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뽑아 든 칼이 꽝이 되지 않도록

현재의 회사 생존기

by 아는 언니

6명이 둘러앉은 사무실에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상석에는 팀장님의 책상이, 그 앞으로는 책상이 3개씩 대치하여 마주 본채로 자리하고 있다. 부팀장님을 포함한 팀원 5명이 2명, 3명씩 일렬로 나뉘어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다. 다행히 팀에서 막내인 내 앞자리는 공석이라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던 시선을 좌측으로 살짝 돌려 팀 분위기를 훑기가 용이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크통에 얌전히 꽂혀있는 해적 아저씨의 머리가 튀어 오르지 않도록, 꽝을 뽑지 않기 위한 눈치 싸움이 이제 막 사무실에서 시작되려 한다.


부팀장님께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시선을 팀장님 쪽으로 돌리며 먼저 한마디를 꺼내신다.

“팀장님, 이번 달에 회식 언제 할까요?”

“휴가자 없는 날에 하자.”

막내인 나는 조용히 일어나 우리 팀 사물함에 들어있는 휴가 신청서를 꺼내 비어있는 날짜를 훑는다. 거기서 공란이 있는 날짜라도 야간 근무가 있는 날은 피해서(야간 근무를 마치면 아침에 퇴근하는데 그때 회식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3개를 불러드린다. 팀장님께서는 조용히 탁상 달력을 응시하시다 딱 한 날을 찍으신다.

“이 날짜에 회식하자.”


대리님 한 분이 “월급 나오는 날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하고 한 마디 꺼내지만, 평소 무뚝뚝하셔서 쉬이 입을 떼지 않는 팀장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신다. 그날은 싫다는 의사를 목소리나 제스처 하나 없이 확실하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걸 캐치 못 하신 대리님이 옆에서

“윤정씨도 이날이 좋지 않아요?”라고 물으신다.

“팀장님이 그날 일정이 있으신 거 같아요.”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민하다 이내 결심한 듯 수많은 플라스틱 칼 중에서 하나를 조심스럽게 뽑아 든 부팀장님, 다행히 꽝을 뽑지 않으셨다. 대리님이 성급하게 다른 칼을 뽑으시려는 걸 제지하며 아직 순서가 아니시라고 차례를 알려드렸다.


드디어 날짜가 정해졌다. 하지만 처음부터 날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휴가자가 있는 날을 피해서 잡을 거라는 걸 팀원들도 예상했으니까. 본 게임은 지금부터다.




회식 날짜를 잡는 데 성공하자 부팀장님께서 한마디를 더 꺼내신다. 본인의 차례가 아님에도 팀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한 번 더 나서서 플라스틱 칼을 뽑으신 거다.

“팀장님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십니까?

”...“

우리 팀의 엄근진을 담당하고 계신 팀장님은 역시나 말씀이 없으시다. 이제는 팀의 막내인 내가 나설 차례다.

”팀장님 혹시 빕*는 어떠세요?

“빕*? 거기는 술이 없잖아?”

“맥주랑 와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지점을 찾았거든요, 저희 1차에서 쓰는 비용이면 빕*에서 2차까지 해결할 거 같아요.”


사실 오늘의 주요 사항은 바로 회식 장소였다. 늦둥이를 키우는 부팀장님께서는 야간에 출근하는 사모님을 대신해 아들을 봐야 해서 매달 한 번씩 있는 회식에 거의 참석을 못 하신다. 그런데 대학생인 첫째 딸이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오는 이 시기가 되면 회식 참석이 가능하신 것이다. 그래서 지난달부터 팀장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우리 회식 어디로 가지? 라며 내심 기대감을 표출하셨다.


“부팀장님 모처럼 회식 참석하시는데 가고 싶은 장소로 가시죠.”라고 의사를 모으자 한참 고민하시다 빕* 얘기를 꺼내셨다. 평소 입이 짧으셔서 팀에 비치된 간식도 잘 드시지 않고 회식을 가도 음식보단 알코올을 주로 드시는 분이라 이것저것 다양한 음식을 준비해 놓은 뷔페가 구미에 당기신 것 같았다. 거기에 생맥주와 여러 종류의 와인까지 무제한으로 제공된다니 이보다 적합한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이제 팀장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평소 회식 장소로 삼겹살집과 횟집만 가시는 분이라 우리 팀 회식은 뚱*이와 만*이라는 식당 두 군데를 교대로 가는 상황이었다. 다른 식당들도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안성진 셰프는 저리가라 할 만큼 냉철한 평가를 하셔서 도돌이표처럼 원래 식당으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맛집도 많고 다양한 음식이 즐비한 부산에서 삼겹살집과 횟집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술은 소주, 여름엔 조리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확고한 취향을 고집하시는 미슐랭 팀장님의 벽을 넘어야만 한다.




아직 선장의 머리가 오크통 위에 얌전히 있는 걸 보니 내가 조심스럽게 뽑아 든 칼도 꽝은 아니었나 보다. 이제 대리님의 차례, 이번 한 번만 더 성공하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고지를 바로 코앞에 두고 대리님은 결심한 듯 칼을 뽑기 위해 손을 뻗으셨다.

“팀장님, 윤정씨가 소주도 준비한다고 합니다. 한번 가시죠?”

.

.

.

“안 간다.”


조심스럽게 칼을 뽑아서 승기를 휘두르려는 순간 오크통 위에 잠들어 있던 선장의 머리가 기세 좋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우리의 상금도 저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대리님이 뽑아 든 칼은 끝내 아더왕의 검이 되지 못했다.

생맥주와 와인이 무제한이라는 말에 고민하던 찰나 대리님이 꺼내신 ‘소주’라는 단어가 팀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렇네, 소주가 없네!’




근 5개월 만에 부팀장님께서 회식에 참석하시는데 이번 달에는 더운 날씨를 피해 만*에서 회를 집어 먹고 있겠지. 음식이 무엇이 중요하랴. 결국 모든 회식의 종착점은 알코올인 것을. 냉장고에서 막 꺼낸 소주와 맥주를 3대 7의 황금비율로 말아야지. 갓 튀겨서 빠삭한 단호박 튀김과 얼큰한 매운탕을 안주 삼아서 유리잔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전에 얼른 부팀장님 잔에 짠하고 건배를 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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