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목포문학관
- https://munhak.mokpo.go.kr/munhak
관람시간: 09:00~18:00
관람료: 성인 2,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
문의전화: 061) 270-8400
모터사이클 전국 문학관 투어 열다섯 번째, 목포 문학관이다
목포문학관은 규모가 상당하다. 극작가 김우진관, 소설가 박화성관, 극작가 차범석관, 평론가 김현관으로 총 네 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각각의 전시실이 웬만한 문학관 하나의 규모와 비슷하다. 그래서 목포 문학관은 다른 문학관 4개의 규모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총 2층으로, 1층에 차범석관과 문화성관 2층에 김우진관과 김현관이 있다. 그리고 1층에 '스마트 문학체험관'이 있는데 상당히 괜찮았다. 각 작가별로 디지털 전시가 잘 되어 있고, 스마트 문학체험관까지 디지털 문학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문학관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관 홈페이지가 정말 잘 꾸며져 있다. 각 전시실 안내와 작가에 대한 정보까지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어, 사전 정보 탐색은 물론 관람 후 어렴풋한 기억들을 되살리기도 좋았다.
지금까지 35여 개의 문학관을 방문했는데, 그중 홈페이지가 가장 풍성할 뿐 아니라 내용 정리가 잘되어 있어, 내가 방문한 문학관 중 홈페이지 관리 수준은 최고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차범석관
차범석은 홈페이지 소개에 따르면 '유난히 순했던 천석꾼 집 아이'였다고 한다. 늘 우등생이었고, 학창 시절이었던 1930년대 목포에 있는 서점(두 곳이 있었다고 함.)에 '전화'로 새로운 책들을 주문해서 읽으며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고 한다.
해방 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극 경연대회(전국대학생)에서 '오이디푸스 왕'을 번역, 연출해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연극반을 맡아 지도하면서 극작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해 오다,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한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서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고, 이후 [귀향]이 같은 신문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극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주로 농어촌의 가난, 문명화에 따른 가치혼란, 냉혹한 현대문명의 세태, 애정윤리의 혼란 등의 주제들을 다루었다고 하며,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데 공헌한 대표적 극작가이자 연출가, 방송작가, 비평가이면서 연극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완성자
차범석관에 들어서면 이미지홀 쪽으로 중앙에 작가의 흉상이 보인다. 오른쪽부터 시작되는데 작가연보, 육필원고, 생애와 문학, 작품세계 순으로 전시가 이어진다. 다른 관들도 대체로 비슷한 구성이다. 여기에 더해 각 작가들의 특성에 맞는 각기 다른 주제의 전시가 준비되어 있다.
작품세계에 대한 설명이 요악적이고, 한눈에 알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문명비판과 인간성 상실', '향토성 짙은 휴머니즘', '시대의식과 역사적 인물' 등의 제목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있어 어떤 작가이며 어떤 작품을 해 왔는지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어 좋았다.
특히, 극작가이자 연출가로서의 그의 삶을 고려하여 <연극공연과정> 코너도 있었다.
연극 공연장 대관 계약서, 무대제작 콘티, 무대 동선 표시, 각종 영수증 등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의 현실적인 부분들이 순서대로 잘 정리되어 있어 흥미 있게 관람했다.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단순히 작가의 메모, 유품 등으로 분류할 수 있었을 자료들을 연극공연과정으로 엮어 따로 정리해 두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박화성관
'박화성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박화성'이라는 작가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인 것 같다. 문학관 홍보 소책자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여류라는 말은 이제 잘 쓰지 않으니 '여성 소설가' 정도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다.(실제로 전시관에서는 '여성 작가'라는 표현과 '여류 작가'라는 표현이 뒤섞여 있었다.) 어쨌든 1925년 등단했으니 당시 여성 작가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마저도 시나 시조 작가가 아닌 소설 작가라는 점에서 더욱 화제가 되었을 것 같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박화성은 일찍 개화한 가정에서 네 살 때부터 한글을 깨쳤고, 일곱 살 때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집안에 있던 책을 다 읽자 어머니가 소설을 빌려다 주었다고 한다. 1925년 '추석전야'로 <조선문단> 1월호에 추천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하였고, 1932년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인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많은 독자들의 찬사와 성원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작가연보', '생애와 문학', '작품세계' 등이 소개되어 있고, 역시 '작품세계'는 차범석관과 마찬가지로 잘 정리되어 있어 한눈에 그의 작품세계가 읽혔다.
그중 <문학사적 위상>과 <생활유품>이 인상적이었다.
'문학사적 위상' 전시 꼭지에서는 '여성작가'로서의 위상이 강조되어 있다. 특히 "빈궁과 탄압자에 대한 저항을 강렬한 터치로 드려낸, 여류로서는 희귀하게 사상성을 띈 작가"로 대체로 평가받고 있었고, 국제팬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회장 등을 거쳤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짙은 방언과 정취를 소재로 하여 지방의 특색을 잘 드러내는 작품들을 썼고, 지방문단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작가의 집에는 광주, 전주, 익산 등지에서 문학에 뜻을 둔 학생, 교사들이 찾아와 문학좌담을 가지는 등 여성 문학의 발전은 물론, 지방문단과 서울문단을 조화롭게 연결하여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그 시대, 이미 그는 여성 작가로서의 위치를 이미 뛰어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작사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생활 유품> 전시는 여성으로서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남성작가들의 경우 수집품이나 펜, 안경, 담배 파이프 등이 주를 이루는 반면, 박화성의 생활유품은 작가로서의 물품뿐 아니라 생활 물품인 다듬잇돌, 수저, 미싱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집필실도 다른 작가와 마찬가지로 복원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안방' 전시가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작가의 집필실은 보았지만, 그 어떤 문학관에서도 안방까지 전시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방이 재현된 것일 텐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너무 개인적인 공간까지 훔쳐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불편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사실 박화성이 작가로서도 훌륭했지만,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서의) '아녀자'로서의 역할도 충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검소함과 꼼꼼한 살림살이는 평생을 작성했다는 '금전출납부'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안방까지 가져와 재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단순히 '여성' 작가이라는 이유로 추가된 전시라는 느낌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박화성관에도 디지털 전시를 하고 있었다. 소설 '백화'의 내용을 디지털로 보여준다. 아름다운 영상이 소설의 글과 어우러져 잠시 넋 놓고 보게 된다.
스마트 문학 체험관
박화성관에서 나오면 '스마트 문학체험관(디지털 뮤지엄)'이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본 디지털 전시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디지털 '기술'과 문학의 '내용'이 잘 어우러져 의미 전달이 잘 되었고, 영상미도 뛰어나 볼거리가 풍부했다. 스마트 체험관은 자동으로 영상이 시작되기 때문에 바로 관람이 가능하다.
'블라썸 목포'가 먼저 시작된다.
그리고 '환상 문학도서관' 이 상영되는데, 마법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서재가 펼쳐지고, 터치를 하면 책을 꺼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김우진관
김우진은 장성 군수의 아들로 목포 유달산 동쪽에 위치한 99칸의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던, '강직한 선비 집안의 맏아들'이라고 한다. 집안의 토지 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농업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한다. 결국 농업학교 졸업 후 귀국하라는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고 와세다대 영문과로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들었고, 이때가 '식민지 시대의 한 지식인이며 작가로서의 문예적 체험과 능력, 선구적인 문학사상을 성숙' 시키는 시기였다고 한다. 그는 극작가로 최초의 신극 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5편의 희곡뿐 아니라, 48편의 시와 3편의 소설, 15편의 수필, 17편의 평론비평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 작가이다.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도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기에서는 저항의지가 강하게 드러났다고 하며,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려는 의지도 강했다고 한다. 1920년에는 <극예술협회>를 결성하며,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극예술활동을 주도하며 '최초의 학생극운동, 근대극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김우진의 문학활동으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고,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조국을 위한 활동에 제약이 가해지면서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1926년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와 일본으로 건너가 지내던 중, 함께 순회공연을 했던 성악가 '윤심덕'이 (<사의 찬미>로 유명한 소프라노 가수) 자살한다는 전보를 그에게 보냈고,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김우진은 1926년 8월 부산으로 가는 배 안에서 유서를 남기고 윤심덕과 함께 대한해협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바다로 뛰어든 그의 일생이 마음 아팠다. 목포 문학관의 4개 전시관 중에서 전시도 가장 빈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업적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그가 남긴 작품이나 유품이 다른 작가들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역시 다른 전시관과 마찬가지다. 작가연보와 육필연고 작품세계 등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희곡 [이영녀]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작품의 내용을 담은 실사모형(디오라마)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유품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의 부친인 '김성규'의 유품들이 주를 이룬다. 부친과의 관계를 조명하고 관련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한쪽 벽면으로는 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아비의 뜻을 계승하라" 고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헤어보면 어언 14년
옛집 처마 밑-
아버지의 뜻은 무엇?
훌륭한 사람은 무엇?
불초한 자식은 여전히 알 길 없고
유학의 몸이 된 때가 있어
꿈은 고향으로 달려가건만,
꿈의 원천인 어머니를 위해선
어떤 꽃을 가지게 할까,
늙으신 아버지는 어디에
인식의 지붕을 세워야 한다,
아아 무엇을 얻어야 하나.
- 김우진, [아아 무엇을 얻어야 하나]
그의 삶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당시의 가치관에서 본다면, 뼈대 있는 부유한 가정의 장남으로서 가문의 뜻과 아비의 뜻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영혼은 마냥 자유롭게 날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1925년에 쓴 이 시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주의도 카프도 아니다.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해 보이는데, 김우진은 '표현자체를 몹시 중시하고 표현을 곧 창조로 인식'했다고 하는데 그런 그의 문학적 성향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김현관
김현은 1942년 일제 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었고 20세가 되던 해인 1962년 등단하였다. 우리가 문학관을 지어 기억하는 문학가들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한다.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이론-시와 악의 문제>로 등단하였다. 등단한 해에 소설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 주도했다고 한다.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분석, 인문학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의 한 갈래로 끌어올린 최초의 평론가로 평가된다고 한다. 동시대 작가들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평론을 활발히 쓰며 고은, 이청준, 황동규, 정현종, 김승옥 등 당시 최고의 작가(현재 거장으로 칭송받는 작가)들과 문예지, 동인지를 만들며 다양한 교류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아쉬운 사실이지만, 이른 나이인 48세에 작고하였다고 한다.
다른 문학관과 달리 김현은 흉상은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사진이 걸려 있었고, 다른 전시관에 비해 보다 현대적이고 젊은 느낌이었다. 작가연보와 주요 저서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의 문장들이 벽을 둘러 적혀 있다. 깔끔하고 인상적인 문장은 깊고 잔향이 오래 남는다.
- 생각하는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은 아직도 계속된다.
- 항상 나는 주저하고 망설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동요하고 있는 듯하다. (...) 그러면서도 나는 기웃거리고 있다.
- 나라는 육체 속에는, 나보다, 타인들이 사실은 더 많이 서식하고 있다.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나는 그쳐본 적이 없다.
-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자기에게로 가까이 간다! 그 모순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 잘못 읽는다는 것은 다른 원칙에 의해서 그것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것을 구축케 하는 독법이다.
그리고 그가 작업했던 책상도 옮겨 놓았는데, 컴퓨터가 놓인 작업실이 인상적이다.
목포 문학관은 4개의 전시실이 있고, 작가들의 각각의 색깔에 맞게 전시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문학관보다 관람시간을 더 넉넉히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디지털 전시가 상당히 매력적이고 내용과 기술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단순한 보여주시기식 전시에 그치지 않는 것 같아 좋았다.
한 줄 느낌
-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4명의 작가를 연구하고 그들의 생애와 문학을 충실히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문학관.
한 줄 평
- 뛰어난 디지털 문학관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