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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의 사소한 긁적임 Jan 06. 2024

한국이 이렇게 대단한 나라인데 왜 아기를 낳지 않지요?

투 매니 그레이트 피플 인 코리아. 교수님 왈

얼마 전, 여기 유학하고 있는 대학교 교수님들과 펍에서 맥주 한 잔을 하는 행사가 있었다. 다른 과에서도 교수님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중 처음 뵙는 한 교수님이 나에게 다가오시면서 물으셨다.


"어깨너머로 들었는데, 한국인이라면서요? 제가 한국에 관심이 좀 많습니다만."


사실 한국의 인지도 및 인기가 미국에서 치솟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다가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저 김치 좋아해요'부터 '정국 실제로 본 적 있어요?'까지, 이렇게 과분한 관심이 싫진 않지만 내가 한국인을 대표하게 된다는 생각에 참 어색한 대화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교수님의 앵글은 조금 달랐다. 


"내가 미국에서 교수하면서 참 다양한 학생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학생들만큼 열의가 넘치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 한국의 출생률이 급감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왜 가족을 꾸리기 싫어하는지 참 의아하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굉장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묘하게 칭찬받는 느낌이 들면서도 아주 큰 허를 찔리는 그런 느낌이라 그래야 하나. 사실 대답하기 굉장히 힘든 질문이기도 하다.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안다면, 한국에 저출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지. (저 질문은 사실 한국사람들이 해외 나가면 들을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이걸 읽는 사람들도 저 질문에 대해 한번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교수님의 질문에 내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석유와 같은 별다른 자연자원(natural resource)이 없고, 인적자원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갈아 넣어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해 냈다. 우리에게 믿을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인적자원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우리를 공부와 야근과 노력으로 단련시키는 것이 생존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많은 한국인들이 더 열심히 살아가게 된 거고, 제삼자의 외국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노력과 투지의, 물을 와인으로 만들고 와인을 물로 만드는, 마법적인 한국인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첨예한 경쟁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만 소외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을 했지만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경쟁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보니까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부터 인적자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경쟁에 참여시킨다. '이 정도는 해야'가 점점 높아진다. 너무 지친다. 실패도 한두 번이어야 회복하지, 항상 '이 정도'가 되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며 왜 그렇지 못한 지를 계속 따진다. 그것은 부모의 자산일 수도 있고, 자신의 외모일 수도 있고, 자신의 태어난 시, 자신의 이름의 두 번째 이름, 자신의 침대의 위치, 등. 이렇게 '이 정도'가 되지 못한 나 자신은 절대로, 다른 생명을 책임질 수 없다. 그 생명이 태어나 지금 내가 느끼는 삶의 고통을 느낀다면, 삶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실 나도, 이런 고통을 느낄 바엔 삶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삶은 한과 고통이라고 우리 조상님들이 그렇게 말해왔는데, 역시 옛날사람들 말씀은 틀린 말이 없다. 


앗, 교수님 앞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둘리 '아 이건 친구의 이야기입니다'라고 하며 얼버무렸다. 교수님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턱에 문지르며 '베리 인터레스팅'을 시전 하셨다. 그러면서 이런 소리를 하셨다.


"내가 만난 한국사람들은 너무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서 한국사람들=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요. 모델 마이노리티(모범적 소수그룹)라고 하더군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많이 노력하는 사람 아닙니까? 당신 지도교수한테 좋은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야말로 인종차별 아닌가 싶었다. 여태껏 한국인들의 피땀 흘리는 경쟁과 노력이 삶의 만족도를 추락시키고 아주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얘기까지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이미지일지라도, 이 교수가 가지고 있는 [한국인=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마치 이런 고정관념을 깨면,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삶은 살만한 것, 다른 생명에게 선물처럼 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명품백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정성스럽게 만든 김치볶음밥 같은 선물.


경쟁의 쳇바퀴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나 자신, 내 동생, 내 친구들이 보였다.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순간 성장의 기회는 없기에, 쳇바퀴 안에서 나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너무 불쌍했다. 안타까웠다. '이 정도'는 해야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정도'를 하느라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만, 이제 그만. 더 이상 바보같이 노력하는 한국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경쟁에서 이기면 또 다른 경쟁을 해야 하는 생쥐레이스를 거부하고 싶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내 삶이 살만한 것, 다른 생명에게 '삶, 나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포와 불안이 아닌, 호기심과 사랑이 의지와 노력을 불러왔으면 좋겠다. 


교수님한테 이렇게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교수님, 한국사람들도 무서운 사람 많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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