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뱀파이어를 아시나요?

by 아는 언니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친구에게서 전화 통화할 수 있냐고 카톡이 왔다. 마침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약속 장소까지 40분 정도 여유가 있어 전화를 걸었다.


친구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남편이 부업으로 온라인 판매를 하는데(사업자명의는 친구 앞으로) 파는 제품 중 하나가 지식재산권에 걸려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경찰서에 가기 전 나와 대화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연락한 것이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많이 놀랐겠다며 걱정하자 친구는 그동안의 사회 경험 덕에 괜찮다며 덤덤하게 반응했다.

남편의 상황과 온라인 판매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해서 조심히 갔다 오라며 친구와 통화를 마무리했다.



볼일을 보곤 오후 늦게 집에 와서 쉬려는데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경찰 조사는 간단하게 끝났고 검찰청에서 연락이 갈 거니 기다리면 된다는 형사 이야기를 끝으로 나오는 길이라고.

온라인 쇼핑몰의 어려움, 남편과 겪은 트러블, 유튜브를 시작할까 고민 중이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예약한 병원에 갈 시간이 되었다. 친구에겐 그래도 남편과 잘 상의해 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느껴지는 뭔지 모를 묵직함.

물감을 뒤집어쓰고 그물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난 전화 통화보단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같은 공간에서 말을 주고받으며 호흡의 속도를 맞추어 가는 게 집중하기에 편하다. 그런데 전화 통화는 상대방의 템포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많이 크다. (친구는 두서없이 말이 길어지는 자신의 성향을 잘 알아서 바쁘면 언제든지 전화 끊어도 된다며 통화를 시작한다.)


20대 땐 시간은 많고 에너지도 넘쳐서 다른 이가 나를 찾아주기만 해도 고맙고 반가웠다. 그런데 이제는 해야 할 일은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정작 에너지는 부족해서 아무리 반가운 이라도 연락이 조심스럽다.

소중한 이를 만나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그 빈도가 느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십 년 넘게 하던 일을 정리하고 전업주부가 되자 같이 요리해서 맛있는 거 먹자며 놀러 오라는 지인, 연휴에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갈 건데 같이 얼굴 보자는 친구 등 고맙게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다. 교대 근무를 하는 내가 상대적으로 평일이나 주말에 쉬는 날이 많다 보니 부담 없이 연락을 주는 편이다.

처음 한, 두 번은 그 만남이 뜻깊었지만 내가 에너지를 사용해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수록 상대방에게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반복되는 일상에 내 시간이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자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고민하다 내가 찾은 방법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벌이는 것이었다.

평소 독서가 취미인데 관심사가 재테크라 너무 그쪽으로만 편향되어서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 모임을 찾아 참여하고 있다. 매달 참여 인원이 조금씩 바뀌더라도 정해진 한 권의 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에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랑 결이 맞는 사람이랑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브런치 스토리를 시작하게 된 것도 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 강의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바로 적용해보자는 생각에 브런치 작가와 강의를 동시에 신청하였다. 내 안에 담긴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되어서.




나중에 시간이 지나 퇴직하고 많이 여유로워졌을 때 지인들과 보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내가 예전에는 사는 게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었어, 미안해.”라며 싹싹 빌어야지. 그전까지는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나만큼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우자.

바로 지금, 당신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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