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모를 실패들이 쌓이면
외동딸인 나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동생들이 4명 있다. 29살 대학교에 재입학했을 때 만난 아이들. 1년 만에 다 같이 모여서 숙소 잡고 유튜브 보면서 놀다가 맛집도 가고, 인생네컷도 찍고선 방금 헤어지고 돌아온 길이다. 내일부턴 자신들의 자리에서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겠지.
그 아이들을 만나기 전 첫 입학 했을 당시를 얘기해보려 한다.
수학이나 과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암기 과목이 더 싫었던 난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곤 어느 순간부터 말하고 다녔던 선생님이 되기 위해 사범대를 목표로 공부했는데, 보기 좋게 수능을 망쳐서 공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교의 수학과 과학은 내가 어려워하던 고등학교 수준에서 3배는 더 난이도를 올린 느낌이었다. 이해는 둘째치고 전공 서적을 통으로 외워야지 시험을 칠 수 있는 상황. 암기가 싫어 이과를 갔는데 이 문과와 이과를 콜라보한 상황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거기다 2000년 때 초반은 앞에서 대놓고 공과대학 여대생은 취업이 힘들다고 말할 만큼 유리천장이 두껍던 시절이었다.
내가 원하던 과도 아닌데 공부는 어렵고 취업은 힘들다고 하니 반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에는 학원 강사와 고등학생 수학 과외를 했다. 어느 동네에나 아이들이 넘쳐나던 시절이라 그럴듯한 지방대 타이틀로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사범대를 목표로 반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작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즐겁지도, 보람을 주지도 않았다.
중, 고등학생 때 집안 상황이 넉넉하지 않아서 6개월 동안 학원 다닌 게 내가 받은 사교육의 전부였다. 순전히 학교 자습실과 독서실에서 공부하며 엉덩이 힘 하나로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다. 내가 했던 것처럼 수학 문제집을 풀고 오답 노트를 정리하면서 풀이를 외우면 아이들 수학 점수가 올라갈 거라고 기대했다. 결론적으로 인터넷 스타 강사들의 강의 하나도 연구하지 않고, 나만의 요점 노트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수업했다. 당연히 결과는 망!
지금 생각해보면 준비성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양질의 수업을 제공하지 못한 거였는데 나는 단순히 내 능력이 부족하고 아이들과 맞지 않다며 학원과 과외 수업을 그만두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과외는 애들 성적이 오르지 않으니 자동 정리되었고, 학원은 이런 식으로 계속 다니는 게 죄송하여 원장 선생님이 붙잡았음에도 관뒀다.
어차피 반수를 준비했기에 학교는 시험 치는 날에만 겨우 갔고, 학원, 공부방, 과외 등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일 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꿈은 사라졌는데 내 앞에 남아있는 건 일 년동안 받은 두 번의 학사경고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져 버렸다.
학사경고를 한 번 더 받으면 퇴학당하기에 휴학하고 여러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했다. 패스트푸드점, 공공기관에서 학생 근로 체험, 식당 서빙 등 닥치는 대로 일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방황이 길어지자 주변에서 걱정이 커졌고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복학했다.
그러던 차에 아르바이트하던 패스트푸드점에서 월급을 보낼 테니 통장 사본을 가져오라고 해서 은행에 갔다. 그런데 내가 신용불량자라 통장을 만들 수 없다는 게 아닌가. 2000년대 초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일단 쓰고 나중에 갚자는 분위기에 한창 신용카드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사람들이 4, 5장의 카드를 쓰며 카드값을 돌려막다 보니 신용불량자가 급속도로 늘었고 사회 문제로 한창 뜨겁던 시기였다. 그런데 내가 신용불량자라고?
내가 입학하던 해 집안이 어려워서 아버지가 내 앞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현금서비스를 받으셨다. 등록금을 내고 집안의 급한 불을 끄려고 빌린 삼백만 원의 돈이 내가 ‘꿈을 찾네, 철이 드네’라며 허송세월 보내는 동안 천칠백이 넘는 빚으로 불어있었다.
신용불량자는 취업에 제한을 받던 시기라 이제 대학을 졸업한다 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였다. 거기다 빚까지 있다니, 내 인생은 이제 망했다며 바로 대학교를 자퇴했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셨고, 우리 집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친구들은 학교를 왜 자퇴했냐며 빨리 정신 차리라고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천성이 밝아서 허허실실 웃고 다녔지만 꿈도 없고, 사회에 나가서 내세울 능력 하나 없었던 난 흙탕물인지, 늪지인지 모를 곳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실패를 한 이유, 실수한 점, 간과하고 지나친 부분 등이 보이지만 이십 대 초반의 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너무 작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맞서야 할 세상은 너무 탁하고 무거워서 빛이 들어올 구멍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주위에선 한숨만 깊어졌고 그렇다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던 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서울로 갔다. 아버지께만 번호를 드린 뒤 신림동에서 사시 공부를 하던 친구를 찾아서 고시원에 들어갔다.
그때의 환경에선 마음만 조급하고 작아질 뿐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야반도주하듯이 떠나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내가 찾은 마지막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