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백호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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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https://blog.naver.com/beakhomoon
관람시간: 09:00~18:00 (동절기(11~2월): 09:00~17:00)
관람료: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다음날 휴관), 1월 1일, 설 추석 연휴
문의전화: 061) 335-5008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열여섯 번째, 백호 문학관이다.
전날 목포 문학관을 마지막으로 둘째 날 문학관 투어를 끝내고, 예약해 둔 무안 낙지공원 노을길 야영장으로 갔다. 4월 25일이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목포에서 무안으로 올라가는 길이 점점 추워졌다. 도착해서 보니 도저히 야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닷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고, 가뜩이나 작은 텐트가 버틸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야영은 포기하고 카라반으로 옮겼다. 노을길 야영장은 캠핑 데크와 카라반 모두 운영하는데, 무안군에서 운영하는 거라 가격도 괜찮았고, 시설도 깨끗하고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바람이 잦아들어 갯벌이 보이는 흔들의자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여유롭고 좋은 시간이었다.
전남 문학관 투어 마지막날은 백호문학과, 광주문학관, 가사문학관, 조태일시문학관을 끝으로 복귀 예정이다.
오전 첫 문학관인 '백호 문학관'은 백호 임제의 고향인 전남 나주에 위치해 있다. 한시 '무어별',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한문소설 '원생목유록'의 저자가 바로 백호 '임제'이다.
문학관 홈페이지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전국을 누비며 자유롭고 호방한 기풍과 재기 넘치는 글로 당대(조선중기)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백호 임제
이른 아침 주차장에 들어서는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셨는지, 내가 문학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학예사님이 나와 계셨고, 다정하게 인사를 하며 맞아 주셨다. 그리고 문학관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 주셨다. 임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셨고, 입구에 붙어 있던 시조와 문학관 마당 한쪽의 '무어별' 시비에 대한 설명도 해 주셨다. 친절하고 고마웠고, 기분도 좋아졌다.
문학관 입구에 임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는 문학관 입구 앞에 붙어 있다.
이 시조는 너무도 유명한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해지는 시조이다.
임제가 서도(평안도) 병마평사로 임명되어 부임지로 가던 길에 송도(개성)를 지나게 된다. 평소 호방하고 술을 좋아했던 임제는 황진이를 만나 대작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황진이를 만날 수는 없으니 그의 무덤에 가 그를 추모한다. 술을 따르며 황진이를 추모하며 지어 불렀다는 시조가 '청초 우거진 골에'다.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기생의 추모제를 지낸 일로 임제가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당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나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직까지는 당하지 않은 것 같다.
문학관의 '백호 연보'에 보면 1583년 35세에 평안도 도사(서도 평마평사)로 부임하였고, 1584년 36세에 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쳤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송도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면서 <청초 우거진 골에> 시조 한 수 지었다 하여 조정의 비판을 받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학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입구 벽에 새겨진 글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20세가 될 때까지도 스승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성품이 자신의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임제는 20세 이후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28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자유분방하고 기녀와 술을 좋아했던 임제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속받지 않고 혼란한 시대를 비판하여 풍류기남아라 불렸다.'고 한다.
그가 과거에 급제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나 보다. 아쉽다.
그에 대한 여러 평가들도 흥미를 끈다.
임제의 수성지란 작품은 문자가 창제된 이래 특별한 글이다. 천지사이에 이 작품이 없었다면 스스로 한 결함이 될 것이다. - 허균, [학산초담] 중에서
당시 임제는 풍류기남아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글만은 최고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성이현과 작별하며'라는 오언절구의 한시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말 뱉으면 세상은 미쳤다 하고
입 다물면 세상은 바보라 하네
이래서 머리 저으며 떠나가지만
어찌 지혜로운 이 알아주지 않으랴
- 임제, <성이현과 작별하며>
임제는 분명 호방하고 자유로운 기질을 가지고 있고, 관료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도 한 인물이다. 보수적이고 틀에 박힌 관념을 강요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머리 저으며 떠나'가면서도, 지혜로운 누군가는 나를 알아주지 않겠냐는 여운을 남긴다. 사대부로서 입신양명의 시대적 가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개인이 시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힘든 것이고, 양반이라는 신분까지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내적 갈등은 더했을 것이다.
각종 전시들도 옛 자료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청년기 작품과 중년기 작품으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다. 임제가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에 노년기 작품이 없다. 윤동주가 그랬듯, 그의 죽음 역시 안타깝다. 그가 노년기까지 살았다면 얼마나 더 깊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나왔을지...
그가 어릴 적 공부했던 '석림정사' 현판이다.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가 쓴 친필 현판이 남아 전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도 여럿 소개되어 있다.
학교 다닐 때 다들 배웠던 몽유록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 '원생몽유록'도 임제의 작품이다. 한문 단편소설로, 선비 원자허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는데 어떤 남자가 나타나 그를 따라가 만난 왕과 다섯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단종과 사육신을 상징하며, 이 작품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작품이다. 이는 당시 엄격하게 금기시되던 내용이다. 그래서 문집에 실리지는 못하였고 필사로 전해졌다고 하며, 이 한문 소설의 국역본도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독자층이 부녀자 층까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포토존이 재미있다.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가면 재미있는 추억 하나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관람객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문학관이다. 전시관 전체가 상당히 깨끗했고, 모든 전시들이 깔끔했다.
밖에 세워진 임제의 시비. 오언절구의 한시 '무어별'이다. 짧은 구절 안에 안타까움 감정이 절제된 한 장의 이미지로 제시된 작품이다.
十五越溪女(십오월계녀) 아리따운 열다섯 살 아가씨
羞人無語別(수인무어별) 남부끄러워 말 못 하고 헤어졌구나
歸來掩重門(귀래엄중문) 돌아와 중문 닫고서는
泣向梨花月.(읍향이화월)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 임제, <無語別(무어별)>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 중문을 닫고 서서 배꽃 사이로 비치는 배꽃만큼이나 하얀 달을 보며 남몰래 눈물짓는 열 다섯 소녀. 이 한 장의 사진이 무어별이 담고 있는 이미지다. 그 최소한의 언어로, 첫사랑의 안타까움과 누구에게도 말 못 한 가슴앓이가 가득 녹아 있는 작품이다. 곱씹어 읽을수록 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들이 여백 속에서 나타나는 작품이다. 고전 문학 중, 월산대군의 '추강에 밤이 드니'라는 시조와 함께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곧 끝나는 특별전시(2024.10.26. ~ 2025.6.29.)
'이름'을 주제로 어린이 글짓기 대회를 한 모양이다. 아이들의 동시가 전시되어 있었다.
엄마가 '누구야, 동생 챙겨라.' 계속 말씀하시니, '나도 좀 놀게 놔두지...' 라며, 동생 이름이 축구공이었으면 좋겠다는 예쁜 동시가 눈에 띄었다. 동생 이름이 축구공이면 아마 엄마가 매일 '누구야 축구공 챙겨라.' 하면 더 좋을 테니까 ㅎㅎㅎㅎ
하나하나 읽어 보면 너무 귀엽고 순수한 작품들이었다.
무어별을 좋아해, 기대를 했던 문학관이었다. 친절하게 나와서 맞이해 주시고,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며 관심을 가져 주시며 안내를 자처해 주신 학예사님 덕분에 더 알찬 관람이 가능했다.
한 줄 느낌
- 상설전시와 특별전시(어린이 글짓기대회)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문학관
한 줄 평
- 고전 작품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잘 기획한 깨끗하고 깔끔한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