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39

근로 계약서, 타협

by 가비


싫은 소리 한번 들었다고 사무실로 달려가서 사장님 뒷목 잡게 만든 지도 2주가 지났다. 그다지 변한 건 없다. 여전히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한 결 같다. 다만 때려치우고 난 이후가 문제니까. 한결같은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

솔직히 사직서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두고 싶다면 굳이 사직서를 쓰지 않아도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다.

그냥 잠수 타거나, 그냥 허리 핑계 되면서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출근길 아침에 회사 톡방에 남겨 놓고 회사 톡방을 나오면 그만이다. 아주 쉽다. 그래도 사람이 정이라는 게 있다. 그만두더라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까지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자유분방한 성질머리 때문에 전화통화 한번 없이 나가지 않거나 전화통화 한 번으로 그만둔 것도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 일, 돈, 3가지가 다 있었으니까.

사람, 일, 돈. 이 셋을 모두 가진 회사는 흔하지 않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그랬다.


어렵게 돌고 돌아 어쩌다 보니 급하게 구한 곳이 이 회사였고 운이 좋아서 3가지를 모두 갖춘 이곳에서 정착 아닌 정착을 하게 되었다.


급여 수준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가방끈도 짧은 데다가 자유 분방한 성질머리 때문에 배운 것도 없는 주제에 잔업 특근 제외 한 달 209시간 기준 연봉 4천은 정말 감사한 거다. 덕분에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번역 사기도 한 번 겪었고, 다시 지금의 훌륭한 번역가분들을 구할 만큼의 여력도 얻었다.


불만은 없었다. 문제는 내 마음이다. 너무 적응을 해서 그런가? 지겹기도 하고 쉬고 싶은 마음도 있고 뭐 그냥 그렇다. 떠나고 싶지만, 사장님 입장에서는 아직도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건지 놓아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행동하면 미운가시가 제대로 박혀서 이용가치가 떨어져서 내보내게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응?)


불량을... 그냥.. 아주.. 감당 못하게... 만들...(응?)


지금의 나는 멍청하게도 황금거위의 배를 가르려는 부부와 같다. 이 회사에 입사한 지도 어느덧 2년이 넘었다. 업무는 충분히 익숙해졌고, 적응도 이미 끝났다. 그다음에 나에게 찾아온 것은 따분함과 지루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별다른 이유도 없이 퇴사를 떠올린다.


물론 차이가 있다면, 황금거위의 배를 가른 부부는 자신들이 무엇을 잃게 될지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직 배를 가르지 않고 있다.(응?)


사장님 뒷 목을 잡게 만든 지 2주가 지났고 근로 계약서를 새로 썼다. 뒷 목 잡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보복성으로 근로 계약서를 새로 작성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회사 입장에서 불리한 조건 때문에 일부러 갱신한 듯하다.


근로 계약서를 내밀면서 사인 하라길래 내용을 살펴보다가 찢어 버리고 사직서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어차피 한국 근로 기준상 한 달 209 기준으로 연봉 4천은 여간해서는 구하기 어렵다.


정말 학벌이 좋다면야 그 이상도 노릴 수도 있겠지만, 난 정말 가방끈도 짧은 데다가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여간한 직장에서는 버틸 수가 없다. 내가 나오던지 회사에서 잘리던지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는 사장님이 정한 기준 선에서 물량만 알아서 잘 처내만 주면 사장님은 영원한 나의 우방국이며 절대 방패나 마찬가지다.


물론 사장님의 기준선은 이미 파악을 하고 있어서 사장님의 비위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그냥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기로 하고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어차피 회사와 내가 서로 합의해서 사인이 오고 간 근로 계약서라고 하더라도 노동법이 더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거다. 어차피 나도 이 회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국내에서 말아먹은 소설의 원고의 번역을 완성했고 해외 출판사 대표들에게 검토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잘되면, 모든 것은 이 회사 덕분이다. 그거면 충분한 게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내가 타협하는 방법이다.


비록 근로 계약서 이슈가 있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회사에서는 아직은 얻을 게 많다는 거다. 한국 노동 기준법 한 달 209시간 노동 기준 연봉 4천 그리고 아직까지는 사장님도 나도 서로에게 이용가치가 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닐까?


어쨌든 나는 이곳에 입사한 뒤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건 사장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한 사람으로 납기는 꾸준히 지켜지고 있으니까.


다른 건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제발 희소식 하나쯤 왔으면 좋겠다. 큰 성공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본전 치기만 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사기당한 번역비와, 새로 구한 번역가분들에게 들어간 비용. 그 정도만 회수하는 게 목표다.


물론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그 돈만 회수돼도 완전히 손해라고 할 수는 없다. 본전을 친다는 건, 그만큼 책이 팔리고 어딘가에서는 인정받았다는 뜻이니까.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그만큼 기회도 생긴다. 지금 브런치에 꾸준히 올리고 있는 [주제파악]을 번역해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리고, 2023년에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등록해 둔 다섯 권 분량의 소설 역시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유감스럽고 안타깝지만, 국내 출판이 어렵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가 지금 해외 수출을 목표로 준비 중인 한 권의 책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는 국내 시장을 먼저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


내가 노리는 건 단순한 해외 수출이 아니다. 해외 수출을 시작점으로 삼아, 멈춰 있던 다섯 권 분량의 소설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최종 목표다.


그러니 제발 부디 좀 희소식이나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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