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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요한 성실이 Jun 05. 2024

How Sweet 의 비트가 근본인 이유

집요하게 찾아본 How Sweet의 원조비트 이야기: 

마이애미 베이스의  대표적  뮤지션 "2 LIve Crew"의 음악'Mr. MIxx on the MIx ' 

How Sweet 이 발매되고 나서 

KBS 뮤직뱅크 무대 영상이 너무 멋있어서 여러 번 감상하고,

유튜브로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 비디오를 보느라 

음악 분석은 천천히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How Sweet  더블싱글이 발매되기 직전에는 버블검의 표절 논란이 있었죠.

CD를 구입해서 버블 검의 크레디트를 확인해 보니, 언급되는 뮤지션의 이름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크레디트 작사 작곡에는 (250, 오스카벨, Gigi, 소피 사이먼스)만 표기됨 )

즉, 어도어 측에서는 버블검에 대해서  표절, 샘플링, 인용,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추가 입장도 없고 보도도 없습니다. 

  

How sweet을 처음 들었을 때는  

비트가 지나치게 심플하고 구닥다리인데? 

댄서블 한 비트이긴 한데.. 

마이애미 베이스라고 하기엔 템포가 느긋한 느낌인데... 

  

샘플링은 아니고 그냥 오리지널 808로 직접 만든 것도 같고...... 

뭐지 250? 뭘 만든 거지? 

이 친숙한  근본 비트는 어디서 들었더라? 


그런데 어떤 귀인 한 분께서  (뉴진스, 808 키워드로) 구글링을 하다가 

제가 커뮤니티에 남긴  뉴진스 음악 리뷰 글을 보셨다면서  

" How Sweet 비트는 밤바타 비트 같다"는 댓글을  남기려고 커뮤니티 회원 가입까지 하셨다고 하더군요. 


일단 제 허접한 글로 커뮤니티  유입되신 게 놀랍고, 

댓글 주시려 가입해 주신 것도 놀랍고 고마웠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뉴진스의 How Sweet에 사용된 비트는 TR-808로 재현한 


Afrika Bambaataa & the Soulsonic Force의 82년작 "Planet Rock"의 비트였습니다.

아프리카 밤바타 :  일부 사파를 제외하고는 힙합의 세명의 아버지 힙합의 삼위일체로  불리는 세명 중 한 명. 

 그가 만든 "뉴스쿨" 힙합의 효시이자, 테크노 댄스음악의 원조, 마이애미 베이스의 뿌리가 된 

공통조상 아브라함 같은 음악이 바로 Planet Rock입니다.   

   

들어보시면 동일한 비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89&v=Q3K0TOvTOno&embeds_referring_euri=https%3A%2F%2Fdprime.kr%2F&source_ve_path=MjM4NTE&feature=emb_title

뉴진스의 How sweet 


https://www.youtube.com/watch?v=9J3lwZjHenA&list=RD9J3lwZjHenA&start_radio=1

Planet Rock (1982, 아마도 영상은 198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똑. 같. 은. 비트....  


혹시.. 좀 애매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비교 영상을 만들어 들리면 좋은데 재주가 없군요..    

 

그렇다면, 지금 뉴진스의 How Sweet의 장르라고 "너도 나도" 이야기하고 있는 "마이애미 베이스"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마이애미 지역에서 만들어진 로컬 장르입니다.  


마이애미 베이스의  대표적  뮤지션 "2 LIve Crew"의 음악'Mr. MIxx on the MIx '를 들어보시면,  Planet Rock의 808 비트의 흔적, "파리 삐쁠~ " 부분의 육성 부분이 확연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t09taGJgXk 

마이애미 베이스의  대표적  뮤지션 "2 LIve Crew"의 음악'Mr. MIxx on the MIx '


물론,  이 노래를 프로듀스하고 비트를 만든 것은 프로듀서 250이니 정확한 의도는 250 씨만이 알겠지만 

수년간의 뽕의 원류를 찾아 헤매던 집념을 생각하면,  Planet rock의 영향을 받은 파생장르인 마이애미 베이스를 답습했다기보다는 원류를 찾아서 원류 자체를 현대화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tYj75SBgpw

Bana TV 뽕을 찾아서 다큐 


"그 사람의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봐야 한다." 는 게 제 탐구 지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85JIsgeSDg

그가 만든 작품을 보더라도, 단순한 뽕짝의 사운드 흉내나 답습이 아닙니다.



"뭐 드럼 비트 같은 건" 그대로 베껴도 법에 안 걸리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  법에 드럼은 표절이 적용되지 않고,  피아노는 적용되고,... "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표절의 문제는 법적으로는  지적 재산권에 대한  침해 소송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드럼이던  다른 악기 연주이건 악기의 종류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일단, 프로듀서 250의 의도가 여기까지라고 해도 굉장히 훌륭하죠. 

하위 장르 따위의 영향이 아닌 원류로 접근해서 새로운 음악을 시도한다는 것.  

제 판단에는, 뉴진스의 How Sweet은 새롭고, 그 어떤 마이애미 베이스 음악과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 기저에는 보다 근본 있는 "힙합" 세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느껴진다면 

저만의 착각일까요?  



말씀드린 것보다 이 Plaenet Rcok 에는 생각보다 많은 스토리가 얽혀있습니다.


제법 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으로 거슬러간다면, 

무려 47년 전, 유럽에서 출발한 한 대륙간 열차를 타야 합니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힙합의 탄생부터 플래닛 락이 탄생하기까지

아프리카 밤바타라는 지금은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 

(DJ이자, 뮤지션, 조직의 리더, 레코드 수집가. 현재 범죄자...) 



힙합의 역사에 대해서 몇몇 이견도 존재합니다만. (Disco King Mario 기원설 등)

뉴욕 브롱크스에서 1970년대에 태동한 것만은 의견을 같이 합니다 

1973년에 DJ쿨허크(사진가운데)로부터 출발된 뉴욕 남부브롱크스의 힙합은,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사진 오른쪽 ), 아프리카 밤바타(사진 왼쪽)가 3 분할하는 이른바 "사우스브롱스 3분 지계"의 형세였습니다.  


Ed Piskor’s ‘Hip Hop Family Tree’


당시 힙합은(그때는 힙합이라는 용어도 개념도 없었지만), 

저 3명의 호걸의 휘하로 자연스럽게 몰려든  브롱크스의  소년, 소녀들이 각자의 구역에서 힙합파티를 개최하고  (당시에 Jam이라 불림) 집단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돈도 벌고 하루하루 살아가던 시스템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 JAM을 수시로 개최하면서 댄서(B-Boy), 래퍼(MC), 그라피티 등의 힙합문화가 싹트고 점점  지금과 가까운 모습으로  틀을 갖추고, 발전하면서 지금도 레전드로 남아있는 각 분야 인재들도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브롱크스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가 겟다운(Get down)입니다.  

지금은, 래퍼가 절대적인 힙합문화를 주도하고 있어서 힙합= 랩 이란 분위기이지만, 

당시 JAM에서는  레코드판을 구하고, 선곡하고, 두대의 턴테이블을 번갈아 가며 춤추기 좋은 브레이크 부분만 모아서  플레이하는 기술을 가진 DJ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즉 저 조직에는 DJ가 리더 / 보스./왕, 유비, 조조, 손권이었습니다. 래퍼는 단지 중간중간 여흥을 북돋아 주는 바람잡이, 변사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브롱스 동네 문화였던 JAM도 규모가 커지면서, 뉴욕지역에서 점점 알음알음 외부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브롱크스 밖으로 힙합이 전파되고, 당시 디스코가 지배하던 다운타운의  클럽에서도  JAM이 점점 인기를 끌자 브롱크스의 JAM팀들을 자신들에 업소에 출연시켰고,  뉴욕의 명물로 자리 잡은 것이 70년대 후반.   

결국, 이 JAM을 음반으로 만들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지만,  쉽사리 실현하지 못합니다.  

JAM을 음반으로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문 데가 있었습니다.   

첫 번 째  이유는 이 JAM이란  DJ가 선곡해서 플레이하는 레코드가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남이 만든  음반이 없으면 애초에  MC도 랩을 못하고, B-Boy 도 춤을 못 추기 때문에, 음반을 발표하거나 TV에 출연하는 데에는, 저작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브롱크스 길거리나 클럽에서는 반주의 저작권을 묻지 않지만, 음반으로 만든다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이야기   

두 번째 이유는, DJ와 래퍼들의 갈등입니다. 

음반을 만들게 되면 정작 크루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DJ의 역할이 애매합니다. 수많은 곡들의 저작권을 해결하고 신들린 디제잉 실력을 보여줄 음반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반주문제를  적당히 해결하고(라이브 밴드가 연주) 래퍼 위주의 음반을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제작자들이 클럽에서의 반응을 보니, 클럽에 온 사람들은 정작 그룹의 리더인  DJ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바람잡이인 래퍼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도 래퍼의 목소리가 커진 이유입니다.

 JAM의 음반화를  레코드사의 러브콜은 있었지만 유명 DJ와 크루 소속 래퍼 간에 의견차이로, JAM의 음반화는 차일피일 미루어집니다. 당시, 쿨허크는 사고로 사실상 현장을 떠난 상태.


Rapper's Delight(1979)

그런데 대중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천지를 뒤흔들 일이  발생합니다. 

JAM(힙합)과는 전혀 인연도 없던,  레코드 업계의 산전수전 다 겪은 제작자, 실비아 로빈슨이, 세계최초의 랩 음반을 출반 하고, 발표 그다음 날  그 음악이 미국을 강타하고, 그 열기가 전 세계(당시 선진국 영국, 유럽 등)로 퍼진 것  

명곡 Chic의 Goodtime 반주에 맞춰서 랩을 하는 것은 당시 뉴욕 클럽에서는  흔한 레퍼토리였고,  클럽에 우연히 놀러 갔던 실비아 로빈슨은 이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래퍼들은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던 브롱스 출신의 유명 MC(래퍼)가 아닌 일종에 그들을 모방하던 래퍼들이었고, 가사 또한 상당수가 이들의 것을 무단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반주도  Chic의 Good Time을  클럽의 밴드가 연주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뉴욕지역을 벗어나면, 아니 뉴욕에 사는 백인들에게 조차  랩이라는 것 자체는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시에 서부지역사람들도 힙합이라 랩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영미권(백인포함)은 이 새로운 "랩"이라는 것을 처음보고 신기해서  열광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처음 등장했을 때 TV에서 너도나도 어설픈 랩 흉내를 내던 시기를 생각하시면 될 듯. ) 그나마 슈거힐 갱은, 진짜 래퍼들을 보고 듣고 그대로 베낀  때문에, 그들과 비슷한 퀄리티였지만,  유행에 따라 우후죽순 등장한 랩흉내(웸의 Wham rap 같은)의 생명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천하 3분 지계 중 당시에 남은 것은 두 명,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는 어쩔 수 없이, 래퍼의 세상이 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녹음된 연주에 맞춰 랩을 하는 MC의 뒤에서 DJing을 하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음반 활동을 했습니다. 

 아프리카 밤바타는, 간간히 클럽활동도 했지만, 여전히  브롱스에서   Zulu nation이라는 크루를 유지하면서  Jam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밤바타는 랩의 인기로 인해 힙합의 본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뮤지션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Sex pistols의 매니저  말콤 매크로랜 등)  


힙합 국부들의 역습: 플래닛 락의 탄생 

결국 가짜 랩 때문에 고사되어 버린, (제도권) 힙합계에 또 다른 힙합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 오리지널 브롱크스 출신의 힙합의 아버지인  두 명입니다.  

(이즈음부터 힙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돌파구는,  자신들이 70년대부터 브롱스에서 일구어온 힙합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밤바타의 특징은  풍부한 레퍼토리, 다양한  음악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 레코드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랜드 마스터플래시의 장기는, 이름처럼 잽싼  손기술  두장의 레코드를 이용해 음악을 번갈아 트는 그들의 특화된 기술이었습니다 

 결국,  자신만의 비장의 소스(LP레코드)를  발굴하고  (Crate Digging)  재구성해서 멋진 반주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장기. 하지만 그동안 문제는 자신의 비장을 소스는 저작권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두 사람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에 새로 나오기 시작한 전자 악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음악이 바로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의 메시지.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4kjeWGQ175g



그리고 플래닛 락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E0XYVfF43g

밤바타가 표방한  힙합의 개념은  DJ, 랩, B-Boy, 그라피티가 어우러진 개념 

1982년 당시는 전자음악이 각광받기 시작한 시대였고   

많은 뮤지션들이 TR-808을 이용해서 드럼연주 패턴을 프로그래밍해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 밤바타가 이끄는 줄루네이션은  전자악기 프로그래밍을,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70년대 초부터 자신들이 브롱스에서 진짜 힙합을 탄생시키고 키워온 방법 그대로요.    

즉, 자신들이 DJ 활동을 하면서 사용한 터득한 필살기술,   나(DJ)만 아는 비밀 음반에서  들려주고 싶은 특정 부분만, 짧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기술, 일명 "메리고라운드" 기술을 적용한 것입니다.   

DJ들의 레코드 보안  지키기 경쟁   당시 DJ 간에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중요한 레코드는 영업비밀이었습니다. 경쟁 DJ가 내가 사용하는 음악을 알아내는 것을 막기 위해 부하들이 레코드통을 지키게 했습니다. 레코드 라벨을 못 알아보도록 라벨을 벗겨버리거나 가짜 라벨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크래프트 베르크 


https://www.youtube.com/watch?v=PHiN26vn2ec

Trans Europe Express 기차 소리 비트를 잘 들어보십시오. 



아프리카 밤바타가 가지고 있던 비장의 무기 중 하나는 바로 크라프트 베르크의 "트랜스 유로 익스프레스"였습니다. 
크라프트베르그가 1977년에 발매한 이 음반은 특별히 제작된 신시사이저로 제작된  음반으로,  전자음악 발전에 큰 기여가 있는 음반입니다.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1976년 작업실 모습. 전자악기의 효시이자 전자음악으로 만든 팝음악의 가능성을 보여준 음반입니다. 크라프트 베르크에 이어 YMO가 나왔죠.   

아프리카 밤바타는 DJ 잼을 할 때부터 ,  이 독일 전자음악에 느껴지는 뜻밖의 댄서블 한  요소를 발견하고,  브레이크 비트로 사용했는데,  당시 공연에 있던 관객 중에서 이 음악을 알아챘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음악을 잘 들어보시면, 이 흥겹고 원초적인 느낌의 댄스음악 "Planet rock " 에서 반복되는 테마와 드럼비트는  독일 전자 음악 음반에서 차용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밤바타는  브롱크스, 뉴욕 흑인 문화에서는 상상도 못 할,  유럽 테크노 음악의 원조  " 유로 트랜스 익스프레스"의 일부 요소를 발췌 의외의 결과물인 "Planet rock"을 재 창조해 낸 것입니다. 

저작권을 피해야 한다는 필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그 결과 힙합은 또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샘플링이 없던 시대의 샘플링, 프리-샘플링, 입니다. 

샘플러가 없던 시절에 샘플링의 개념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의 Message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여느 신시사이저 음악과도 비교해도, 지금 들어도 굉장히 창의적으로 느껴지는 신시사이저의 활용인데요. 오히려 이쪽이 더욱더 프리-샘플링의 진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아직 까지도 사람들이 긴가민가 하거든요.  이 노래가 이 음악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연상하기는 힘듭니다. 바로 뉴웨이브 밴드 Tom Tom club의 음악입니다.(1981)  
아무도 모르는 음악에서 예상하지 못한, 요소를 가져와 재구성한 것이 바로 힙합의 개념 샘플링의 개념입니다.  
이후 진정한 샘플링은, 힙합의 아버지들의 뒤를 브롱크스의 2세대 힙합, 다음세대 래퍼 KRS ONE과 이른바 디스전의 효시인 다리전쟁"Bridge war"의 한축을 이룬 퀸즈 브리지의 거두 "말리 말"에 의해 "창조"됩니다.  

https://www.parkinparkin.com/Panorama-Festival-NYC




크래프트 베르크가 언제 Planet rock을 인지하게 되었는지, Planet rock이 유명해진 이후에 밤바타와 그래프트 베르크의 저작권은 어떻게 되었는지. 분명한 것은,  크래프트 베르크 또한 이 Planet rock이 울려 퍼지는 세계와는 너무 멀리 있었고, 하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밤바타를 인지하게 된 것은, 대중들이 인지하고 난 훨씬 후라는 것입니다.    Kraftwerk: I Was A Robot: Wolfgang Flür: 9781785585807: Amazon.com: Bookswww.amazon.com멤버가 쓴  자서전 I was a robot 에는 밤바타에게 저작권료를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쓰여있다고는 하나, 저작권 문제의 향방에 대해 토론한  포럼에서는 "저 책은 잘못된 부분이 많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라는 이견도 있습니다.  


Planet Rock 힙합, 테크노 댄스음악의 공통조상 

아프리카 밤바타의 Planet rock은  그 자체도 상당히 인기 있고 유명한 곡이었지만, 이후의 힙합- 댄스 음악에  미친 족적은 어마어마합니다.  

아마도, 밤바타의 Planet Rock을 처음 들어보시고 이게 무슨 힙합인가? 

댄스음악이 아닌가 생각하셨을 텐데요. 

유럽의 테크노를 힙합과 접목시켜서, 드럼머신으로 재현한다는 아이디어의 파급효과는 대단했습니다. 


New School 힙합

이 808 드럼머신과 록사운드를 접목시킨 뉴스쿨 힙합이 데프잼, Run-D.M.C입니다. 초기 음악은 단순합니다. 

이들은 뉴욕에 적을 둔 힙합의 적자라 하겠죠.    


https://www.youtube.com/watch?v=tpKw-eYbNG8&list=PLglUu7rOaMDsmq095l2T69tZf8fPYryuy

Run DMC 1집의 수록곡 Hard Times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나요. 

이 Planet rock 은 뉴욕을 벗어나 미국 여러 지역에 퍼져가면서 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형됩니다. 


LA : 1984 테크노 댄스 

LA는 대 도시였기 때문에 뉴욕에서 일어난 힙합의 혁명을 인지했지만, 힙합 문화자체가 없던 곳이고,  80년대 초기 낙천적인 파티 문화가 지배적이던 화창한 미 서부에,  우중충한 메시지가 담긴 뉴욕의 힙합문화가 그대로 자리 잡을 리 없습니다.  

  사회적 메시지와 , 날 선 랩은 거세되고,  흥겹게 반복되는 드럼 머신 비트와 어설픈 랩만 남아서 댄스음악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유명한 Dr.Dre조차 NWA를 조직하고  갱스터랩을  탄생시키기 4년 전인 1984년 에는 클럽에서 Planet rock을 거의 베낀 듯한 댄스음악을 만들어 연주하고, 무대에서 "DJ 수술"쇼를 했습니다. 닥터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온 것. 

 

https://www.youtube.com/watch?v=RT9O-pUGsVM

Wrecking Crew의 무대


  

Miami : 1986 마이애미 베이스 

아마도 밤바타 Planet rock의 비트를 그대로  차용한  밴드 중 현재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스타일은 아마도 2  Live crew가 주도한 사운드입니다. 선정성 논란으로도 악명 높았던 마이애미의 특유의 힙합스타일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70xQpNpiQc    

대표곡 Me. so.. H


 

닥터 드레, 2 Live crew 둘의 공통점은 힙합의 발상지 뉴욕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뮤지션들입니다. 

밤바타의 Planet rock을  접하고, 힙합이 없던 지역에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 지역만의 색깔을 가진 힙합을 뿌리내린 사람들입니다.   

Planet Rock을 가지고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든 사람이지만, 저 당시  Planet Rock 속의 크래프트베르크 까지는  몰랐을 겁니다.  저도 인터넷이 없으면 몰랐겠죠. 



트랜스 유로 익스프레스가 브롱크스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뉴진스를 태우고.

 

어떻게 보면, 제가 설명한 것은 

아프리카 밤바타와  힙합 국부 3인방들이 

자신이 만들었던 힙합이 자신들과 상의도 없이 꽃을 피우다가 시들 뻔한 것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구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합법과 불법의 사이를 넘나드는 힙합의 출신과도 맥이 닿아있기도 하고요.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한 스토리

  

또한 크래프트베르크의 트랜스유로익스프레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47년 동안 전 세계 힙합과 테크노 음악에 영향력을 주게 되었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음악이 시대를 거치며 영향을 준,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의 올바른 예시. 


지금도 뉴진스 음악에는 트랜스 유로 익스프레스에서의 기차소리에서 차용한 비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가

250이, BANA가, 총괄 프로듀서가 보여주고 싶었던 메시지라면? 

꿈보다 해몽일까요? 


뉴진스가 저지 비트라는 장르를  도입(?) 유행(?) 시킨 것으로 알려지면서,   듣도 보도 못한 장르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거야 말로 꿈보다 해몽이라고 생각합니다. 

250 프로듀서는 정말로 저지비트를 차용했나? 


비록 저만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무엇이 샘플링인가, 무엇이 차용인가, 무엇이 모방을 통한 창조인가를

아프리카 밤바타의 Planet Rock의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료가 같으면 표절인가?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크리에이션이고 예술이라는 것을

50년을 이어온  힙합의 역사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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