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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06. 2024

이토록 뉴 비기닝!

일을 시작했다. 수원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파트타임 편집자로 일하게 됐다. 파트타임이기도, 프리랜서이기도 한. 조금은 애매한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경력이라곤 이 브런치스토리와 서포터즈가 전부인 나를, 무려 편집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버렸다.


3일차. 첫 날은 수원에 직접 당도했고, 그 후 이틀은 재택이었다. 재택 근무라는 게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치열한지 처음 알았다. 당장은 일이 많고 내가 요령이 없어서겠지만, 숨 쉴 틈도 없이 와다다다 일처리를 한다. 주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나는 편집자와 마케터를 겸하는 편케터가 되었다.


정말 아는 게 없다. 이토록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게 신기할 뿐이다. 경영학부지만 회계나 마케팅도 잘 모르고, 글을 썼지만 소설 창작법이나 문법 같은 건 배우지 않은. 여러모로 요상한 지점에 위치해있는 나를 본다. 그러니 일을 시작하면 뭐든 닥치는 대로 흡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료 강의를 듣든, 욕을 먹어가며 배우든. 다행히 욕할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제외한다면...



레터를 마무리한지 6일쯤 됐다. 23년까지는 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더는 지속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면 24년부터는 일단 취업을 하기로 했었다. 취업해야겠다, 고 마음을 먹자마자 속전속결로 취업이 성사되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일을 한다고 쓰는 정체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글을 쓰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 짐작은 현실이 되었다.


첫 면접을 봤을 때 면접관들은 내게 비즈니스적 언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지독한 에세이적 인간이라 아직 회사에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었다. 이해했다. 작품으로서의 글과 상업을 위한 글은 완전히 구별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면서 절절히 느낀다. 피드백으로 인해 깎이고 덧입히는 글들을 보면 어떤 새로운 자아가 확립되는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브런치적 자아와 출판사적 자아가 번갈아 머리를 내밀고 있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당장 내 마음을 쥐고 흔드는 건 출판사적 자아이다. 워낙 분주하게 일하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글만 쓰며 살 때의 내가 얼마나 느긋하고 한가로웠는지 벌써 잊었다. 불과 일주일 전의 나는, 세상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글만 썼다. 레터를 발행하는 동안 나는 쓰기적 자아와 한 몸이 되었었다.


12편의 긴 글을 독자에게 직배송하는 동안 브런치는 잠잠해졌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첫 초이레터는 독자들이 요청한 삶의 태도를 무려 며칠간 살아본 뒤에 그 경험담을 보내주는 시스템이다. 살고 쓰고 살고 쓰고를 반복하며 한 달을 보냈다. 보통 브런치에 2000자 정도를 쓰는데, 레터는 3000자를 훌쩍 넘길 때도 있었다. 관찰일기 같기도, 그저 에세이 같기도 한 무엇들을 써내려가며 스스로가 많이 확장됨을 느꼈다. 내가 타인의 삶을 훔쳐 살아보는 동안 독자들은 어떤 만족과 불만족을 느꼈을지도 궁금하다.



한 해를 여는 마음이 무겁다. 새롭게 감당하게 될 교회 사역과 회사 일, 써야 할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완전히- 새로운 일만 남았다. 그러나 역시 새로움을 감당하는 나를 지킬 무엇들은 기존의 사람들, 원래의 글들, 오래된 기억들일 것이다.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무한한 자극과 혼란 속에서 묵은 것들을 건져올릴 테니까...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동안 아무리 새로운 일과 사람들이 몰려와도 끄떡없을 거라고 믿고 싶다.


만약 그 헤묵은 사람이 스스로라는 생각이 든다면 꼬옥 나를 들여다봐주기를 바란다. 받은 사랑의 에너지로 또다른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지치지도 않고 농담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하로 기어들어가지 않도록. 빠르게만 살다가 감당 못할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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