이는 학생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우쭐한다던지. 그런 것들. 실제로는 배식원 아주머니께 정량만을 배분 받는다. 예컨대 메인 메뉴가 돈까스인 날 큰 맘 먹고 1장 더 받을 순 없냐는 요청은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 뿐이다. 또한 교사의 표식과도 같은 판서도 그렇다. 내가 PPT 위주로 수업하는 까닭이 여간 악필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이 초롱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간혹 동태눈을 한 채 멍 때리는 학생을 마주하자면, 비린내 올라오는 어시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듯 했다. 물론 생선을 눈앞에 둔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반응하는 선생님 탓에, 곧 제 눈빛을 찾긴 하지만.
예상과 실제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의미가 없는가 하면, 아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다르기에 의미를 갖는다. 꾸루룩 우는 고양이도, 체육시간에만 제정신이 돌아오는 학생들도, 어리숙한 교사인 나 자신도 예상과 같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깊어진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각자가 상상한 완벽한 모습이 아니라 서로 엇나가면서도 맞닿게 되는 그 순간들에서 오히려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야식으로 주문한 프라이드치킨이 양념치킨으로 배달 왔다고 해서 치킨이 의미 없지는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치킨은 치킨이다. 생각한 것과 다르더라도, 그 안에서 느낀 것을 음미할 줄 알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