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백수 일기
올 설날은 악몽을 꾼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온 가족이 즐거운 만남을 하는 시간이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장모님과 딸 셋이 어제 우리 집에 모여 식사를 한 후 한바탕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는 매년 처갓집 식구들과 식사를 한 후 본가로 가서 자리를 피해 준다. 장모님과 딸 셋이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들을 편하게 할 수 있게 하고, 혼자 계신 어머님도 적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제는 본가에 큰 형네 가족들과 조카사위, 돌 지난 손자까지 와서 모처럼 분위가 좋았다.
올해는 탈 많던 본가는 오히려 무난했다. 우리 집에 모인 착한 딸 셋을 가진 장모님이 문제였다.
오죽하면 딸들이 엄마를 아쿠마라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난 사실 장모님의 강인함 덕분에 딸들이
강하게 잘 컸다며 장모님을 두둔하곤 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장모님의 억지소리를 전해 들을 때면
숨이 막혀온다. 잘 살고 있는 딸들을 저주, 시기, 이간한다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다.
그런 부모 밑에서 결핍과 고통을 견디고 살아왔기에 아내에게 엄청난 내공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다.
설날에 모여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로 세 딸들의 가슴을 헤집어 놓고, 오히려 당신이 억울해 잠을 못
잤다며 오늘 아침 딸들과 손녀까지 전화를 해 또 분란을 일으켰다. 나와 비슷하다며 누구보다도 장모님을
공감해 드리다가도, 장모님의 터무니없는 모함을 들을 때는 분노가 차오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떻게 부모가 자식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못 견뎌하냐는 것이다.
여하튼 내 입장에서는 그런 장모 덕분에 아내 같은 딸이 만들어져, 내가 그 수혜를 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감사할 수 있다. 아내는 음식차리느라 고생만하고 억울해 잠을 설쳤는데도, 오늘 아침 장모의 분노에 찬 전화를 또 아무렇지 않게 응대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차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거실로 나왔다.
그 속 얘기들은 내가 장모님을 더 불쌍히 여길 수 있을 때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 또한 총량의 법칙인가? 시어머니와 남편의 사랑을 상쇄할 수 있는 엄마를 만났다고 다독여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