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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Dec 07. 2023

Glorious purpose

손톱이 다시 자란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도 이제는 굽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졌다. 젤네일을 입혔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다시 카페 알바를 시작하면서 맨 손톱이 된 지도 3개월이 지났다.


채이거나 긁힐 때마다 갈라지고 찢어지던 얇은 손톱. 살에 아주 가깝게 손질해야만 부러지지 않을 손톱. 그럼에도 물에 닿으면 말랑해져 한계를 모르고 꺾이던 손톱이었다. 더 이상 손톱에 신경쓰지 않고 일을 하게 되었을 무렵, 매일 쓰던 손톱깎이를 눈 앞에서 치웠다. 어떤 결심 같은 건 아니었고, 그냥 더 이상 쓸 일이 없으니 자연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손톱이 더는 아무 곳에도 지장을 주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감사하기보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제가 되어서야 손톱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두꺼운 데다가 길어져서 손질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얇고 물렁해서 아팠을 때는 그 존재를 계속 인지해야 했다. 그게 언제의 일인지도 이제는 까마득하다.


전례 없이 따뜻한 12월을 보내고 있다. 11월쯤부터 아주 추워지다가, 갑자기 또 따뜻해지더니, 다시 추워지길래 이제는 겨울이 오나보다 했다. 그런데 또 따뜻해지는 게 아닌가. 12월 7일, 오후 12시에 후드티만 입고 나가 햇볕을 맞으며 기이함을 느꼈다. 그야말로 기이한 날씨 아닌가. 일단 화창하고 뜨뜻해서 좋긴 한데, 아무튼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바깥 온도가 10도를 웃돈다고 했다. 패딩에 목도리를 둘러도 덜덜 떨며 추워하던 게 바로 엊그제다. 추위가 물러가자마자 추위를 잊었다. 감각이란 건 역시 눈에 보이는, 피부에 닿는 무엇에 이토록 충실한 것이었던가. 겨울이 지연되고 있다. 길게 따뜻한 만큼 또 길게 추울 테지. 매년 여름은 최악의 더위라고 했고, 매년 겨울은 기록적인 추위라고 했다. 겨울의 시작이 늦어지는 만큼 봄의 시작도 늦어질 것 같다는 걱정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날씨가 추워지든 추워지지 않든, 나는 여전한 추위를 느낀다. 온도에 맞지 않는 옷을 자주 입기 때문이다. 오늘도 따뜻하다고 했으니 기모 후드티 하나만 입어도 괜찮겠다고 짐작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12월의 바람이란 게 있는데.


작년부터 패딩 주머니에 들어있다고 했던 키세스 초콜릿을 드디어 버렸다. 버릴 기회가 있었는데도 몇 번이고 버리지 않던 참이었다. 어쩐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주머니가 텅 비었을 때 딱딱하게 언 초콜릿의 테두리를 가만히 만지는 느낌이 좋았다. 만질 때마다 은박지 껍질이 아주 조금씩 부스러졌다. 조각난 부스럼은 꺼내어 털어버렸지만 초콜릿은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결국 버린 장소는 교회 1층 정수기 옆 쓰레기통. 수요예배인지 주일예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가 끝날 쯤 쓰레기통에 가서 그걸 툭 던졌다. 아무리 오래된 초콜릿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모를 테니, 음식을 버린다고 오해할까 봐 등을 돌리고 신속하게 던졌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다.


그렇게 버리기를 유보하던 것인데도, 버리는 즉시 그 존재를 잊었다. 손에 잡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걸 잊는 일이 그렇게 쉬웠다. 이미 보이는 것에, 들리는 것에, 느끼는 것만에도 벅참을 느끼며 살기 때문일까. 보이는 것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은 무너지기 쉽다. 부스럼이 나다 못해 언젠가는 버려질 것들.


어벤져스 스핀오프 시리즈인 <로키>를 보고 있다. 그 1편은 ‘영광스러운 목적’에 관한 것이었다. 장난의 신인 로키가 지어진 이유, 그곳에 있는 이유, 그 사람들을 만난 이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게 나의 글로리어스 펄포즈겠지, 라며 웃어버리는 로키를 보았다.


로키를 보니까 토르가 보고 싶어져서 <토르: 라그나로크>도 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망치가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네가 망치의 신이냐고 물었다. 질문만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그는 늘 망치를 들고 있었지만 실은 천둥의 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무엇도 손에 들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과업을 완성해낸다.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설교가 끝나고 이런 찬송을 불렀다.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지난주 찬양 집회에서는 이런 찬양을 들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아무튼 여러모로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건 분명했다. 그 갈 길이 먼 데다가 밤은 깊지만 불을 밝혀주신다는 것도.


내가 미뤄왔던 일들, 보이지 않아서 잡히지 않았던 것들, 멀리 보지 못했던 일들을 곱씹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선택한다. 보이는 것에 목을 매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한다. 그게 나의 글로리어스 펄포즈일 테니까. 나의 손톱, 나의 날씨, 나의 초콜릿, 나의 망치는 무엇인가. 손에 쥔 것이 없을수록 몸이 가벼워질 것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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