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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Nov 30. 2023

12월 26일의 크리스마스 트리

몇 개월 전, 동네 글쓰기모임에서 제작한 책이 나왔다. 내 글만 오롯이 담겨있는 지면은 처음이지만, 국가 기관에서 지원을 받아 민간 단체에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냥 글만 써서 보냈다! 표지에 넣을 사진, 제목, 목차, 그리고 16편의 글. 그것들만 제출하고 몇 달을 기다려서 엊그제 책을 받았다. 브런치 매거진에도 <식욕과 사랑>이라고 연재했던, 크로아티아에서 한 달을 보내는 동안 쌓인 글을 엮었다.


책은 총 8부를 보내준다고 했다. 택배 상자는 무척이나 묵직했고… 아빠는 상자를 옮겨주면서 왜 이렇게 무겁냐고 물었다. 내 책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아직 아빠에게 글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고, 당장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택배를 기다리긴 했지만 오자마자 열어보지는 않았다. 일단 우아하게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한 편 보고, 잠에 들기 직전 택배를 뜯었다. 그리고 표지를 보자마자 탄식했다. 제목이 <사랑과 식욕>이라고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사랑과 식욕>은 ‘사랑과 전쟁’ 같기도 하고… 아무튼 원초적인 욕망이 가득 담긴 느낌이었다. (뜻은 같지만 어감이 그랬다.) 중간에 제목을 한번 바꾼 것이었는데 내가 잘못 보낸건지, 그 쪽에서 잘못 만들어준 건지 생각해보았다. 오래 전 문자를 확인해보니 ‘제목을 <사랑과 식욕>으로 변경할 수 있을까요?’라고 보낸 건 내 쪽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책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얇고 작은 책이지만 일단 겹쳐지고 나면 무거웠다.


아무튼 크로아티아에서의 세 달은 분명 식욕과 사랑과 식욕이 가득했다. 이제는 유럽에 대해 생각하면 무턱대고 그립고 설렌다. 전생처럼 아득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프라하 마켓이나, 뉴욕 타임스퀘어나… 어딘지 모르게 무척 상징적이고 빛나는 곳들이 떠오른다. 길고 높은 트리에 하얀 조명 장식들… 아무리 추워도 코트에 목도리를 두른 외국인들… 가본 적도 없는 곳에 대한 향수가 느껴질 수 있는 걸까. 턱 없는 동경일지도 모른다.


트리를 장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겨울의 존재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트리를 장식하고 있을 수많은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을 상상한다. 트리를 장식하는 순간부터 크리스마스는 시작된 것이고, 기다리는 마음이 가장 행복하고 설레는 법이니까. 그러는 동시에 1월의 트리를 생각한다. 12월 26일부터 이걸 치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나. 바깥으로 밀려난 크리스마스, 철 지난 트리, 불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크리스마스가 남의 이야기였던 계절에 <사랑과 식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가 있다. 4월의 나, 봄과 여름 사이의 나, 무엇을 써야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던 나. 수많은 나를 거쳐 지금의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가. 12월의 나, 겨울로 진입하는 나, 계속 쓸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내가 있다. 4월의 고민들은 이미 잊고 없어질 만큼 무수한 생각들을 겹쳐놓은 내가 있다. 일단 겹쳐지고 나면...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묵직해지는 정신에 스스로도 놀란다.


그래서 이제 중요한 것은 8부의 책을 누구에게 전해주어야 할 것인지다. 가족에게 하나, 오빠에게 하나, 여행 동지에게 하나, 불여우(친구들)에게 하나, 지원에게 하나. 벌써 5권이 동났다. 남은 3권은 우선 나의 몫이 될 것이고, 언젠가 포트폴리오로 쓰이거나 책장에서 늙어가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꼭 이 책을 포트폴리오로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당장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책을 건넬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다운 빨간 포장지를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일이면 12월이 시작되고 말 것이고, 그러면 나는 소중한 독자들에게 레터를 발행할 것이다. 따끈한 글을 식기 전에 배송할 수 있도록, 도로를 질주하는 배달 기사님의 마음으로. 나를 믿고, 혹은 나의 글을 믿고 돈을 보내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신중한 글을 쓰고 말 것이다. ‘식욕과 사랑’을 ‘사랑과 식욕’이라고 바꿔버리지 않도록… 레터를 발행하는 동안은 순전히 작가일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러다 보면 크리스마스가 정말 올 테고… 캐롤이 멈추고 트리를 정리할 쯤에는 어떤 고민을 품게 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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