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이후의 아들과 가깝게 지내는 엄마들의 비방.
나는 어릴 적부터 남자사람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묘한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그 친구들과 그들 어머니와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아들을 낳을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걸까? 그때의 호기심이 현재 내 육아와 교육관의 지대한 영양분이 되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보통 '엄마와 십 대 아들' 하면 등짝 스매시, 피하는 아들, 뒷목 잡는 엄마를 떠올린다. 여자인 엄마에게 십 대 아들이란 존재는 참 다루기 힘든 외계인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친구 중 하나는 달랐다. 녀석들은 다른 친구들이 "너 엄마랑 사귀냐?"라고 놀릴 정도로 엄마와 시장도 가고 영화도 보며 사이가 좋았다.
궁금해서 진지하게 물었다. "너는 왜 엄마랑 사이가 좋아?" 평소 가볍기만 하던 녀석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답했다. "글쎄... 우리 엄마는 나를 한 번도 모욕적으로 대한 적이 없어. 아마 그래서 친하지 않을까?"
그 말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모욕'. 이 단어의 이면에는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온전히 존중해 온 한 어머니의 거대한 인내와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초동 영어학원에서 근무할 때 만난 원장님께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성인이 된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아들에게는 '내가 너를 참 좋아한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아이가 나를 믿고 따라오거든요."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내 육아와 영어 교육의 뿌리가 되었다. 엄마와 사이좋은 아들을 갖는 비결은 결국 '신뢰'다. 대화가 잘 된다는 건 엄마가 가르치려 들지 않고, 동의는 못 해도 잘 들어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엄마를 믿는 신뢰가 있을 때만, 남자 동물인 아들은 요리조리 피하지 않고 엄마 곁에 머문다.
이 '신뢰'는 곧바로 교육으로 이어진다. 특히 내가 강조하는 '표현 도구로서의 영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만난 원어민 선생님들은 한국 아이들을 보며 늘 안타까워한다. "언어는 표현의 자유가 핵심인데, 한국 아이들은 너무 잘하려고만 해서 어깨가 긴장되어 있어요."
아이가 영어 앞에서 쪼그라들지 않으려면 마음속에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못해도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 나의 실패는 부모에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만 아이는 '학습 체기' 없이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인다.
물론 실제 육아는 이론처럼 쉽지 않다. 사춘기를 앞둔 내 아들은 가끔 까탈스럽게 굴고, 나 역시 통제력을 잃고 말을 쏟아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다시 심호흡하며 멈춘다. 아이가 불만을 다 쏟아낼 때까지 시간을 내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준다. (물론 속에서는 천불이 날 때가 많다)
이 과정을 함께 해주는 것이 결국 신뢰를 쌓는 길이라고 요즘 특히 생각한다. 결국 말을 잘한다, 표현을 잘한다 그리고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안전하다'는 믿음 위에서 내 생각을 뿜어내는 기세다. 내가 관찰했던 그 어머니들과 원장님의 비결은 결국 아이의 입을 열게 만드는 '정서적 안전기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아들의 사춘기를 긴장보다는 기대감으로 기다린다. 호르몬의 격변기가 오더라도, 우리가 쌓아온 이 단단한 '신뢰의 근육'이 있다면 아들의 과의 대화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영어실력은 책상이 아니라, 엄마와 마주 앉은 식탁 위에서,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존중의 대화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