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멍덩한 구름이 겹겹이 쌓여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날이었다. 어느 틈엔가 다 끄적여버린 ‘원고지’를 사기 위해 신을 신었다. 며칠을 어두컴컴한 방에서 젖어 있던 탓에 실로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그날은 줄곧 가던 프랜차이즈 문구사 대신 10년 전 애용하던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찾았다. 방학을 맞은 학교는 애진작 죽은 듯이 보였다. 학교의 죽음에 썰렁한 기온과 스산한 하늘이 제 한 몫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 앞 문구점은 인기척 하나 없이 불이 꺼져 있었다. 손잡이를 살금 당겨보니 짤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가게 안에 딸린 방에서 어수선한 기침 소리가 났다.
“안녕하세요.” 주인 할아버지가 급하게 슬리퍼를 신으며 말했다.
학교 앞 문구점은 ‘어서 오세요’보다 ‘안녕하세요’가 어울리는 법이다.
“원고지 한 권 주세요. 두꺼운 걸로요.”
우리는 얇은 원고지밖에 없어요. 초등학교 앞이잖아. 할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그렇구나. 백일장에서 스무 장 남짓 되는 원고지를 원망스레 노려볼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웃었다. 원고지 두 권을 쥐고 둘러본 문구점은 여전했다 (늘어놓은 상품의 캐릭터만 바뀌었다). 무심코 걷다 보니 근처 놀이터에 다다랐고, 철 지난 은행잎은 군데군데 곰팡이 핀 채 자꾸만 발에 차였다. 놀이터 가장자리의 나무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키 작은 잔디를 보았다. 누렇게 색이 바랜 잔디는 저마다의 떨림을 리듬 삼아 겨울을 나고 있었고 나는 맥락 없이 녹이 슨 정글짐을 오르고 싶어졌다.
2022. 01.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