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행의 성지 묵호를 가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묵호란 곳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요 근래 유튜브랑 인스타그램에 혼자여행 가기 좋은 여행지로 묵호가 많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라며 스크랩해두었는데
2025년 마지막 겨울 여행지로 묵호를 선택. 묵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날 새벽에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출발하자마자 잠에 들었는데
중간에 깼더니 창밖에는 파란 해변이 펼쳐져있었고, 모래사장엔 흰 눈이 듬성듬성 쌓여있었다.
어두웠던 현실이란 곳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하는구나란 설렘 또한 내 마음속에 쌓였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장칼국수를 먹으러 식당에 갔다.
나는 식당을 오픈하자마자 들어갔었기에 4인석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어떤 앳되보이는 여성분을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안내하면서 합석 가능하죠?라고 했다. 나도 그 여성분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해야 할 거 같은 분위기라 얼결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보니 혼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가게가 크지 않으니 사장님께선 합석이라는 방안을 세운 거 같았다.
예상치 못한 합석에 당황한 건 나뿐만 아니라 그 여성분도 마찬가지인 거처럼 보였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휴대폰을 한다던가 의미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놨다. 말을 걸까 말까 탐색전을 펼쳤다.
너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밥을 먹으면 이 테이블에서 밥 먹는 우리 둘 다 체할 거 같아 먼저 말을 건넸다.
첫인상부터 나보단 많이 어려 보인단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대학생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는 거라고 하면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밥을 먹으러 온 거라고 했다.
거기서 알 수 있었다. 묵호행 기차에 같이 있었구나!
묵호행 기차는 배차도 많지 않고 둘러볼 곳도 많은 편이 아니라 여행 다니다 보면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마주치는 경우가 많다고 어떤 유튜버의 영상에서 본 기억이 났다.
혹시나 묵호를 떠나는 기차도 같은 기차일까 했는데 그분은 묵호에서 하루 더 있다가 간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식당에서 나와 묵호에서 걷다가 한번 더 마주치면 신기하겠다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헤어졌다. '좋은 여행 되세요!' 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이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궁금해진다. 그분은 처음 떠나온 여행에서 어떤 걸 보고 어떤 걸 느꼈을지
정말 좋은 여행으로 기억에 남았을지
그다음 행선지는 논골담길로 부둣가 바로 옆에 있는 마을인데 등대를 향해 걸어가는 언덕길이 유명하다.
올라가는 길 왼쪽에는 벽화가, 오른쪽에는 바다가 펼쳐져있는 작은 동네 골목을 따라 걷는 것이다.
바다를 끼고 걷고 걸으면 등대에 도착한다. 그리고 등대 앞에는 빨간 우체통이 놓여있다.
그 우체통의 이름은 '느린 우체통' 우체통에 엽서를 넣으면 정확히 일 년 뒤 편지가 도착한다.
나는 엽서를 가지고 와서 계단에 철퍼덕 앉았고,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은 일 년 뒤 나에게로
몇 년 전만 해도 친구랑 매년 연말에 일 년 뒤 편지를 발송해 주는 카페에 가는 게 연말 이벤트처럼 진행했었다.
그때는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는 일 년 뒤 나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져있지 않을까? 설렘과 기대를 바탕으로 거창한 목표를 적었다.
하지만 일 년 뒤 그 편지를 받아보니 크게 달라진 건 없고, 어떤 부분에서는 상황이 더 안 좋게 변한 경우도 있었다 보니 나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그런 부분이 반복되다 보니 친구와 나는 자연스럽게 일 년 뒤 나에게 편지를 쓰는 일에서 멀어졌다
이제 다시 묵호의 우체통 앞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이전처럼 나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이번 편지엔 어떤 거창한 목표보단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나의 건강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덜 힘들길 조금만 더 나아져있길 하는 바람을 꾹꾹 편지에 담았다. 아! 그리고 잃고 싶지 않은 것도 추가적으로 적었다.
'많은 재산과 성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냥 지금의 소소한 행복을 잃지 않고, 조금 더 나아진 인생이길 바랍니다. ' - 2025년의 내가 2026년의 나에게
마지막으로 간 곳은 하평해변이다.
하평해변은 기찻길을 따라 덩굴을 지나면 바다를 볼 수 있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화창한 날씨는 언제였냐는듯 구름들이 하늘을 뒤엎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파도는 화가 난 듯 크고 세게 밀려왔고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혀 깨졌다.
처음에 바다에 도착했을 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나는 거 같아서 이어폰을 빼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파도가 자갈들을 지나가며 나는 소리였다.
내가 알던 파도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라서 신기했다.
자갈을 지나가는 파도는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구나. 이때까지 내가 바다를 자주 다녔지만 이렇게 파도 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어쩌면 내가 바다를 많이 다녔지만 파도의 소리는 지나치고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하평해변이 혼자여행 와서 사색을 즐기기 좋은 바다란 글을 보았는데 바다에 직접 와보니 글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파도가 자갈을 지나가는 소리는 일정한 음악처럼 느껴지고, 또 바다의 끝에는 해가 넘어가고 있어서 붉게 수평선이 져있고,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바다를 아무 말도 없이 바라만 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대게 나와 같은 방향으로 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까이 있지 않아서 그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표정을 지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바다를 보다 보니 파도바람에 얼굴과 몸이 굳기 시작했고, 시계를 보니 곧 버스가 끊길 시간이어서 하평해변을 벗어났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그때 다시 한번 하평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또 이 바다를 이 순간 함께 본 사람들 모두가 날이 따뜻해지면 좀 더 따뜻한 표정과 여유로운 몸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묵호행 기차랑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똑같은 길을 되돌아가는 거지만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지금 내가 지나가는 곳이 바다인지 아닌지 보이지 않았다 창을 보면 내 얼굴만 비쳐 보였다.
기차에서 여행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을 되돌아보려고 했는데 되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고, 바다를 보고 들으며 느꼈던 그 순간들이 참 좋았구나 라는 감정만을 오래 갖고 있는 거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차시트에 온몸에 힘을 풀고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