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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15. 2024

포르투가 아닌 곳에서

어제의 계획: 교회 끝나고 4시에 서울 올라가서 포르투 친구들 만나고 11시에 내려오기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 숙소에서 만난 한인 친구들이 있다. 4명의 또래 여자들. 숙소에 방이 4개였는데, 전부 한국인 여자들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난 후부터 우리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방문을 느슨하게 걸어두었었다. 문이 열리든 말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면서.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그랬다.


함께 지내던 시간이 너무 생생하게 아름다워서 그 기억을 자주 곱씹었다. 기도할 때도 그 애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우리의 여행은 6월에 끝났지만 다음 해 1월이 된 지금까지도 그 애들을 생각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분명히 믿었다. 자주 연락하지는 않지만 연락이 닿을 때마다 서로가 지난 여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가 아닌 첫 만남을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편하게 모였다 흩어질 수 있는 동네. 서울에 살지도 않는 내가 이곳저곳을 물색하다 결국 성수로 결정했다. 사람도, 식당도, 할 것도 많은 곳에서 모이자. 우리가 먹기로 한 음식은 회전 초밥이었다. 포르투에서부터 정한 것이었는데, 유난히 적게 먹는 친구가 초밥에 있어서는 자기가 강자라며 떵떵거렸기 때문이다. 초밥은 40피스도 먹을 수 있다는 걔의 말을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정된 곳은 철판 오코노미야끼 집. 회전 초밥은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여행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을 나누기 충분한 곳에서 모이기로. 웨이팅을 하는 동안 여름이 아닌 서로의 계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곤 포르투, 여름, 여행이 전부니까. 이제는 정말 서로의 일상을 들여다 볼 차례가 온 것이다.


우리는 4명 중 3명이 선생님이다. 나 빼고 다 선생님인데 종목도 전부 다르다. 영어 학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체육, 그리고 나... 만나자마자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여행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말했다. 실제로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 모두 치열한 날들을 보냈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가르치며 배우며 일해온 사람들. 그리고 작년 내내 글을 쓰다 올해로 출판사에 취업한 나.


서로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됐다. 오코노미야끼를 먹는 동안 뻔하거나 뻔하지 않은 질문들이 오갔다. 이를 테면 이제 와서 최고의 여행지를 골라 보자. 사실 여행에 다녀온 후로 각자 숱하게 받아온 질문인데, 여행의 민낯을 공유하는 서로에게 이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했다. 공통적인 답은 하나를 고를 수 없다... 당장 떠날 곳을 고르라면 어떻게든 고르겠지만, 여행지 하나만을 최고라고 고를 수는 없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입을 모아 칭찬한 곳은 스페인이었다(독보적으로 파리를 좋아하는 한 명을 제외하면). 스페인을 칭찬하는 이유는 맛도 좋고 사람도 좋고 날씨도 좋고 물가도 좋고 경치도 좋은 곳이라서. 한국인의 정서와 가장 맞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교로 조금만 떠나면 색다른 느낌에 황홀한 휴양지도 있다. 가장 다채로운 유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스페인이라는 데 모두 동의했다. 우리 여행의 시작이었던 그 곳.


포르투에서는 함께였지만 우리는 서로의 여행에 대해서도 전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좋았다. 여행 얘기는 해도 해도 계속 나오니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을 여행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허세 없는)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군대 얘기만 해도 재밌는 사람들처럼, 여행 얘기만 해도 좋아 죽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여행은 여행일 뿐, 진짜 일상을 덮어둘 수는 없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지는 못하지만 여행의 기억을 가지고 오랫동안 행복해 할 서로를 알았다.


오코노미야끼를 먹고 카페로 넘어가기 전, 갑자기 한 친구가 줄 게 있다며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설마... 청첩장인가? 다들 놀란 와중에 그 애가 꺼낸 것은 작은 인형 3개. 하얗고 파랗고 노란 토끼 3마리였다. 우리를 주겠다고 집에서 그걸 만들었을 걔의 진심이 너무 앙증 맞았다. 방학 중인 초등학교 선생님의 일상에 무심코 초대된 느낌. 가장 조용하고 엉뚱한 친구에게 진심을 선물 받은 우리는 황홀해졌다. 


다음 만남은 마곡에 있는 한 친구의 집에서 하기로 했다. 자기 동네가 정말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애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집 주변 맛집, 카페, 그리고 자기 집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3월에 마곡에서 보자, 헤어질 쯤에는 계속 반복했다. 이번 만남은 한 친구가 새해 인사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 걔가 안부를 전하고, 내가 만나자고 한 것. 다음 만남은 구정 인사를 할 때쯤 정하기로 했다. 서로의 좋음을 잊지 않을 때 성사될 수 있는 만남이다.


성수에서 만났지만 실은 우리 모두 떠나고 싶었다. 꼭 함께가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되었다. 긴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각각 일본과 제주를 다녀왔다. 일본에 다녀온 친구는 다음으로 몽골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은 계획은 없지만 한 번 가보고 싶었다며. 그 말에 우리는 모두 격하게 감응했다. 몽골은 왠지... 유럽도 아니고 동남아도 아닌 독립적인 여행지 같아서. 한 번쯤 꼭 가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새롭게 여행을 떠날 것이다. 우리가 시작과 끝을 모두 함께하는 여행은 어떨까. 함께 계획하고 찾아보고 떠나서 부딪히는 여행은 어떨지. 사막에서 트럭에 실려가는 우리의 모습이 벌써 보인다. 부담 없이 내년 여름쯤... 꼭 떠나기로 했다. 몽골은 여름이 선선하고 좋다더라. 포르투가 아닌 성수에서 만나 몽골을 계획하는 사람들. 우리가 함께 떠날 수 있다면, 그래서 같이 돌아올 수 있다면. 서로를 잊고 살아가는 와중에도 우리는 더 충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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