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늘의 창 07화

爲道日損, 채움의 시대에 덜어내는 용기

덜어낼수록 삶은 더 풍요롭다

by 크리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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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냐 損이냐, 덜어내기의 행복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쌓으라고 말한다. 더 많은 돈, 더 넓은 집, 더 많은 관계, 더 화려한 경력. 권력, 명예.


쌓기와 덜기, 나는 두 가지를 다 해봤다. 그리고 깊이 사유해 보니 인생의 진짜 행복과 성장은 덜어내기에 있었다.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 학문은 날마다 보태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누구보다 이 문장을 치열하게 매일 경험하며 산다. 산업을 분석하고, 방대한 글을 쓰고, 세상의 파동을 읽는 일. 그것은 분명 '쌓기'다.

하지만 명상할 때 느끼는 것은, 진짜가 내가 덜어낼 때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 진짜 행복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더하기는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다. 마치 거식증에 걸린 환자처럼, 아무리 채워도 배부르지 않다.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닿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



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덜어내기는 거창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자연과 매일 대화한다. 나무, 잔디, 바람의 숨결을 느끼고, 나뭇잎에 빛이 스며든 그 화려한 색상의 향연을 마음으로 바라본다. 나는 저 빛을 오늘도 수백 가지로 눈이 감상하는 걸 마음으로 세며 행복해한다.

이 순간에는 채워야 할 것도, 쌓아야 할 것도 없다. 그저 지금 여기, 바람의 숨결과 빛의 변주를 온전히 느낄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통찰이 생긴다. 영감 같은 것. 나만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세상과 세계를 관통하는 순간들.

도덕경은 말한다. "부출호 견천도(不出戶 見天道)" -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본다고. 나뭇잎 하나를 제대로 보는 사람이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다. 미시와 거시는 다르지 않으니까.



소리 속으로, 색 속으로


나는 서예를 쓰고, 바이올린을 켠다. 어릴 때는 피아노를 좋아했다. 한번 앉으면 한두 시간이 후딱 간다. 집 옆 교회 별관은 넓고 고요하고 그 누구도 나와 피아노의 교감을 방해하지 않았다. 절대음감이 있어서 원하는 곡을 나만의 느낌으로 어설프게 변주한다. 바이올린도 나만의 방식으로 실컷 켠다. 악보에 갇히지 않고, 기교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 흐르는 대로 소리를 낸다. 서투르나 기교는 프로 같은 느낌이다. 영국에서 다니는 대학 바로 옆에 로열페스티벌 홀이 있어서 학생권으로 합창석에 앉아 밤마다 호강을 많이 했다. 바이올린 협연을 많이 봐서 원하는 음색의 기교 흉내내기가 내 귀에는 일품이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나와 악기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 장자가 말한 "포정해우(庖丁解牛)"처럼, 칼이 뼈 사이를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서투나 억지가 없다. 그저 흐른다.


유화도 그린다. 예전에는 사실화부터 인물화, 풍경화를 두루 그렸다. 특히 풍경화는 바다 한복판이나 바다의 높은 섬 꼭대기에 올라서, 또는 정선 상류 오지에 가서 한 달씩 그리곤 했다. 기술을 쌓고, 묘사력을 쌓고,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는 능력을 쌓았다. 사실 무아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 붓 가는 대로 흐르듯 그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유화 팔레트에 남은 물감, 버리기 아까워 밑 칠 해 놓으려던 게 그냥 작품으로 되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실제로 아이러니하게 내가 스스로 이런 어설픈 그림이 더 좋아지는 것이다.

최근엔 고흐의 빙의로 내가 쓴 에세이 녹음을 들으며 그린 유화가 있다. 그것을 보면 은은하고 거친 붓터치가 웬일인지 매끄럽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가 사실 풍요한 사람이었던 걸 나는 마음으로 깨닫는다. 그 그림 그리고 남은 물감으로 거의 행위 예술식으로 그린 것은 인생인 것 같다. 부족하고 어설프고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그래서 보고 있으면 은근히 정이 간다. 도덕경 같은 문구도 떠오른다.

"가득 차면 비워진다."

모자란 게 매력인 느낌. 그래서 더 좋은 것이다.



비워있는 것의 풍요


도덕경 9장은 이렇게 말한다. "持而盈之 不如其已(지이영지 불여기이)" - 가득 채우느니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11장, "當其無 有器之用(당기무 유기지용)" -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그릇의 쓰임이 있다.

사실화로 가득 채운 캔버스보다, 팔레트에 남은 물감이 우연히 만든 빈 공간, 모자란 부분, 어설픈 터치가 오히려 더 풍요롭다. 비워있어야 담을 수 있고, 모자라야 상상이 들어오고, 어설퍼야 여백이 숨 쉰다.

그 "어설픈" 그림은 지금 햇살이 드는 내 방 베란다에서 마르고 있다. 창을 열고 왔다 갔다 하며 본다. 유화는 두께에 따라 다르지만 작품을 완전히 건조하는데 최소 6개월은 걸린다. 나는 고흐 기법이나 렘브란트 기법을 좋아해서 두께가 있는 편이고 그래서 더 오래 걸린다.

6개월 동안 천천히 마르는 그림. 빨리 완성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유화가 자기 시간을 갖고 천천히 마르도록 그냥 둔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들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림이 스스로 완성되어 간다. 나는 그저 기다린다.



부족함의 아름다움


가끔 나 자신이 너무나 어이없게 부끄러울 때가 있다. 철딱서니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좋게 보면 너무 티 없고 맑은데, 세상 잣대로 재면 심히 불쾌하다. 근데 나는 나를 아니까. 세상 잣대는 나를 모르니 오해가 많고, 정작 나 자신은 진실을 아니 그저 사랑스러울 때가 많다.

나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나는 정말 부족하다. 근데 부족한 내 그림의 여백처럼, 나를 스스로 사랑스럽게 본다. 도덕경 45장은 말한다. "大成若缺(대성약결)" - 큰 성취는 모자란 듯하다.

완벽함보다 모자람에 매력이 있다. 그게 인생이고, 그게 자연스러움이다.


세상이 사람들에게 쌓으라고 하는 메시지 - 물질, 소유, 관계 등을 덜어내면 덜어내는 만큼 자유롭고 맑아진다. 그게 좋다. 조화롭되 좀 더 덜어내기에 삶의 방향을 주고, 그 길을 걷고 싶다.


도를 나누는 사랑: 침묵의 가르침


​이 '나만의 자족'은 세상의 잣대와 다른 진짜 풍요로움 속의 자족이다. 하지만 가끔 '정(情)'에 이끌릴 때, 나도 모르게 상대의 결핍을 채워주려 '채움'의 논리에 갇히곤 했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딜레마를 꿰뚫자, 진실한 정과 사랑은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나누는 것이라는 경이로운 통찰에 도달했다.

​타인을 위로하고 물질을 제공하는 일시적인 채움 대신, 스스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어 자유와 자립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더 나아가, 궁극은 내가 침묵하고 도에 사는 삶 그 자체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침묵의 가르침(不言之敎)'이 가장 강력한 나눔임을 깨달았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화하게 하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가 바로 진정한 사랑의 형태인 것이다.


'나만의 자족'과 '보편적 행복'의 역설


​"나만의 자족이면 개인에 갇히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들 수 있다. '나만의 자족'이 외부와 단절된 이기적인 만족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 단순히 '자족하는 척하는 채움'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나만의 자족'은 이와 다르다.

​전제가 보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외부의 조건(돈, 명예, 타인의 시선)이 흔들리지 못하는 내면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를 덜어 쌓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나만의 성채'이다. 이 성채를 외부의 것이 아닌 스스로의 비움으로 세웠기 때문에, 세상의 잣대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만의 자족'은 보편적 행복의 '목표'가 아니라, 보편적 행복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론'이 되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깨달음이 가장 보편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설인 셈이다.

'노자 시대'와 '현대'의 전제 조건 (안보와 안식처)

사람들은 노자는 구시대다. ​"보편적 행복에는 기본 전제가 어느 정도 깔려있어야 하기에..."라는 생각을 한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중요한 포인트다. 노자 시대에도, 현대에도, 최소한의 생존(안보, 안식처)이 보장되지 않으면 철학적 사유 자체가 어렵다.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노자 철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그 기본 전제가 무너질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도에 살면 극한 전쟁 상황도 다르게 사는가?


​네, 다르게 산다고 노자는 말한다.

​덜어냄의 방패는 전쟁이나 재난은 우리가 쌓았던 모든 것(물질, 사회적 지위, 심지어 신체적 안전)을 한순간에 앗아간다. 채움에 의지했던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절망하지만, 덜어내기를 수련한 사람은 이미 그 외부적인 채움에 대한 집착을 덜어냈다. 물리적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정신적이고 존재론적인 파멸은 면하게 된다.


​가장 낮은 곳의 생명력


노자는 물을 최고의 선(上善若水)에 비유했다. 물은 가장 부드럽고 약하지만,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 극한 상황에서 가장 잘 살아남는 것은 가장 유연하고, 낮고, 근원적인 것이다. 도에 사는 사람은 사회적 허상(명예, 권력)을 덜어내고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순응하며 흐르는(無爲) 생존 방식을 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도를 덜어내는 삶'은 극한 상황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해주지는 못하지만, 외부의 파괴로부터 내면의 근원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내적 안보망을 제공한다.

명상으로 내면을 비우고, 일기로 생각을 비추며,

디지털 절식으로 세상과의 경계를 잠시 닫는다.

그렇게 덜어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난다.

비워 있음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색이 숨 쉰다.

풍요, 진실, 아름다움 —

모두 비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덜어낼수록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울수록 행복해진다.

그것이 내가 사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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