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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된다는 것

남편의 꿈을 응원하며 책 만들기


이제 끝났다. 나의 손에서 빠져나갔고 이제 인쇄를 다시 하지 않는 이상 다시 되돌릴 길도 없다. 모든 오타, 모든 디자인 에러를 다 감당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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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Dig Deep을 완성한 것은 우리가 데이트 할 때의 초반이였으니, 아마 2013년 정도였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글을 쓰는 지도 몰랐고, 그냥 심심해서 한국에 온 미국인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의 만남은 짧아봐야 3개월정도이거니 생각했었다.


점점 이 사람과 시간을 지내다보니, 이 친구는 하고싶은 것도 딱히 없고 하니 점수 맞춰서 대학들어가려고 영문학과를 지원한게 아니라, 정말 글을 쓰고 싶어서 영문학과를 전공했고, 그것도 학부과정에서 석사수업까지 들으며, 교수님의 총애를 받으며 졸업한 경우였다. 남자친구로서 나를 믿기 시작했을 때(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좁아터진 그의 원룸에서 나에게 이야기 하나를 건네주었고, 그게 바로 Dig Deep 이였다.


확실하게도 편견은 존재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건 생각보다 황홀한 일이였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작품성이 대단한 글을 읽어도, 대입을 위해 텍스트를 분해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나는 글을 읽을 때의 감흥이라곤 1이 없는 사람이였다. 허나 이 친구의 글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사람의 뇌에서 이런 표현이 생각날까? 글을 읽다가 눈을 감으면 풍경이 그려지는 말이 이런 거구나. 특히 이 이야기가 의미깊었던 것이, 남편의 고향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 글을 읽다보면 이 사람이 더 잘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였다.


이야기를 읽으며 간접적으로 가슴이 저리는 느낌을 받았고, 미묘한 슬픔과 감동이 어우러진 감정은 계속해서 연애하는 기간동안 남아있었다. 1년에 한 번 꼴로 남편은 단편소설 하나, 하나씩 끄적거렸고 지속적인 구걸과 설득 끝에 나도 그의 불안함의 베일에 쌓여진 이야기를 하나, 하나씩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8년에 이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고,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현실의 안정성에 많은 중요성을 두었던 것 같다. 남편으로서 외국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나의 선택에 혹여나 후회를 할까 싶어, 국내에서 한국인과 결혼했을 때 가질 수 있는 가치들을 비슷하게 가지고 싶었다. 그렇다보니 남편의 글에 대한 응원보다는, 남편의 직장과 우리의 가정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골똘히 염두에 둔 것 같다. 결코 이러한 생각하는 시간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보다 현실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내가 과연 이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었을까?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인 것처럼, 결혼과 현실에서의 금전적, 정신적인 안정은 상호의존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 안정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안정이 현재 조금이라도 있어야 결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결혼이란...??

행복한 결혼식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2년동안 집도 꾸미고, 요리도 하며 재미나는 신혼생활을 했더란다. 저녁 마주보고 앉아 맛있는 밥을 해먹고, 가끔 밖에 나가 멋진 곳에서 외식도 하고, 키우는 강아지와 좋은 추억을 쌓으면서 인생의 지루함을 달랬다. 하지만 세상에서 지루한 걸 제일 싫어하는 우리 둘은 이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What now? 이 생각의 씨앗이 심어지면서 승진, 학위, 취미 등 소위 사람들이 밟는 다른 단계에 대해 미친듯이 검색하기 시작해 내 인터넷 검색기록은 장대하게 길어졌다. 마치 지금이라는 모래더미에서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말이다. 남편은 아기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재생산의 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그는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상. 글. 표현.


이렇게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구체화 된 것은 바야흐로 1월 2째주 주말.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어야 하는 우리는 남대문에서 버번 위스키 한 병을 사와 집에서 안주를 먹으며 올드패션드 칵테일을 홀짝이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세 잔 째, 용기가 생긴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변사람들에게 다이어트를 해야한다고 말해야하는 것과 같이, 책임을 져야하는 한 마디를 꺼냈다.

"우리 유학가자."

결혼하기 전 석사를 밟고 싶어했지만 결혼과 직장을 이유로 접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참 미안했다. 하지만 엄청난 인터넷 검색 기록 끝에 찾아낸 건 현재 내 직업에서 유학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고, 나의 직업은 유학생활동안 경력을 인정해주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였다. 게다가 유학을 하고 돌아오면 현재 직업에서 나아갈 수 있는 분야가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장소는 아마 코로나로 안전한 뉴질랜드? 학비는 비슷하지만 1년과정이고 방학없이 빠르게 하면 나는 1년안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 소득이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남편도 같이 공부하면, 지금 직장에서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주절주절 대며 남편에게 PR을 했다.


캡처3.JPG 처음에 고려했던 오클랜드 대학교


그런데 남편은 생각치도 못한 말을 했다.

"내가 강아지 데리고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둘 다 소득이 없어져버리면 비싼 뉴질랜드 물가를 어떻게 감당해내려고. 너 용돈을 보내주는 것이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

처음에는 결혼 5년차 선배들이 말하는 "주말 부부가 제일 좋아. 덜 봐야 행복해."라는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나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왜~ 여기서 뭐하려고~?"로 대답했다. 하지만 남편은 생각보다 굉장히 진지했다. 내가 가고싶은 학교는 오클랜드에 있는데, 오클랜드는 세계에서 살기 비싼 나라 TOP 10에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대학원 학위를 밟고자 한다면, 모교에서 월급을 받으며 수업도 하는 석사과정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학업적으로도 더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오클랜드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남편이 모교에서의 대학원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편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밟는 석사과정인 MFA 프로그램은 글을 꾸준히 적고, 동료학생과 교수들에게서 꾸준히 피드백을 받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글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에 대해 정말 열의가 있어보였다. 게다가 미국 대학원은 TA 제도가 굉장히 잘 되어있기 때문에, 나같은 teaching experience가 있다면 국제학생이라고 해도 충분히 english teaching position을 가 가능하기에 실제로 연구비를 받으며 석사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미국엔 언제나 우리를 환영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의 가족이 있다는 것.


마침내 칵테일 다섯 잔 째를 마시면서 우리는 같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다음 챕터라고 입을 모았고, 그 때부터 마법같이 루틴이 달라졌다. 나는 영어점수를 맞추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기 위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내 커리어에서 석사학위로 더 큰 범위의 업무를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부풀었으며, 남편은 미국 생활에 대해 우려섞인 기대를 높은 톤의 목소리로 얘기하곤 한다. 게다가 자신의 글에 대해 이제 공개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하니, 다른 잡지사들과 단편소설 공모전 등에 자신의 글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상상하며 나와 남편 모두 우리의 안정적인 공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으며 도전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이다.


20190204_175900.jpg 2년 전 방문했던 남편 모교


이쯤되면 맨 앞에서 언급되었던 나의 흥미로운 체념은 왜 적혀져있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최근 시간적 여유가 생겨 영어공부도 할겸, 남편의 Dig Deep 소설을 다시 읽었다. 연애 초반에 다른 사람의 인생을 글로써 들여다보게 되는 설레임, 글이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의 파급력, 글을 읽음으로서 오는 짜릿함. 계획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소설을 내가 가장 잘 아는 언어,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은 글을 독해하는 수단 중 작가의 의도를 가장 많이 생각해야하는 과정일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며 왜 이 비유를 썼을까, 이 비유를 한국인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엄청난 고민을 한다한들, 문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정말 역부족이였다. 차라리 문제집으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포기해야겠다 한 순간, 남편이 한국에 대한 소설을 썼을 때 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을 할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했지만 현실로 옮겨지지 않았을 때가 기억났다. 자신이 완전히 독해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살고있는 제 2고향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이 번역된다는 것이 굉장히 의미있었을텐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굉장히 아쉬워했었다.


남편이 내 도전을 항상 응원해주었던 것처럼, 남편의 다음 단계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꾸준히 번역해나갔다. 때때로는 번역기의 도움을 빌리면서 내가 기계보다 글을 못쓰는 구나, 좌절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이 비유를 한글말로 잘 표현했다고 나 자신에 칭찬을 하기도 하며 번역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마침내 완성이 되었다. 교정사의 도움을 받아 표현을 조금 더 다듬고, 이제 책으로 편집을 해야될 때가 왔다.


남편은 글쓰는 친구들 모임에 속해있는데, 숙제처럼 단편소설 하나씩 써서 만나 서로의 작품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곤 했다. 막상 책으로 만드려고 하니 욕심이 생겨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컨택해서 Dig Deep를 읽고 감상평 한두줄을 부탁했다. 평소 남편 글을 읽었었거나, 남편이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2주 후가 남편 생일이기도 해서 남편 생일선물로 책을 주려고 하는데 끄적여달라고 부탁했고 다행히도 친구들은 정말 좋은 선물일 거라고 기뻐하며 열성적으로 도와주었다. 친구들이 적은 감상평을 책 뒷표지에 포함시켜 나름대로의 표지 편집을 완료했고, 속지 첫째 장에 'Happy Birthday'라고 적어 마무리해서 출판사에 보냈다.


기껏 해봤자 두께 0.3cm도 안나오는 자그마한 책자이지만, 우리가 부부로서 생활하는 동안 마음에 남아있을 상징적인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부부로서 인생의 다음 단계의 도전을 할 수 있게끔 서로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관계, 서로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게끔 지루함에서 벗어나 도전을 할 수 있게끔 적절한 발판을 깔아주는 관계. 계속 부부로서 부부수업을 하나, 하나, 밟아나가는 우리가 정말 대견하다.

캡처2.JPG 완성된 Dig Deep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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