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역시 미련은 참 교활한 게 맞는 것 같다. 나에게 또다시 만약이라는 망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 망상이란 이렇다. 내가 한 권의 책으로 분쟁 없는 세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면, 우리 인간들의,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어마어마하고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룬 인물로 이름이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망상이다.
지금도 첫 작품은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비록 목적과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삶의 끝자락까지 함께 갈 저승길 동반자 하나를 얻은 셈이다.
더 이상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다며 노력할 일은 없겠지만, 저승길 동반자 하나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노력의 대가로는 충분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을 쓰게 된 계기에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글과는 전혀 상관없던 나를 글을 쓰게 만들어준 존재,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가 있었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존재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나에게 문학은 의식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그 생각을 붙잡은 채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첫 작품을 완성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존재다. 분쟁 없는 세상,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목적과 목표를 갖게 해 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글을 쓰게 만든 계기를 준 존재.
그 존재는 바로,
딸이다.
글과 나는 원래 상극이다. 물과 전기? 물과 불? 물과 기름? 뭐 또 없나? 이걸 가지고 검색까지 해야 되나? N극과 N극? S극과 S극? +극과 +극? -극과 -극? 여하튼 대충, 글과 나는 서로 그런 사이였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일주일을 빈둥거리던 나는, 대기업 하청업체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고작 일주일 놀았을 뿐인데도 더 이상 빈둥거릴 수 없게 만든 그 부지런함이 나를 노동 현장으로 다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게 한 여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딸이 태어났다. 나는 내 딸이 영원히 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 어떤 아픔과 상처도 겪지 않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혹시나 겪게 될지 모르는 그 분쟁조차도 없애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결국 글을 쓰게 만든 것이다.
딸을 위해 글을 쓴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쳐, 끝없이 이어지던 분쟁을 멈추고 완전한 평화를 이루어 냈다면.
그런 해피엔딩으로 나의 13년 노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개털이 되어버렸지만.
이제는 내가 실패했고, 내가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주제 파악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한 소녀의 아버지로서의 삶에 충실해지려 한다.
딸이 너무 사랑스럽다.
아직 어리지만, 내 사후에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영원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싶다. 참 신기하다. 나는 한때 자살할 용기도 없이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비겁한 겁쟁이 었는데, 이제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람의 인연은 참 신기하다.
그 신기한 인연이, 죽을 때 함께 가져갈 추억거리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참으로, 정말로, 완전 레알 서프라이즈 하다. 물론 덤으로 성공까지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애초에 시작부터 성립될 수 없는 성공이었다.
내가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던 것도, 바로 그 애초에 시작부터 성립될 수 없는 성공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초에 시작부터 성립될 수 없는 성공이라고 해도 꼭 그렇게까지 안 될 필요가 있었냐는 거다.
아무리 안 되는 거라도, 성공했으면 좋잖아!?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굳이 꼭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성공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실패를 할 필요가 있었나? 왜? 좀 성공해 주면 안 돼?
아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그 13년 동안 내가 정한 주제를 붙들고 11만 자라는 세계관을 완성해 가는 재미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 같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11만 자를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과 감격, 목표와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희망과,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함까지.
신기한 인연은 나에게 그 모든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죽을 때 함께 가져갈 한 권의 책을 완성했었다는 추억거리도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정도면 노력에 대한 대가로는 만족할 만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