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들으러 학과 건물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고 건물 주변만 배회하다가 돌아오길 수차례, 어느 순간부턴 그마저도 가지 않았다. 흙탕물 위로 둥둥 떠다니며 발 디딜 곳 하나 찾지 못하던 내가 마음 붙인 곳이 락공연 이었다. 세상에 맞서서 반항할 이유도, 용기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나 대신 신나게 소리쳐주는 헤비메탈과 하드록에 빠졌다. 주말이면 공연장을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밴드가 생기고 팬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그중에 한 언니가 서면 밀리오레에서 옷 가게를 했는데 가게 정리하고 대구로 간다며 나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2000년대 후반 밀리오레 앞은 두 가지 이유로 항상 사람들이 북적였다. 하나는 저녁이면 건물 앞 무대에서 열리던 장기자랑 공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길게 늘어선 타로카드 천막이었다. 특히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이 천막 앞에 장사진을 이루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언니는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는지 대구에 있는 지인들이랑 타로카드 점집을 열려고 한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마침 공장일, 사무직, 학원일 등 어느 것도 나랑 맞지 않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힘들었던 시기라 길게 고민하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
대구에서 언니랑 같이 살기로 하고 필요한 짐만 간단하게 챙겨서 떠났다. (이때부터가 역마살의 시작이다.) 이미 오픈 날짜까지 계획하고 준비하고 있던 언니들 덕분에 여유 시간 없이 빨리 일을 배워서 적응해야 했다. 타로카드를 할 줄 알던 언니에게서 설명을 들으며 책을 보고 카드의 뜻을 외웠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카드의 의미들은 정리되어 갔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바로 점을 볼 수 있겠는가.
고민하다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타로카드를 봐주기 시작했다. 다들 타로를 봐주겠다는 말에 웃다가도 막상 카드를 뽑으라고 하면 진지해졌다. 열심히 카드 의미를 앞뒤로 맞춰가며 설명해주면 긴가민가하면서도 “맞아. 맞아!”라고 맞장구쳐주는 친구들 덕분에 조금씩 일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정말 착한 사람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이제 막 카드를 보기 시작한 나에게 무슨 믿음이 있었겠는가. 그래도 하나를 봐주면 다른 운도 봐달라고 고민을 술술 털어놓았다.)
언니들 세 명과 나처럼 직원으로 고용된 두 명, 총 다섯 명이 동성로 중심지에 테이블을 깔았다. 두근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맞은편에 손님이 앉았고, 카드를 뽑게 한 뒤 내 방식대로 읽어 내려갔다. 솔직히 그날 손님이 얼마나 왔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긴장 반, 흥분 반으로 완전히 들떠서 일했으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의 추진력은 ‘무식함’이었던 것 같다. 내 주변에 공장 일을, 경리 일을, 타로카드 일을 해본 사람이 없었기에 어디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 일단 행동으로 실행했다.
지금처럼 정보가 많은 시대엔 누군가 이 일은 어떻겠냐고 제안하면 경험담부터 찾아보기 마련이다. 그 일의 좋은 점은 물론 힘든 점을 생생하게 표현한 글, 영상까지 너무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나와 맞을지, 맞지 않을지 판단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바빠서 에너지를 아껴야 할 시기엔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삽질을 하면서 구덩이로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당신에게 당장 해야 할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 없다면 한 번쯤 뻔한 삽질도 해보았으면 좋겠다.
그 의미 없어 보이던, 힘들기만 했던 삽질 덕분에 이제는 보기 좋은 맷집을 가지고 있다.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아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이불 속으로 숨어들 만큼 유약했던 내가 이제는 기세 좋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나를 좀 더 잘 돌보게 되었으니까.
타로카드 일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궁금한 점,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속 시원해하는 부분이 보람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카드 의미를 설명해주고, 소통하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걸 이때 알았다.
그런데 이 일도 6개월만 하고 그만두었다. 오후 다섯 시에 출근해서 새벽 1시나 주말엔 새벽 3시까지 일을 했다. 그리곤 언니들과 야식을 먹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PC방이나 드라이브 갔다가 아침에 잠이 들었다. 생활 리듬은 깨졌는데 일당은 5~14만 원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큰돈을 벌었다.
예전 공장이나 사무실은 종일 일하고 120~150만 원의 돈을 받았는데 갑자기 쉽게 돈을 벌게 되니 뭔가 잘 못 지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어렸으니까 그랬지 저 때는 저 돈이 왜 그렇게 크게 보였는지. 빨리 돈 벌어서 우리 집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했다면 절대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적성에 잘 맞고 돈도 많이 버는데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약간 아쉽다.)
대구에서 짐을 정리하고 떠나려니 부산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돈만 모았을 뿐 결국 내 상태는 그대로였으니까. 여전히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무능력자였다. 또다시 주변에 걱정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서울로 갔다. 신림동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친구만 믿고 나도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아무 계획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