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듯 나도 처음부터 축구선수의 꿈을 가지고 키운 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두 분 모두 태권도 선수로 몸을 담으셨고 친가 쪽 사촌 오빠들 모두 축구 국가대표 선수로 활 약했다. 환경이 그러하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2.3세 때부터 부모님 두 분이 운영하시는 태권 도장에서 뛰어노는 게 일상이었고, 공부보다는 활동적인 걸 많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 에는 프로팀에 소속되어 있는 사촌오빠 축구경기를 보러 가는 일이 마다했다. 그만큼 경기를 보러 다니고 축구와 인연이 있었다면 당연히 자연스레 축구에 흥미를 느꼈을 법도 했지만 전 혀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운동회를 하던 날, 계주 마지막 주자로 출 전하게 되었다. 그전에 반 별로 달리기 대회를 해서 뽑은 아이들로 구성을 했는데 우리 반에 서는 내가 가장 빨라 마지막 주자를 하게 된 것이다. 근데 기분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기억 이 난다. 온 힘 다해 빨리 달리지도 않았던 거 같은데 1등을 하 게 된 게 얼떨떨했기 때문이 다. 그렇게 계주가 시작 됐고 우리 팀이 지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내 앞에 상대는 내가 다니는 미술 학원 원장님 딸이 뛰고 있었다.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였고 내 속도로 충분했지만 따라잡지 않고 그 친구의 뒷 꽁무니만 보며 발맞춰 뛰어주었다. 그리고는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2등으로 들어왔다. 나의 그런 승부욕 없는 모습에 엄마는 잔뜩 화가 나 셔서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리고 집으로 향하셨다. 당시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동 생이 얼마나 부럽던지 나는 훌쩍이며 엄마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학생들 절반이 엄마아빠가 운영하시는 태권도장에 다녔었기 때문에 엄마는 그 원생들과 부모들 얼굴을 보기 얼마나 낯 뜨거우셨을지 감히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다. 안 그래도 엄마아빠는 늘 태권도장 이미지에 예민하셨기 때문에 항상 우리 자식들에게 모범과 바른 행동. 그리고 인성을 강조하셨다. 그런 부모님께 "그래도 명색에 태권도 관장 딸인데.."라는 말들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게 얼마나 화가 나셨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이해가 된다. 그보다 더 내게 실망하셨던 이유는 뛸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해 뛰 지 않은 내 행동과 지나치게 승부욕이 없는 나의 태도에서 울화통이 터졌다고 하셨다. 이후로 나는 어떠한 스포츠대회건 나보다 엄마아빠를 생각해 성과를 냈던 것 같다. 그리고 혹여나 운동신경이 없는 건 아닐까 하며 나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엄마아빠는 자신들의 자식이면 절대 승부욕과 운동신경이 없을 리 없다며 전국 육상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80m 달 리기대회와 멀리뛰기 종목에 참여를 했고 심지어 작은 대회도 아니었다. 80m 예선전 1위로 가뿐히 올라왔고 결승전 시작 휩슬이 울리는 동시에 나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내 앞에. 옆에 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1등이구나 하는 마지막 속도를 줄이는 순간 옆에 2 레인에서 한 친구가 나와 비슷하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전광판에 나의 이름이 2등으로 뜨는 것을 아빠가 보고 항 의를 했고 결국 내가 앞섰다는 판정을 받아 겨우 1등 상을 검어지게 됐다. 멀리뛰기는 2등을 하며 시상식대에 올라 2관왕이라는 값진 상들을 수상했고 카메라를 들고 나를 향해 미소 짓 는 엄마아빠의 모습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에게 운동신경이 있다는 걸 알게 됐 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꼭 아들로 낳아서 축구를 시킬 것이라고 했었던 아빠의 꿈에 내가 여 자로 태어나는 변수가 생김으로서 축구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지만 어느 순간 아빠는 "여자 축 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에 나는 너무 수줍음이 많고 말 수가 적은 정말 내 성적인 아이였다. 눈물도 워낙 많아 엄마아빠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초1 겨울 방학 때는 여자 축구부가 있는 대구 침산초등학교에 합숙을 시키며 홀로서기를 원하셨고,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는 창원 명서 초등학교 여자 축구부에 나를 데려다주고는 6학년 언니들과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셨다. 폰도 없다 보니 엄마랑 전화는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 고, 빨래와 밥, 취침 등 군대같이 칼 같았고 누구 도움 없이 뭐든 혼자 할 줄 알아야 했다. 그렇게 방학 때마다 아빠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면서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셨고 한참 어 렸던 나도 점차 달라지는 게 보였다. 낯선 환경에 혼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내가 살 수 있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정말 밝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었고 승부에 있어서는 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렇게 5학년 겨울이 되었다. 남들과 다를 거 없이 평범하게 학교 다니며 취미로 집 풋살장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게 다였던 내게 울산 서부 초등학교 축구부 감독님께서 나를 스카우트하러 오신 것이다. 더는 숙소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고 축구가 조금 좋은 정도지, 숙소 생활을 하면서까지 축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감독님을 보자마자 몸이 경직되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현민아, 네가 앞으로 축구를 계 속 하고 싶으면 지금 전학을 가야 해. 지금이 아니면 시기를 놓치게 되는 거야. 선택해 그냥 집에서 놀이로 축구를 할 건지, 아니면 축구선수를 할 건지, 대신 지금 전학가지 않으면 나중 에는 축구선수 하고 싶어도 못해."라는 말을 하셨고 나는 엄마가 미리 싸놓은 내 짐들과 이 불들을 바리바리 싼 보따리를 들고 감독님 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전학 절 차를 다 끝내고 엄마아빠 없이 울산에서 학교를 다니고 운동하며 일찍 사회에 뛰어든 셈이다.
취미가 아닌 엘리트 목적으로 축구를 배우다 보니 즐거움보단 힘들고 외로움이 더 커져왔다.
집이 너무 그립고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부턴 내가 앞으로 되고 싶은 축 구선수, 그리고 목표치를 정해두고 그거만 생각하고 축구했다. 쉽게 말해 잘해지고 싶은 축구만 생각한 것이다. 그때 당시 우리 팀은 잘하는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주축으로 모든 게 흘러갔고 전술, 전략을 모두 내 위주로 짜면서 나는 혼자 하는 축구에 많이 익숙해졌다.
매 경기마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면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도 꾀 받았다. 매번 예선통과를 목표로 하는 우리 팀이랑은 다르게 결승전에 올라가 중계방송도 타고, 골도 많이 넣어서 득점상도 타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중계방송을 타 보는 것이 나의 목표였을 정도로 정말 목말라 있었고 승리의 쾌감보단 패배의 쓰라림을 더 많이 경험했다. 하지만 끝까지 우리는 중하위권에 머무르는 팀으로 졸업을 했고 광양 광영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 신입생이 무려 15명이 같이 입학했고 초등학교 때보단 잘하는 친구들. 언니들이랑 축구를 하니 재밌기도 하고 기분 좋은 긴장감 속에서 훈련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언니들 은 나를 대하는 태도, 시선이 점점 처음과 달라졌다. 1학년 중 유일하게 나만 항상 경기에 출 전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3학년 언니들 몇 명이 경기를 못 뛰는 상황이 나왔 고, 게다가 나는 등번호까지 좋은 배번을 받아 언니들의 시기질투 대상이 된 것이다. 내가 경 기 뛰는 게 오죽 보기 싫었으면 내 유니폼을 숨기기도 하고, 훈련을 하면서 일부러 뒤에서 발목으로 태클을 넣기도 하고 여러 방법으로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포지션은 미드필더를 봤었 는데 가운데서 모든 공격과 수비에 모두 관여를 해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힘들기도 힘들었 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몰아세우는 언니들이었다. 내가 실수를 하 면 누구 한 명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오죽하면 자신한테 패스를 왜 주지 않느냐며 짜증 내는 언니들 뿐이었다. 엔트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휴가를 받은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나는 혼자 대회를 따라갔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번 경기 때마다 혼나고 눈치 보면서 경기를 뛰고 싶지 않았다. 분명 언니들이 혼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내 실력에 자신이 있고 확신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미친 듯이 개인운동을 했다. 새벽, 오전, 오후, 야간, 휴가, 외박, 외출 가리지 않았다. 밥 먹고 앉아서 소화 시키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리프팅으로 소화를 시키고 하루에 몇 백개, 몇 천 개씩 슈팅을 차며 발에 감각을 익혔다. 드리블도 자유자재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연습했 다. 힘든지도 모르고 했다. 그런 노력을 하늘에서 댓가라도 주듯 나는 바로 다음 대회에서 보 란 듯이 좋은 활약을 보였다. 수도 없이 연습했던 상황들이 경기장에서 나오니 두려울 게 없었고, 매일 노력했던 시간들을 알기에 근거 있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예선 마지막 경 기에서 포항 항도중을 상대로 드디어 내 데뷔골 득점이 터졌다. 10명의 언니들이 다 달려와 머리를 막 쓰다듬으며 와락 안아주었는데 그날은 어찌나 기쁘던지 내가 노력했던 시간들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대회는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고, 팀 상황이 좋지 않아 지면서 졸업생 언니들을 제외한 저학년 선수들 모두 전학을 갔다. 나도 도저히 여기 있어선 아무 발 전이 없겠다 싶어 집으로 가서 몇 달 잠시 쉬고 있을 때 즈음에 포항 항도중학교 감독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바로 내가 데뷔골을 넣은 상대팀 감독님이셨다. 항도중학교 감독님께서는 그날을 톡톡히 기억한다며, 우리 학교에 오지 않겠냐며 제안을 해주셨다. 잠시 망설여지긴 했 지만, 이름도 없던 최하위 팀을 이 감독님으로 부임되고 나서 바로 중학교 최고의 팀으로 만 드셨다는 것에 조금 신뢰가 갔고, 내가 초등학교 시절 가장 축구를 잘했던 팀( 포항 상대초) 그 멤버들이 항도중학교에 진학 중이었기 때문에 더 마음이 끌렸다. 나보다 축구를 잘하는 친 구, 언니들 속에 내가 묻힐 수도 있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거보다 내가 정 말 제대로 된 축구를 배우고, 잘하는 친구들과 경쟁을 목적으로 전학을 선택했다. 그때는 전 혀 몰랐다. 그 감독님과 엄청난 인연이 될지, 지금의 나를 있기까지 정말 많은 공을 들여 주 실 분일지.. 워낙 혼자 하는 축구에 길 들여져 있는 나에게 패스는 드리블로 3.4명을 재키는 거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포항에서 추구하는 축구는 아기자기하고 연계플레이에 능 한 선수들이 적합했다. 감독님이 그런 축구를 원하기도 하셨고, 나처럼 솔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사이에서도 나는 꿋꿋이 땅만 보고 드리블만 했고 패스를 줘 야 하는 타이밍, 그리고 드리블을 쳐야 하는 상황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그렇게 영영 녹 아들지 못할 거만 같은 나를 허감독님은 고쳐냈다.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 세배로 혼내고, 따 로 남아서 몇기고, 상처 주고, 감독님이 나에게 해주는 가장 최고의 칭찬은 "그래, 그렇게 하 는 거야."가 전부였다. 한 날은 감독님과 우리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감독님께 서운하거나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같이 같은 마음으로 "감독님, 저희한테 왜 이렇 제 칭찬을 안 해주세요." 친구들은 서운했던 감정을 털어놨다. 늘 정작 칭찬을 받지 못했던 사람은 나였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감독님과 있으면 나는 매일 혼나고를 반복했고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감독님을 원망했던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감독님 밑에서 3학년이 되었고 첫 대회에서 내가 그토록 원하고 간절히 바랐던 득점상을 타게 되었다. 그 후로도 나 가는 대회마다 득점상을 수상했고, 항상 상을 탈 때마다 내 노력 덕분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올라오고 원래 계셨던 고등학교 감독님께서 사정이 생기시면서 다시 허감독님을 고등학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감독님 제자로 다시 축구를 배운다면 더 열심히 배우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잠시 있었지만 막상 감독님을 보니 솔직히 조금 무섭기는 했다. 그래도 앞으로 발전할 내 모습이 너무 기대되고 설렜다.
그렇게 나는 감독님 덕분에 포지션 변화도 생기고, 득점력과 동료를 이용한 플레이가 전보다 훨씬 좋아져서 고등학교 졸업도 무사히 했다. 고등학교 때 좋은 활약으로 고려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처음 고려대학교를 와서 1학년 때는 거의 경기를 뛰지 못하고 밖에서 언니들 경기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벤치에 있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그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고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2학년 때 까지도 나는 팀에 자리를 잘 잡지 못했고 헤 맸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이 학교에 보낸 부모님을 탓하고 원망하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상실감이 들었다. 경기를 많이 뛰지 않다 보니 경기력도 많이 죽고 예전에 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플레이 스타일도 저돌적이고 스피드가 장점인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고려대학교에 온 걸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나를 잃어 가던 중, 작년 주장 언니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현민아, 네가 이제껏 브라질 축구를 해왔다면, 여기서는 일본 축구를 배 운다고 생각해 봐. 그럼 너는 두 가지 축구를 모두 다 잘할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거야."라는 말이 그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언니가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서 3학년이 된 지금에서야 대충 이해가 간다. 그리고 작년 8월 월드컵에 가서 나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를 뛰지 못한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실력이 아니었다. 태도가 문제였기 때문에 감독 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연습경기를 뛸 때나 훈련을 할 때, 내 뜻대로 플레이가 되지 않는다고 짜증 내고 쉽게 포기를 했던 나의 그런 모습이 내가 경기를 뛰지 못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나의 꿈같은 그라운드에서 잔디 한 번을 밟아 보지 못하니까 나 자신이 무척이나 원망스럽고 미치도록 괴로웠다. 경기를 뛴 친구들의 땀에 젖은 얼굴들이 부럽고 미웠다. 승리를 기념으로 단체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모두가 웃는 데 내 눈에만 눈물이 고였다. 그땐 나보다 한국에서 TV에 딸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엄마아빠 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월드컵이 우리 가족 모두를 울렸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힘든 시 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는 거 같다. 뼈저리게 아픈 순간들이었기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고, 내가 꼭 딛고 일어서야 할 앞으로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국제 대회였기 때문에, 그리고 월드컵이었기 때문에 내겐 더 아 픈 시간이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내가 축구를 하면서 정말 많은 시련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겨내는 힘과 단단한 내면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헛된 시간은 없었다. 엄마는 나를 축구시킨 것을 엄청 후회하신다. 하지만 나는 축구를 통해 인생을 배웠고 축구선수로 살아오며 좋은 분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는 것에 감사하다.
지금에 내가 있기까지, 그리고 축구선수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