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파칭코왕 최영오
1947년 재일교포들이 설립했다는 학교법인교토국제학원
과연 70년넘는 세월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처음엔 최근 20년동안의 역사를 찾아보다가, 점점 과거의 자료까지 찾아보게 되어
처음엔 90년대까지만 찾아갔었는데...
80년대, 60년대, 50년대까지 파내려가게 되었습니다 .
글도 점점 분량이 길어지게 되었구요.
일단, 90년대로 돌아가봅니다.
1990년도 동아일보 기사, 당시만해도, 재일교포 2,3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10명중 9명이 일본 학교에 다니는 현실, 조총련학교가 152개, 민단계 학교가 11개 에 불과한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토한국학교였습니다.
다른 민단계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토 한국학교는 재정난으로 폐교위기에 몰립니다.
1994년 10월 경향신문 독자투고란: 폐교 위기에 처한 교토한국학교의 사정을 알리는 내용.
교토 한국학교는 역사가 오래되었긴 했지만,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은,
교포사업가 최영오씨가 이사장이 되면서부터, 그가 부지를 매입해서 학교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70~80년대인 듯 합니다. 그전까지 학교는 3번의 이사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초라한 교사입니다만, 수십억엔의 사재로 지었다고 합니다.
비록 1조교로 인정받지 못한 각종학교였지만, 최영오씨에게는.. 일본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교포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킬 수 있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최영오 이사장의 원맨파워로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교토학원은 30여년간을 버텨온 것.
이 최영오 이사장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2000년대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즈음인, 1998년 조총련 교직원 동맹은 일본 정부에 , 조총련계 학교의 대입 수험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고발합니다. 아마도 이즈음에 교포학교에 재일동포 학생들의 이탈이 급격히 일어나던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치조교(1조교) 즉 일반학교로 학력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쟁점사항이었습니다. 조총련과 민단계 교포학교들은 83조교로 불리는 각종학교로 분류되었던 것입니다.
"1조교" (이치죠코우)란, 학교 교육법 (쇼와 22년 법률 제26호)의 "제1조"에 내거지고 있는 교육 시설 의 종류 및 그 교육 시설의 통칭
그 때까지는, 교포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83조의 각종학교로 분류되었던 것(・各種学校)
재일 동포 학교는 이 학교 교육법 1조로 인정받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왔습니다 .
한편, 교토 한국학원은, 1999년 민단계 학교로는 최초로 일본야구 고고연맹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한겨레 보도 1999년)
당시 조총련계 학교에서는 7개 학교가 "연식"야구협회에만 가입한 상태였다고합니다.
학생수 감소의 위기를 야구부 설립으로 타개해 나가려고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학교측은 부정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2003년은 교포학교들의 운명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였습니다.
(조선학교, 민족학교, 조총련계 등 용어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일본 정부는, 교포 학교의 대입자격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주로 조선학교) 많은 갈등을 빚습니다.
민단 학교는 소수에 불과하고 조선학교가 대다수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90년 기준 125개 : 11개)
심지어 남한 국적의 학생들도 상당수가 조선학교 (민족학교, 조총련계)를 다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학력인정되는 학교지정에서 조선학교를 누락시키려 하기도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교포 학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족학교가 누락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원활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3년 8월 3일,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 대입자격 배제"를 철회하고 대학응시자격을 부여하기로 합니다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02807?sid=114
하지만,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잘 해결된 것 같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일본정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재일교포 학교들에게 대입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는 것.
일본에서는 "1조교"의 개념을 "일본 국민이 되기 위한 제도권 교육" 으로 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교토 한국학교는 일조교 허가를 받게 되면서, 교명에서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
일본 야후 뉴스 댓글에서 . "일조교인" "교토국제교"의 교가에 "한국"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점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포학교가 일조교로 인정받기 위해서, 민족주의적 색체를 뺐을 텐데, "한국"이라는 단어가 남아있는게 이상하다는 말입니다.
1조교 허가를 받는 조건으로, 한국학교를 국제고등학교로 탈바꿈한 것이고, 중국과 관련된 커리큘럼을 넣은 것도 그때문이라고 합니다. 1조교이기 때문에, 받는 제약 때문에, 일본 정부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03년 당시 민단의 뉴스
어떻게 보면, 2003년 시점에서, 조선학교와 민단학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교토학원을 비롯한 다른 학우너들도, 학생 모집의 어려움과 자금사정으로 인해서, 일조교에 편입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것. 일조교 편입을 원치 않았던, 최영오 이사장도, 아마 이 시기를 전후해 돌아가신 듯 합니다.(정확한 시기 파악 불가)
2018년 연합 뉴스의 기사.
그나마 있던, 교포학교는 그사이 대부분 폐교되었습니다. 90년 당시에 비해서는 절반으로 폐교되었습니다.
그나마 11곳이 있던 민단학교는 4곳에 불과합니다.
조선학교던 민단학교던 가려서 지원할 상황이 아니다. 양측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특파원의 보도였는데,
조선학교가 힘들다, 이념 구분없이 도와줘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들어봤습니다만,
이번 교토국제학원의 상황을 보니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민단학교의 처지는 더욱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도에 주로 나오는 동경한국학교는 시설도 좋고 학생 수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여러 인사들이 찾으니까요. 교토국제고를 제외한 두개의 학교의 오사카 금강학교와 건국 한국학교는 어떨까요? 둘다 오사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규모가 큰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bbGjN93_h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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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폐교된 7개의 민단 학교, 60여개 조선학교의 상황은 아마 교토국제고보다 열악한 상황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교토국제교가 개교한 것이 1947년인 것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해방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낼때, 재일 조선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일본정부에서는, 1947년에 조선인 학교의 개교를 허가했다가 번복, 1948년에 1차 학교폐쇄령을 내리고, 이에 재일 조선인들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9년 일본정부와 GHQ는 학교강제폐쇄를 강행 300개의 조선학교를 폐교, 일본 교사 교장에 대한 동화교육을 실시합니다.
'학교 폐쇄령'-'한신 교육투쟁'
“이제 일본 학교 안 가도 돼요?”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물었다. “응, 이제 안가도 돼.”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앞의 책)
그 아이들의 함성만큼, 1945년 이후‘국어 강습소’는 우후죽순처럼 일본 땅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빼앗긴 말을 되찾고자, 어깨 좀 펴고 살고자. 또 고국에 돌아가 생활하려면 말과 글을 알아야 하니까.
1945년 10월 각 지역마다 난립한 단체들을 통합해 전국조직으로 결성된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은 민족교육사업에 주력하면서 이 강습소들을 학교의 형태로 만들어 나간다. “돈 있는 자는 돈을, 힘(노동력)이 있는 자는 힘을,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내자”는 말이 이 때 생긴다.
6만여 조선의 아들딸들은(당시 동포들의 전체 숫자는 60여만) 600여 개의 ‘판자집 학교’에서 눈치 볼 것 없이 조선말로 떠들며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지위는 혼란스러웠다. “가능한 한 해방국민으로서 처우한다”(45.11.3)는 미군정(GHQ)의 모호한 태도는 1년이 못 가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지닌 것”으로 보며, 따라서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을 통제할 권한을 지니는 것으로 바뀐다.(46. 11.20)
일본 정부는 잠시 “조선인이 그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신설할 경우, 부현(지방자치체, 시도)은 이를 허가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나(47.4.12) 이 역시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48년에 들어서 본격적인 통제로 바뀐다. 그해 1월 문부성이 재일조선인은 일본 법령에 따라 일본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발표하자, 각 지방자치체는 3월과 4월 사이에 잇따라 조선인학교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린다.<제1차 학교 폐쇄령>
당연히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 '한신 교육투쟁'이라고 부르는 항거가 시작됐다. 오사카 지역에서는 강제폐쇄과정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 16세의 청년 김태일 군이 사망한다. 4월24일이었고, 그래서 ‘4.24 교육투쟁’이라고도 한다. “오징어도 생선이냐, 조센징이 사람이냐”면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진압한 경관도 있었다.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5월5일 문부성과 각서를 교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교육법령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과외나 방과 후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한다는 선에 머물고 만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오사카 지역에 남아 있는 ‘민족학급’이다.)
다음해인 49년 GHQ와 일본정부는 조련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어 10월에는 다시 제2차 학교폐쇄령을 발동한다. 경찰대의 학교 습격 등 강제 폐쇄에 맞서 저항했으나, 이 시기 3백여 개의 조선학교가 폐쇄돼 자주적 민족교육은 빈사 상태에 빠진다.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를 접수해 일본학생과 격리 수용한 채 일본교장, 교사에 의한 동화교육을 실시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도쿄 에다가와 조선학교 역시 ‘도립 제2조선인초등학교’로 바뀐다.
'학교 폐쇄령'-'한신 교육투쟁'
“이제 일본 학교 안 가도 돼요?”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물었다. “응, 이제 안가도 돼.” 그러자 아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앞의 책)
그 아이들의 함성만큼, 1945년 이후‘국어 강습소’는 우후죽순처럼 일본 땅 여기저기서 솟아났다. 빼앗긴 말을 되찾고자, 어깨 좀 펴고 살고자. 또 고국에 돌아가 생활하려면 말과 글을 알아야 하니까.
1945년 10월 각 지역마다 난립한 단체들을 통합해 전국조직으로 결성된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은 민족교육사업에 주력하면서 이 강습소들을 학교의 형태로 만들어 나간다. “돈 있는 자는 돈을, 힘(노동력)이 있는 자는 힘을,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내자”는 말이 이 때 생긴다.
6만여 조선의 아들딸들은(당시 동포들의 전체 숫자는 60여만) 600여 개의 ‘판자집 학교’에서 눈치 볼 것 없이 조선말로 떠들며 꿈같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의 지위는 혼란스러웠다. “가능한 한 해방국민으로서 처우한다”(45.11.3)는 미군정(GHQ)의 모호한 태도는 1년이 못 가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지닌 것”으로 보며, 따라서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을 통제할 권한을 지니는 것으로 바뀐다.(46. 11.20)
일본 정부는 잠시 “조선인이 그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신설할 경우, 부현(지방자치체, 시도)은 이를 허가해도 무방하다”고 했으나(47.4.12) 이 역시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48년에 들어서 본격적인 통제로 바뀐다. 그해 1월 문부성이 재일조선인은 일본 법령에 따라 일본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발표하자, 각 지방자치체는 3월과 4월 사이에 잇따라 조선인학교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린다.<제1차 학교 폐쇄령>
당연히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 '한신 교육투쟁'이라고 부르는 항거가 시작됐다. 오사카 지역에서는 강제폐쇄과정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 16세의 청년 김태일 군이 사망한다. 4월24일이었고, 그래서 ‘4.24 교육투쟁’이라고도 한다. “오징어도 생선이냐, 조센징이 사람이냐”면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진압한 경관도 있었다. 저항은 더욱 거세졌고, 결국 5월5일 문부성과 각서를 교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교육법령에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과외나 방과 후 조선인에 의한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한다는 선에 머물고 만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오사카 지역에 남아 있는 ‘민족학급’이다.)
다음해인 49년 GHQ와 일본정부는 조련을 강제 해산시킨다. 이어 10월에는 다시 제2차 학교폐쇄령을 발동한다. 경찰대의 학교 습격 등 강제 폐쇄에 맞서 저항했으나, 이 시기 3백여 개의 조선학교가 폐쇄돼 자주적 민족교육은 빈사 상태에 빠진다.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를 접수해 일본학생과 격리 수용한 채 일본교장, 교사에 의한 동화교육을 실시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도쿄 에다가와 조선학교 역시 ‘도립 제2조선인초등학교’로 바뀐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0019763?sid=104
이때 일본정부와 GHQ에 맞서 투쟁에 앞장선것이 조총련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재일교포의 민족교육에는 북한이 연루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당시 소수의 한국계 학교 중 하나가 바로 교토한국학원이었습니다.
50년대 보도를 찾아보면, 학원 이사장이 한국에 방문하여, 고아들을 위한 성금을 기부하기도 하고, 이승만 정부도 학교의 장학금을 후원하는 등 교류가 활발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내 교포학교 중 극소수에 불과한 한국계 학교에 대한 지원과 관심은 특히 한일 수교를 앞두고 커졌습니다.
1961년 본국의 지원으로 지어진, 교토한국학원의 신교사의 낙성식은 조선일보 1면 기사로 실렸습니다.
냉전 시기는 재일교포를 놓고 경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한국계 학교는 1962년 기준 동경, 오사카(백두,금강), 교토 단 세군데에 불과했습니다.(학교는 네개)
이러던 것이, 한일 수교 2주년 기점인 1967년에는 불과 5년만에 10개로 늘었다고 합니다. ( 왜 늘어났는지 이유는 잘 알 것 같습니다.)당시에도 이 숫자는 부족하기 딱이 없고 환경이 열악하다고 논평합니다.
결국, 민단 학교는 네군에서 출발해서 결국 긴긴 세월을 거쳐서 다시 네군데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학교도, 1950년대에도 있었던, 동경, 오사카 백두, 교토 이 세 군데.
그렇게 해서, 교토국제학원은, 20여년간을 버텨왔습니다.
오사카와 도쿄 같은 교민이 많은 도시가 아닌 곳에서 이 긴세월동안 살아남은 교토학원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지원이 부족했던 70~90년대를 버텨왔던 기간에 이사장을 했던 최영오씨라는 사람이 예사롭지 않아보였습니다.
대체 어떤 사업을 하셨길래, 한국학교에 사재를 이렇게 많이 투자했고, 그 이후에는 그만한 투자자가 나오지 않았을까?, 좀 더 자세히 찾아보니 역시나...
보통이력을 가진 분이 아니더군요.
결국엔 그 공로로 한국에서 많은 훈장을 수상하셨습니다. 아마 지금 고시엔 우승 소식을 알게 되신다면 가장 기뻐하실 분이 아닐지.
교토국제중고등학교. 야구팀은 1조교 로 지정된 이후 지난 20년동안 어떻게 변천해왔을까.
200년대 중반에 당시 일본말을 전혀 모르는 한국 학생이 어떻게, 교토 국제학원의 야구부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는 경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재일교포가 팀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야구부의 상황을 증언하는 기사.
10여년전에는 야구부식당에 김치를 상시 비치할 정도로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한국 국적의 선수는 단 한명뿐이라고 합니다.
100% 일본인 선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한국 국적 선수가 한명 있다고합니다.
교토국제교의 스카우터로 11년간 근무한 이와부치씨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읽어보니, 그 동안 야구부로 버텨온 쿄토국제고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https://number.bunshun.jp/articles/-/862756?page=2
일본에는 고시엔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본선 진출팀에 대해서 굉장히 상세하게 취재한 기사들이 많았습니다.
(각 팀의 브라스 밴드가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떤 곡들을 주로 연주하는지 등등)
이와부치씨는, 야구부의 존재에 대해서, 학교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학교 같다는 언급을 합니다.
학교에서는 야구부의 활동에 대해서는 존중해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교가에 대해서는 바꾸는 것이 희망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학교 안에 야구에 특화된 또 하나의 학교가 있다. 그런 이미지인 것 같아. 이와부치의 비원(悲願)은 교가 변경이다.
(스카우트) 현장을 다니다보면 보면 바꿔 달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러면 더 선수도 와주겠지라고. 사실 2021년 선발로 고시엔에 처음 출전했을 때 바꾸기 일보 직전까지 갔거든요. 이제 새로운 노래도 만들고 기정사실을 만들어 버리면 괜찮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안되더군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学校の中に、野球に特化したもう一つの学校がある。そんなイメージのようだ。岩淵の悲願は校歌の変更だ。
「勧誘の現場を歩いていると『変えてやれや』とよく言われます。そうすれば『もっと選手も来てくれるやろ』と。じつは2021年の選抜で甲子園に初出場したとき、変える一歩前のところまで行ったんです。もう、新しい歌もつくって、既成事実をつくってしまえば大丈夫だろう、と。でも、ダメでしたね。いろいろあるっス」
교가가 학교의 아이덴티티 임에는 분명하지만, 야구부 입장에서는 학교안에 학교같은 입장 , 대회출전이나 외부활동에서 위협을 당할 수도 있고, 스카우팅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가능하면 교가가 바뀌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인 것입니다.
결국, 논란이 된 교가 가사의 NHK 일본어 가사 번역은 "학교에서 번역해서 제공한 것으로, 원래 뜻이 아니라, 절충된 또는 왜곡된 완곡한 표현인 것은 , 야구부쪽의 요청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
한국어 가사로 된 교가로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어린 일본인 학생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어서, 줄여주기 위한 장치일 것입니다.
결국 학교 구성원끼리도 이견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당시 교장이었던 박경수 전교장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현재 퇴직후 한국에 거주)
고시엔 구장엔 이날도 승리 팀 교가(校歌)를 트는 관례에 따라 교토국제고 교가가 흘러나왔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이라 시작하는 한국어 노래다. 일본 고교 야구를 상징하는 고시엔에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졌단 소식은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박 전 교장은 “사실 내 임기 중에 교가를 (일본어로) 바꿀 생각이었다”고 했다. 한국어 교가에 거부감을 가진 일부 우익 일본인들의 항의로 학생 안전이 우려됐던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들이 나서서 뜯어말렸다. “(일본인 학생들은) 한국어가 좋아서, 한국 문화가 좋아서 온 아이들인데 (교가를) 바꾸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한국어 교가에 대한 학생들의 자부심은 엄청납니다.” 교토국제고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선 가장 먼저 교가를 가르친다. 학생들은 이를 외우고 평소 교정에서도 부르길 즐긴다고 한다. 박 전 교장은 “야구부원들은 훈련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갈 때마다 (교가를) 흥얼거린다”고 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학생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8/23/SVK3GVBU4FC7PKUWSLBSIRSJHM/
어제 결승전을 하루 앞두고, 야후 재팬에서, 고시엔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일본 기사도 많았지만, 한국언론의 일본어판 기사도 많았는데, 대부분 교토국제의 교가나 교가가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에서도 경기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도 교가에 대한 문제로 확산이 된 것 같습니다.
2021년 본선 진출시에도 화제가 되었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습니다 .
결국, 지난달 "푸른 산호초" 처럼 한국에서의 화제는 일본에서 다시 건너가, 핑퐁 처럼,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경우입니다.
베스트 포스트라고 된 내용을 보면,
교가의 내용과 학교의 1조인가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인 중에서도 ,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동안, 해외동포들에 대한 인식은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재일동포, 3세, 4세에 대한 관심, 교포 학교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이 떨어졌다는 생각을, 교토 국제학원에 대해서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80~90년대 동아, 조선, 한겨레,경향 4개, 종이신문에서 검색한 기사가. 이후 수백개의 인터넷 언론이 넘쳐나는 시대의 기사보다 더 많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동안 재일 교포 학교나 교육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교토국제가 고시엔 우승을 하니 국뽕에 취한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니, 몇십년간 연락이 되지 않던 친부와 얼굴도 모르는 배다른 형제에게 연락이 온다면 이런느낌일까? 우리가 국제고교에게 우승 상금을 나눠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잠깐 우리끼리 국뽕에 취할뿐이니,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70년간의 교토한국학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계속 끊임없이 힘든 생존의 과정을 거쳐왔고, 계속 변화할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계속 재일조선인들을 괴롭혔고, 그들은 계속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무관심했습니다.
1조교로 편입된 이후 20년간의 변화는 그전 50년간의 변화보다 더욱 급격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학생들의 비율은 줄어들고, 학교를 생존하게 해준 야구부는 일본인이 사실상 100%, 감독과 스카우터들도 모두 일본인입니다. 기존에도 전교생이 126명에 야구부가 60명인 기형적구조. 수업도 따로 듣는다고 하니,
학교안에 학교가 따로 있는 셈이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고시엔 우승까지 했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도 있겠죠.
꼬리가 몸통을 흔들수도 있겠죠.
이번 고시엔 기간동안 교토국제교를 우리팀처럼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한국인 한명 없는 교토국제교 야구단을 마치 고시엔에 한국 대표팀이 출전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을까요?
만약 손승민이 토트넘을 떠난다면 몇명이나 토트넘의 팬으로 남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고시엔에 울려퍼진 우리말 교가.
그 가사의 내용 또한 너무나도 찡하고 뭉클합니다.
단순히 국뽕으로 소비하고 잊어버리기에는, 교토국제학원이 태어나서 걸어온 길이 너무 외로웠고, 우리가 너무나 무관심했다는 점이 미안해집니다. 우리가 덩달아 기쁨을 함께 해도 좋은걸까? 싶기도 합니다.
만약, 일본에서 가사논란이 너무나도 심해져서,
결국, 교토 국제고가 고심끝에, 다음 갑자원 출장때에는 가사 내용도 바꾸고 일본어 가사로 바꾸게 된다면?
그때도 변함없이 우리나라사람들이 교토국제고의 일본 선수들을 응원하고 사랑해줄까?
스카우터의 인터뷰에 따르면 교가를 바꾸는 복안도 있어 보입니다.
버티다가는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저들이 일본어로 교가를 바꾸더라 하더라도 이해해야 한다." 라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이야기 한다면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교토국제고의 우리말 교가를 지켜야 하는 "당위성"은 100개 1000개 만들 수 있겠죠.
우리나라에서 설문조사를 한다면? 90% 이상 지켜야 한다고 하겠죠.
교가 번역이 왜곡됐다고, 방송국에 항의하고 바로 잡는 행위의 당위성은 있습니다만, 학생들과 학교에 대한 배려는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의 생존과 학생들의 미래도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토국제학교의 교가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재일 교포들의 교육과, 얼마남지 않은 한국학교와 조선학교의 민족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해야 할일 들이 더 많이 있을 것 같고, 그러자면 국민들의 관심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를 비롯한 해외동포 디아스포라에 새한 관심은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한국이 "본국"이 된 느낌이 더 강해진 느낌? 본국민제일주의? 중심주의랄까요?
한때, NFL 스타 하인즈 워드 선수가 우리나라 예능에 나와서 유명해진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슷한 NFL이나 NBA 선수가 나와도 관심이 없죠, 손흥민, 황희찬 같은 세계적인 한국인 선수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한국계 리디아 고가 여자 골프 금메달을 따거나, 필 위저드가 브레이킹 금메달을 따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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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의 이야기입니다만,
솔직히 저는 교토 국제학원의 학교 모습을 봤을 때 차이나 타운에 있는 화교학교가 생각났습니다.
화교학교도 졸업생이 많이 있습니다만,
과거 재일 교포학교와 마찬가지로 학력인정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재일 교포들의 교육과 권리를 인정 받기 위해서는, 화교학교에 대한 정책도 해결되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는 중국 정부와의 문제가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민족교육 차별, 일본 못지 않은 한국 정부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 남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화교학교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등 일본 정부와 똑같은 차별 정책을 펴고 있다.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2만여 명. 화교학교는 초등학교가 26개교, 중·고등학교가 4개교다. 그런데 이들 화교학교 출신들이 국내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선학교 출신 학생들도 일본 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검정고시를 봐야 했다. 그러나 '조선학교 학력 불인정은 차별'이라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문부과학성은 지난 2003년 '대학 자율'로 책임을 대학에 떠넘겨버렸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조선학교를 차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계 '인터내셔널 학교'와 동경의 한국학교(민단계)는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해 교육비 지원 등을 하고 있지만, 조선학교는 북한이 '미수교국'이라는 이유로 정식 교육기관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9월 "한국 내에 있는 화교학교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해 한국학교로 전·입학을 하려면 검정고시를 거쳐야 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교육부장관에게 화교학교의 학력 인정을 권고했다.
당시 국가인권위는 "대만에 있는 한국인 학교는 이미 학력을 인정받고 있고, 국제인권조약은 소수민족이 자신들의 고유의 언어 및 문화 등을 향유할 권리를 천명하고 있으며 화교들이 화교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고 자기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고 싶어 하는 소수민족의 바람"이라며 "이러한 인권을 존중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화교학교가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출신국가를 이유로 한 부당한 차별행위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화교학교와 더불어 새롭게 부각되는 문제는 이주노동자 자녀들의 교육 문제. 이주노동자 규모는 2010년에는 100만 명이고 그의 가족들까지 합한 이주인 전체는 200만 명 규모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민족' 사회에 대한 우리나라의 대책은 거의 세워져 있지 않다. 아시아 민족을 차별하는 일본을 비난하는 우리지만, 그들보다 별반 나을 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학교는 2018년 보다 추가로 폐교한 학교가 있어서, 2022년 현재 60개가 남아있다고 하네요.
몽당연필의 회장은 영화배우 권해효씨군요.
http://www.mongdang.org/kr/bbs/content.php?co_id=fact01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