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새로운 회사에 이직한 후 회사에서 선임을 부르는 호칭과 9시간 내내 입고 있어야 하는 유니폼, 발에 땀을 차게 만드는 가죽단화 그 모든 게 나와는 맞지 않는단 생각에 갇혀 회사에 있는 9시간 동안은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나로서 숨을 쉴 수 없는 그 감옥 같은 회사란 곳을 다닌 지도 한 달이 다되어갈 때쯤 곧바로 나는 여행을 떠나야겠단 결심을 하게 되었고,
강화도에 있는 '잠시섬'이란 게스트하우스를 가보고 싶었기에 이번 기회가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섬이란 강화도 지역경제 활성화를 중점으로 한 청년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인데 로컬가게들과 상생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내가 가는 날에 참여 가능한 프로그램은 한 개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요가'. 프로그램 시작은 9시.. 나는 서울에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집에서 6시엔 나와 지하철을 타야지만 요가 시작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알람을 새벽 5시로 맞추면서, 일어나면 가는 거고 못 일어나면 못 가는 거지란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새벽 5시 눈이 벼락같이 떠졌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며 두 시간 반을 내달려 도착한 요가원.
실내요가라 조금 시원할 줄 알았는데 사람들도 가까이 있고 에어컨도 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필 그날 수업이 빈야사가 아닌가?!! 빈야사는 플로우를 끊기지 않고 유연하게 이어가며 하는 요가동작인데 그 말은 즉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는 것. 뛰어오느라 흘렸던 땀구멍을 막을 새도 없이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머리를 아침에 분명 감았는데 요가를 하다 보니 머리에 샤워기를 뿌린 거 마냥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유튜브가 아닌 진짜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땀 쫙 빼면서 열정적으로 요가를 한 것이다 보니 찌뿌둥한 몸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아 요가를 했구나' 란 기분을 느꼈다.
숙소에 도착해 백팩을 내려놓고 전등사로 향했다 전등사에 도착해서 부처님께 우리 가족과 나의 행복을 염원하며 인사드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지도를 보니 전등사에서 조금만 더 지나가면 동막해변이 나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였고,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다시 나는 버스의 종점이자 숙소 앞 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숙소에서 다시 동막해변을 가려면 1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야 했다. 터미널에서 고민만 하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와중에 하늘에선 비가 쏟아내려 졌고, 빗줄기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동막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왔고 5분 뒤에 버스는 출발한다. 버스 출발 2분 전.. 에라 모르겠다! 열린 버스의 문으로 냅다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버스는 동막해변으로 출발했다.
빗속을 달리는 버스에서 책에 빠져 집중한 사이에 창밖을 보니 폭풍 같던 비는 그쳤고 구름만 끼여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해변 카페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고, 나무가 양옆으로 줄 서있는 도로였다.
시선을 멀리 두면 넓은 풀밭이 있고 더 멀리엔 바다와 큰 절벽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제주도 서귀포에서 매일 일상처럼 보던 박수기정 앞의 풍경과 비슷해 보였다.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제주도의 비 오던 날이 떠올랐고 나무와 흙, 바다냄새가 섞인 향이 주변을 맴돌았다. 한순간 날 추억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들에 빠졌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건 이런 자연이었지, 자연이 주는 편안함이었지란 생각과 더불어 버스에 올라탄 나의 결단력에 칭찬했다. 카페에 들어갔는데 바다가 보이는 자리는 인기가 많아서 빈자리가 없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여기서 쉴 수 있단 생각에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서 짐 정리를 하는 순간. 정말 운 좋게도 가장 명당에 앉아있었던 분들이 자리를 일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잽싸게 자리이동에 성공했다.
큰 창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는 하늘이 우중충해서인지 더 어둡게 보였다.
나의 취향은 파란 동해바다였지만 이날 같이 우중충한 날엔 오히려 이렇게 어두운 바다를 보는 게 더욱 좋았다고 생각했다. 카 더가든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기기 하기 좋은 바다였다. 한참을 멍하니 바다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정류장에 서있는데 인적 드문 산길이라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나는 무섭지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야 란 최면을 걸면서 핸드폰으로 웃긴 동영상만 보기 시작했다. 체감상 저녁 12시는 되는 정도의 어둠이었다.
20분 정도 흘렀나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로 끝에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멈출 줄 알았는데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순간 숙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심장이 덜컥했다. 정말 다행히도 기사님은 금방 차를 세우셨고, 나는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내뱉으며 버스에 뛰어 올라탔다. 기사님께선 걱정반 잔소리느낌으로 ' 위험하니까 앞으론 이런 곳에선 무조건 라이트 켜놓고 있어!!라고 하셨고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버스를 덜컹덜컹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인스타그램에 어른이란? 질문에 유명인이 대답하는 릴스가 있었다. 그분은 어른이란 내 마음대로 세상과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무기력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다. 또 어떤 분은 ‘방파제 같은 존재’라고 비유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매일 몰아치는 삶의 시험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버텨야 하는 것.
난 두 분의 말에 전부 공감한다.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단 것을 알게 되고, 그 과정 속에 오는 시련들을 부딪히면서 어떻게든 스스로 버티는 단단함이 필요하다는 것.
문득 나도 나 스스로 어른이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버스에서 어른에 관해 곰곰이 되짚어 보면서 내릴 때까지 나만의 정의는 내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그런 깊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단 것만으로도 그 시간이 값졌다. 머지않아 나도 나만의 어른이란 정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단 설렘도 들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새벽부터 내 몸을 감싸고 있던 땀들과 먼지들을 씻어내고 바로 오늘 이 숙소에서 머무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여행회고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엔 잠시섬을 N회차 방문하신 분들도 계셨고, 잠시섬을 운영하고 도와주는 호스트님과 스텝분들, 또 잠시섬과 비슷한 일을 일본에서 하고 계신 분들도 함께 모였다.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과 느꼈던 감정과 오늘 하루의 점수를 돌아가면서 얘기했는데 이날은 특별하게 파파고를 사용해 함께 여행 회고를 하였다. AI의 목소리는 한없이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그 안의 글들은 너무나 따뜻했다.
일본에서 오신 분들이 오늘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어떤 분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그 시간엔 온전히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감정을 공유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고 짧았지만 함께 감정을 공유했던 그 시간들을 잊지 못할 거 같다.
다음 날 아침부터 인적이 드문 강화도 골목을 걷다가 동광직물체험관에서 티코스터를 만드는 체험을 했다.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던 선생님께선 모기에 뜯긴 팔다리를 보시더니 놀라셨다. 언제 물렸지라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기약을 가지고 오셔서 나의 몸에 빠른 손놀림으로 바르셨다
파스향 나는 몸을 이끌고 티코스터 만들기를 시작했다. 아 분명히 설명을 들었을 땐 쉽고 간단한 건데
완성하고 보니 삐뚤빼뚤 하면서 옆 사람 들 거보다 훨씬 작고 또 남들과 다르게 언제 생긴 지 알 수 없는 고리까지 달려져 있었다. 완성품을 보고 처음엔 내가 예상한 모양이 아닌데.. 라며 조금 실망할 뻔했지만
실망감도 잠시 작은 걸 보니 오히려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또 고리가 있으니 보관할 때 고리에 걸어서 보관할 수도 있고 또 남들과 다른 나의 엉성한 티코스터가 나의 엉성한 성격을 나타내는 거 같았다
그렇게 긍정회로를 돌리니 오히려 좋아~ 이게 바로 장원영의 럭키비키 인걸까
티코스터 체험을 마지막으로 아쉬운 발을 이끌고 강화도 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보는 창밖은 청춘의 이미지와 꼭 닮은 푸른 풀밭이 펼쳐져있었고, 그 푸른 풀이 마치 올해의 여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이번 여행은 그 어느 여행보다 가장 즉흥적이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근에 다녔던 여행 중 가장 많은 것을 느꼈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는 쉬는 것에만 의의를 두었지만 서울로 돌아오고 나니 진심으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걸 하며 시간 보내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지, 하고 싶은 것에 얼마나 나를 던질 수 있는지를 나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그 시간들이 한해의 반을 보낼 때쯤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지겨운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을 때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백 퍼센트 같을 순 없지만, 그때의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그새 지치고 구겨졌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펴지고 힘을 낼 수 있었다.
여행이란 것의 좋은 점은 이런 것 같다.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힘이 드는 순간 여행에서 느꼈던 점을 떠올리면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오게 하는 것. 아주 잠시나마 웃게 해주는 것.
이 글을 발행하고 또 인생의 노잼 시기가 찾아왔을 때 난 다시 이 글을 읽으며 이때의 여행을 추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