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77

냉동 보관

by 가비

이야.


번역 사기를 당하고, 다시 번역가를 구하고, 또 해외 출판사를 찾아 헤매다 보니 어느새 새해가 지나 있었다.
이제 27분 뒤면 3월도 끝나고 4월이 온다.


시간은 참 빠르다.


이쯤 되면 미리 관짝이라도 하나 짜 놓아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농담이다.


두둥.


4월 15일에 월급을 받고,
5월 15일에 월급을 받고,
6월 15일에 월급을 받고,
7월 15일에 월급을 받고 나면.


휴가다....!!!


오예....!!!

휴가다....!!

그것도 무려..!! 여름휴가다...!!


4월 15일을 포함하고 월급을 4번만 더 받으면 된다.

그러면 여름휴가가 온다...!!.


그리고 휴가를 다녀오고 나면 추석 연휴가 온다.


오예....!! 신난다....!!


정확히 27분 뒤면, 해외 출판사에서 3월 5일부터 정식 검토를 시작한 지 딱 한 달이 된다.


그동안 나는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사기당한 번역비도 아까웠고, 어렵게 새 번역가들을 구해 다시 완성한 번역도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본전은 쳐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잡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내 마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정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오늘은 딸과 조금 이상한, 그런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우습고, 조금 엉뚱하고, 그런데 또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냉동 보관에 대한 이야기였다.


딸이 말했다.


“아빠랑 엄마 죽으면 냉동 보관 할 거야.”


순간 웃음이 나왔다. 너무 뜬금없는 말이어서, 장난인 줄 알았다.
나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딸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아빠, 나중에 죽으면 냉동 보관 할 수 있게 미리 허락해 줘. 나 결혼하고 자식들 낳으면, 대대손손 아빠랑 엄마를 기억하게 할 거야.”


참 예쁜 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기 싫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딸.”


딸이 바로 되물었다.


“허락하는 거야?”
“응.”
“영혼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결국 웃고 말았다.


“아빠는 잘 모르겠다.”


딸은 곧장 핀잔을 줬다.


“엄마 말대로 정말 아빠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그래서 엄마가 아랑 연애할 때 입이 그렇게 붓더라.”
“난 절대 아빠처럼 재미없는 남자 안 만날 거야.”


그 말에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 말투를 보니,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 모양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이프와 내가 죽기 전에, 딸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사랑스러운 손주나 손녀를 안겨 준다면.

정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섰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소소한 바람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과연 그런 평범한 날들이 우리에게 허락되기는 할까.

나는 그 걱정부터 먼저 하게 된다.


괜한 걱정거리고 고민을 하는 중에 용돈이라도 필요한 것인지? 딸이 나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아빠, 엄마 당뇨래.”

그렇게 잠깐 동안 눈치를 살피던 딸이 나에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딸의 한마디에 눈앞이 잠깐 어두워졌다.


머리도 핑 돌았다.


나는 간신히 표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빠한테는 말 없던데?”
“아빠 걱정시키기 싫은 거지.”
“우리 딸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몰래 약 먹는 거 봤어. 아빠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순간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마워, 딸. 그리고 아빠가 미안해.”


나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딸을 향해 겨우 입을 열었다.


“엄마한테 잘해, 아빠. 엄마 스트레스 줘서 혈압 올리지 말고.”


딸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 아빠가 엄마한테 잘할게.”


딸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약속이다?”
“응. 약속.”
“그럼 엄마 운동하게 헬스장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 줘. 돈 아깝다고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 다닌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주 오래전, 나는 누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누나, 나보다 오래 살아.”


그러자 누나는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너보다 오래 살 거야. 손주 손녀들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증손주까지 보고 죽을 거야.”


그렇게 밝고 건강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씩씩하게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서 약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걱정할까 봐 끝까지 숨기다가, 결국 딸에게 먼저 들킨 것이다.


누나도 나처럼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내가 물어본다고 해서 순순히 털어놓을 사람도 아니다. 괜히 건드리면 오히려 더 단단히 입을 다물 게 뻔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든다.


정말,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밝고 건강했던 사람인데. 혼자서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을 그 사람을 생각하면 괜히 미안해진다.


더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남편으로서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무너진다.


딸도 분명 걱정이 많을 것이다.


이미 이것저것 다 검색해 봤을 것이고, 혼자서 불안해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 생각을 하니 딸에게도 미안해졌다. 즘은 관리만 잘하면 괜찮다고들 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누나가 건강해야 딸도 무너지지 않는다.


딸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딸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아빠와는 또 다른 의미이니까.


나는 괜찮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도 역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무거운 현실을 앞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할지.

그래도 분명한 건 하나다. 혼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누나의 마음을 더 힘들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남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나는 모르는 척하면서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희망만큼은 놓지 않으면서.


누나가 무너지면, 딸이 무너진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해외 출판을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왔다.


어쩌면 그게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믿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이제 내 인생의 목표는 둘째가 되어버렸다.


누나가 먼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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