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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02. 2024

네 번째 재주넘기

당도할 곳


Where are we?

우린 어디쯤이야?


미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다. 흔히 커플인 관계에서 하는 말. 우리 관계는 지금 어디쯤인거야? 어디보다는 우리에 방점을 찍는 문장이다. 관계를 정의내려달라는 뜻인 것 같다. 이런 말을 듣는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겠다. 준비를 하고 와도 어려운 말인데, 십중팔구로 불시의 일격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쯤이냐니… 네가 모르면 내가 어떻게 알아. 왜 우리의 GPS를 나한테 고스란히 넘겨버리는 거야. 그러나 당혹스러움 가운데 움트는 사랑도 있다.


우리보다 어디, 에 방점을 찍으면 물리적 혹은 정서적 위치를 뜻한다. 발을 딛고 선 그 지점을 정확히 인지하는 일도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수시로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플래너를 펼쳐보는 일이 그것에 해당한다.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이번주 일정을 살펴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이런 일을 추가해야겠군, 혹은 이런 사람들도 만나야겠군- 하며 잽싸게 플래너를 닫는다. 플래너에 들어가 확인하고 나오는 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당도한 곳은 어디인가. 어제 출판사의 면접을 보고 오늘 카페 알바를 하던 중에 결과를 들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겠냐고 했다. 지난 일주일간 성탄절을 보내고 면접을 준비하며 레터를 발행했다. 오늘로 면접 결과를 얻었으니 이제 다음 스텝. 다음주 출근 전까지 필요한 스킬들을 서둘러 갖출 것. 서둘러가 포인트다. 미리 찜해둔 ’일잘러 필수 스킬‘ 자료들을 불러와 체득해야 한다. 그 전에 오빠를 만나고 주현과 글모할 것.


구획을 잡는 일이 좋다. 이 일은 어제까지, 오늘 할 일은 이만큼, 내일은 거기까지. 다만 이 방법의 단점은 당장 해야 할 일에 눈이 멀어, 멀리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몸을 움직이고 나면 어찌저찌 중간까지는 와 있는데… 생각보다 더 멀리 가기는 힘들다는 것. 이를 테면 유럽 가려고 주 5일 스타벅스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대학교 막학기인데다 내가 아직 청년부의 회장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들이 온몸으로 나를 타격할 때. 나를 잊었어? 우리를 잊었어? 이렇게 선명한 감각을 잊었어?


쓰리 펀치를 맞은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미래의 나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돌린 탓이다. 바로 이 시점의 나를 바라보는 미래의 나는 어떤 표정일까. 원망스러울까, 한심할까, 기특할까. 아무래도 동시다발적인 감정일 것이다. 원망스럽고 한심한데 기특한 얼굴을 나는 모른다. 그래도 대입해본다면 박명수가 정준하를 바라보는 표정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요즘 무한도전을 자주 봐서 그런 것 같다)


내가 당도하고 싶었던 바로 그 지점에 선 나를 상상한다. 손으로 잡아보려 할수록 점점 멀어질 그 모습. 당장은 출판사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다음주부터 출근하게 될 그 출판사 말고 다른 곳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토록 단편적인 상상만 가능하다는 게… 얼레벌레 일을 배워가며 언젠가 관성으로 편히 일하게 될 나를 상상한다. 당도할 곳은 언제나 상상 속에 있는 무엇이니까. 유니콘 혹은 봉황 혹은 용… 어딘가 비슷하게 웅장한 나의 미래가 거기에 있나요. 아마 당나귀나 고양이, 건새우쯤 되겠지.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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