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고싶어

모른척의 공허함

by 벨에포크

공허하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눈빛으로 나는 서있다. 공허만큼 무거운 것도 없다. 비어있는 듯 하지만 그것은 가득 찬 것보다 더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공허한 눈빛으로 나는 장갑을 갈아 끼고 검체를 채취할 대상자를 바라본다. 타성에 젖은 목소리로 곧 당신이 느끼게 될 짜릿한 고통에 대해 건조하지만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당사자는 나와 일대일의 상황이 불편한 듯 보인다. 어딘가에 분명 초점은 있지만 공허한 눈동자와 진자운동을 하듯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만났을 때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전자이다. 우위를 점했다하여 싸울 생각은 없다. 오히려‘싸우지 않기 위해’우위를 점하고자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제 나는 대상자와 순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긴장되어 하얗게 질린 얼굴은 몇 번의 재채기,‘흐읍’하는 신음소리,‘아악’하는 고성을 거치면 혈기를 띠는 붉은빛의 얼굴로 돌아온다. 나는 이렇게 빠른 혈액순환을 보면서 또 한 번 인체의 신비를 느낀다. 검사가 끝나면 본래의 따뜻하고 인정 많은 공무원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이제 그들은 고통이 끝났음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맞다. 당신이 지금껏 축적해온 경험적 데이터에 의하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다. 대상자는 아직 상기된 얼굴로 검체실을 나가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이란,‘당기시오’가 없으면 밀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문을 당기려 한다. 이러면 곤란하다. 사람은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 처음은‘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밀당’이지‘당밀’이 아니란 말이다. 문이 열리면 환한 빛이 대상자에게 정말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이 지면에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내가 중력을 계산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소독을 하고 새로운 방호복으로 갈아입었다. 긴장한 채로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대상자의 눈빛이, 굽어진 나의 등으로부터 느껴진다. 감각이란 매일 조금 더 예민하게 업그레이드되는 듯하다. 전보다 조금 더 공허해진 눈빛으로 대상자를 검체실로 안내한다. 다시 일대일의 대화가 시작된다. 눈동자가 마주치고, 얼굴에 혈색이 돌고, 문을 밀고,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면, 또 한 번 검체 한 건이 끝난 것이다.


설연휴부터 나는 코로나 검체를 채취하고 있다. 하나의 이벤트로 코로나가 끝날 줄 알았던 것은 나의 헛된 망상이었다. 여름이 시작되었고 코로나는 여전히 나의 곁에 있다. 겨울, 아니 봄까지만 해도 나는 나름 행복했었다. 원치 않는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불운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해프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행복은 이 지점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나는 주 6일제가 격주로 계속되어도, 2020년이라는 대칭이 알맞은 이 완벽한 숫자, 소수가 끼어들 자리없이 2의 배수가 틀림없는 이 숫자가 시작된 년도를 소중하게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코로나는 나에게 무시무시하게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액땜’과 같은 것이었고, 기승전결의 파도 속 한 부분이었다. 정확히 나는 2월 16일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했다.“불쾌한 감정, 신체적인 불균형, 계속되는 야근의 상황들이 있어도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지는 않는다.”이것은 일기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려는 나의 강박적인 패턴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습관에서 나온 성급한 결론이었다. 성급했기에 이것은 오류였고 머지않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무던히 타게 되었다.


처음엔 사소한 짜증이 자꾸 생겼다. 일이 끝나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카톡 답장이 늦는 친구에게 짜증이 났고, 보행자 거리에서 활보하는 배달 오토바이를 보면 전보다 더 날카롭고 매서운 여인천하 도지원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후엔 육체가 지쳤다. 마른기침이 콜록콜록 소리를 내자 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피로감이 심해지면서 나는 두려워졌다. 코로나에 걸린 것 같았다. 때마침 내가 검체를 채취한 사람이 확진되면서 나는 나와 접촉한 사람들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주말휴식으로 컨디션이 회복되었고 다시 코로나와의 싸움이 이어졌다. 몇 달간의 상황이 지속되자 이제는 두렵다기보다 화가 났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젊은 나의 찬란한 시기를,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청춘을, 방호복 안에 가둬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러나 분노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였다.


여느날처럼 선별진료소에서 근무하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N95마스크가 얼굴을 짓눌렀다. 호흡이 힘들어지자 나는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다는 느낌에 과호흡 증상을 보였다. 과호흡이 나타나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자, 심호흡을 하는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나는 살기 위한 본능으로 과호흡을 해댔다. 무서웠다. 숨을 제대로 못 쉬다보니 질식에 대한 공포가 눈두덩이를 뜨겁게 했다. 이 와중에 대상자들이 선별 진료소에 몰려왔고, 검체를 채취하는 방법을 설명하다 보니 숨이 더 가빠왔다. 말속에 여러 번의 쉼표를 두어 겨우 호흡을 하면서 검사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나는 잠시 마스크를 벗고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그제서야 세포가 살아난듯했다. 코로나로 죽는 게 아니라 마스크 때문에 숨을 못 쉬어서 죽겠다 싶었다. 산소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는 이 당연한 생물학적 명제를 잠시 잊고 살았던 것일까? 몸 안의 공기와 몸 밖의 공기가 순환하는 것에 집중했다. 나는 그저 기압차에 의해 공기가 흐르는 통로 속 하나의 생물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고 힘없는 존재가 된 듯했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깊은 바닷속을 헤엄칠 수는 없었다. 평소라면 밤을 새서라도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겠지만, 이번엔 그래선 안 될것 같았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었다. 행복에 대해 묻지 않았고, 역시 불행에 대해 파고들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한지 따져보는 것은 우울해지는 지름길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부정적인 감정이 그 형태를 바꿔가며 내 문 앞에 나타날 때마다 애써 그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 코로나라는 변수가 찾아왔고 그것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연하게 변화한 것이 있는 반면 틈없이 빳빳하게 경직되어 버린 것도 있다. 코로나가 가져온 변화는 두렵고, 불확실성은 불안함을 키웠다. 그러나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코로나가 변화를 가져왔다면, 이 변화 또한 다시 변하게 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영원한 사랑만큼이나 적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이별을 고하는 이영애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반문하는 유지태를 보며 마음이 아팠던 것은,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모른척하기 때문이다.


괴로운 시간이 정방향으로 흐를 때면, 그 흐름에서 빛을 찾아가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역으로 시점을 바꾸는 것이 낫다. 어느 순간 문을 열면 환한 빛이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려줄 것이다. 그 순간을 미래의 한 지점에 세우고 관점을 바꾸어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빛이 온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에 빠진 것처럼 모른척하고 정방향의 시간을 탄다. "코로나가 언젠가 끝나겠지?”라고 희망을 의문문으로 찍지 않고, "코로나는 언젠가 끝난다.”라고 희망을 온점으로 찍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생각없이 그 시간 속을 걷는 것 뿐이다. 일기의 강박적인 패턴처럼 이미 결론은 해피엔딩으로 온점을 찍었다. 나는 모른척하고 아무 생각없이 내 일상을 공허하게 버틸 뿐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코로나가 이별을 고하기 전까지 반복된 일상을 모른척하고 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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