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서울로 잠수타기 전까지 많은 일을 했었다. 대학교를 자퇴하면서 가장 자괴감이 컸던 부분이 아직 내가 철들려면 한참 멀었다는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엄마 없이도 사춘기 시절 방황 한번 없이 열심히 공부하던 나를 잘 자란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런데 우리 집이 이 정도로 어려운 줄도 모르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 그때 당시 좋아하던 락공연을 보기 위해 돈을 쓰고 다녔다.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꿈도 잃어버렸고 공부도 재미없었던 난 상황이 어려워지자 바로 대학교에서 도망쳤다.
오전,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에서 뒹굴뒹굴 낙엽처럼 굴러다니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 전에 정신 차리자는 생각으로 김해에 있던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현재는 단종된 마*즈의 모터 부품을 조립했는데 내 주변에서 잘 볼 수 없었던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왔다며 여기저기 문신을 한 왕언니, 제구실을 못 할 만큼 망가진 손톱에 항상 반창고를 감고 다니던 언니, 군대 전역 후 바짝 돈 벌려고 왔다며 여기저기 싹싹하게 참견하고 다니던 남자애까지.
왕언니는 술을 좋아했는데 그만큼 사람도 좋아해서 공장 버스가 근처 지하철역에 데려다주면 우리를 이끌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여중, 여고를 나와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랐던 나에게 술은 이렇게 많이 마실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주기 위해.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스승의 날이 되자 사람 챙기길 좋아하던 왕언니의 지휘 아래 우리 작업조를 관리하시던 반장님께 서프라이즈 선물을 드린 일이다. 일반 작업자들과 함께 그 흔한 자판기 커피조차 마셔본 적 없을 만큼 정말 무뚝뚝한 분이셨는데 그날만큼은 수줍게 미소 지으시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분위기 그대로 끝까지 갔다면...
우리 작업조에서 완성한 부품의 불량률이 계속 올라가자 반장님은 결국 조를 완전히 해체하여 각각 다른 작업조로 우리를 배치하셨다.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고 나니 일도 지루해지고, 여기선 더 배울 게 없겠다는 생각에 3개월을 채우고선 공장을 그만두었다.
현장직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닌 거 같아서 다음으로 취직한 곳은 인테리어 회사 지*의 경리 업무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운영한 곳이었는데 1층 현장에서 작업하시던 아저씨들을 제외하곤 나 혼자 2층 사무직 일을 보았다. 주로 하던 일이 아파트 건설 현장에 들어갈 베란다 샤시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1층 현장에서 미리 재단한 샤시를 현장으로 가져가서 직접 설치했는데 50~100mm의 차이만으로도 설치할 수 없기에 정확성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각 아파트 호실에 들어갈 제품의 치수를 2, 3번을 확인하고서 1층에 주문서를 내려도 꼭 한, 두 개씩 잘 못 기록한 숫자가 나왔다. 현장에 제품을 설치하러 갔다가 치수가 맞지 않다며 잔뜩 화가 난 사장님의 전화를 받는 일이 종종 생겼다.
매일 자책하며 주의하는데도 같은 실수가 반복되자 조금씩 사무실에 출근하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출근하면 그 전날 작업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작업한 서류들을 어디에 뒀는지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서도 혹여나 또 실수한 건 없는지 걱정하며 스트레스받는 나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고 뇌가 지우개로 모든 기억을 싹 지운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어렸던 난 아픈 내 마음 어루만지며 달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가 나빠서 전날 일도 기억 못 하고, 일을 못 해서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며 한없이 자책하고 사장님을 눈치만 보기 바빴다. 그렇게 사무직 일도 3개월이 될 무렵 더는 버티지 못하고 관뒀다.
여담으로 회사 건물 3층은 사장님 댁이었는데 내가 막 들어갔을 무렵 할머니뻘인 사모님이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계셨다. 불편한 몸으로 건물 계단을 청소하시는 게 마음에 걸려 도와드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3층 집으로 나를 불러서 거실 청소를 시키곤 하셨다. 그래도 내가 일을 그만둘 무렵엔 잘 회복하셔서 일상생활이 가능하셨다.
그런데 하루는 인수인계로 후임자와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사모님이 집 청소를 시킨다며 이렇게 황당한 곳은 처음이라고 어이없어하는 게 아닌가. 내가 선의로 한 일이 당연한 권리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걸 보고 선의가 항상 선의로 돌아오는 게 아니란 걸 배웠다.
현장직 일과 사무직 일은 나랑 맞지 않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나자 마음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고민만 많아지고 의기소침해져서 아무것도 시작을 못 하고 있을 때 우연한 기회로 대구에서 타로카드 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