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La belle époque

by 벨에포크

정유년, 스물다섯이 되었다. 아마 조선시대에는 아이가 셋쯤은 있었을 나이일 수도 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나이쯤에 결혼을 했고 엄마는 스물셋에 가정을 꾸렸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는 어리다고 보면 또 어려 보이고 성인이라는 수식어를 다섯 해쯤 들었다 치면 어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성숙하지도 않은 나이. 딱 중간에 머문 나이. 난 이 스물다섯의 해를 보내고 있다.


스무 살에는 법적으로 ‘성인’이라는 딱지를 주어서 그에 맞는 옷을 입고자 어른 흉내를 냈었는데 이제는 누구라도 나를 보면 이쯤의 나이로 본다. 스물둘이나 스물셋 만해도 2-3년은 어리게 봐줬었는데 이제는 나도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생겼다. 큰일이다. 아이크림을 스무 살부터 발라야 한다는데 난 이제야 본격적으로 아이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나에게 노화가 진행되었다. 내 육체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내 세포들아. 너네는 벌써 다 커버린 거니? 이제 성장은 멈춘 거니? 내 키는 정녕 이제 최대치인 거니..?"


내 몸은 좀 작다. 왜 주변에 항상 체구가 작은 아이들이 있지 않는가. 난 그런 아이였다. 키도 고만고만하다가 멈춰버렸다. 나랑 같은 키의 아이라도 난 좀 더 작아 보인다. 억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난 또래 아이들보다는 경험하거나 생각하는 게 더 빠르다고 느낀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예전에 고민했던 것을 이제 친구들은 고민하고 있고 난 그다음 단계의 고민을 하고 있다. 뭐랄까.. 한마디로 말하면 정신적으로는 내 나이보다 더 성숙한 것 같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단지 내 느낌일 뿐이다. 내가 좀 더 성숙하다 느끼게 된 것은 책 때문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는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책을 간간히 읽다가 직장인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있다. 한참 책에 빠졌을 때는 일주일에 두 권씩은 읽었는데 요즘엔 한 달에 4권 정도 읽는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어떤 한 사람과 만나서 그 사람의 진지한 생각을 듣게 되게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데 책은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내가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 보니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여러 사람의 인생을 읽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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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끔은 이 달라짐이 시선에서 머물고만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동력이 없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선 이미 어디론가 떠났고 누군가를 만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데 정작 난 온수매트에 누워서 책 앞에 있는 것이다. 뭔가 알 것 같고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난 항상 제자리인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열 번 말로 설명해봐야 소용없다. 한번 직접 타보는 게 더 빠르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페달을 구른다 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난 여전히 자전거를 못 타는 어린아이 일 뿐이다. 난 그저 자전거의 역사, 자전거의 구조, 자전거의 디자인, 자전거 타고 가면 좋은 곳, 자전거의 원리를 빠삭하게 알지만 한 번도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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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스물다섯 내 나이에 어떤 동력을 써야 할까?


나는 취직을 때 맞춰해서 지금은 2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요즘엔 정말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보통 내 나이에는 취준생이나 복학생이 대부분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만 가면 모든 게 다 순탄대로 어찌어찌 흘러갈 줄 알았지만 대학생이 되니 또 그만의 고충과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이 있었다. 취준생일 때는 취업만 되면 또 어찌어찌 살아가겠지 했건만 취업을 했더니 이 직장이 아주 산 넘어 산을 넘어 껄떡 고개만 몇 개를 넘게 된다. 그래서 뭐랄까. 이 세 단계를 거치고 나니 뭐든 쉬운 건 없고 어떤 한 고비를 넘겼다 해서 내 인생이 편안해지거나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3 때 아빠가 그랬다. 지금 1년 공부하면 너 30년은 편할 거라고. 뻥이었다. 1년 열심히 공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차 후회하고 대학교 때 열심히 또 했지만 또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턱 증후군’이라고 아는가. 한참 박웅현 작가의 글을 읽을 때 그가 어떤 책을 보고 인용한 것인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어떤 문턱만 넘으면 일이 순탄대로 진행될 것처럼 여긴다고 한다. 이 문턱 증후군, 수능을 보면, 대학을 가면, 취업을 하면, 결혼을 하면 뭐든 어떤 문턱을 넘기면 다 잘 될 거라고 무조건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단계, 세상이 정해놓은 인생의 단계를 넘어가다 보면 또 내 눈 앞에는 또 어떤 단계가 놓아질 뿐이다. 그리고 우린 그 단계 넘기에 익숙해질 뿐이다. 그리고선 막상 단계가 없으면 혼란에 빠진다. 이미 너무 많이 시간이 지나버렸을 때 우린 비로소 혼란을 맞이한다. 난 그래서 지금 내 나이, 스물다섯의 나이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세 가지의 단계를 넘었다. 세상에서 정해준 단계에 따르면 난 내 집 마련, 결혼, 자녀, 노후와 같은 거대한 단계들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 또 내 뜻대로는 잘 안될 것이다. 이게 최선이었어 라고 합리화는 하겠지만. 결혼하고 한 번도 후회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고, 자녀도 내 맘대로 되지는 않을 테고 노후 또한 너무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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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초능력을 가져도 안된다. 요즘 트렌드가 시간여행이라서 영화이던 드라마이던 모두 다 주인공들이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과거와 대화하거나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왔다가 그런다. '시그널', '내일 그대와'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시간여행을 하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된다. 위기가 생기고 주인공이 위험에 처하고 그런다. 심지어 이들 또한 이러한데 초능력도 없는 내 인생이 어찌 내 마음대로 되겠나. 그래서 난 지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초연 해지는 중이다. 초연해지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시간과 눈물을 희생해야 했다. 왜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까? 왜 이 사람은 나를 이렇게 무시할까? 왜 내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수가 생기고 오해가 생길까?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이것밖엔 안되었을까? 몇 번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몇 번은 울분에 가득 차서 물었다. 또 몇 번은 친구에게 하소연하기도 했고 몇 번은 말로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 깊숙이에 삭히기도 했다. 내 뜻대로 세상이 안 되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세상이 내게 맞추는 것이 아닌 내가 세상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찬란한 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든 순간을 찬란하게 만든다”


내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은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보고 적어놓았다. 한참 동안 나는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뭔가 더 대단한, 또는 더 행복한 삶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직장을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말도 못 하겠고 이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길래 나를 이렇게 무지하게 만드는지 화도 났다. 내가 잘 못하면 교수들은 나를 비웃었고 난 이런 내 위치가 너무 싫었다. 여기 계속 있다가는 항상 내가 이런 위치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뭐 크게 대단한 삶을 살고자 한 건 아닌데. 내 꿈은 그저 행복하게 살고자 했던 건데 그게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었다니. 세상은 거칠었고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난 이 직장을 그만두는 날 행복해지겠지? 조금만 견디면 행복해질 거야. 이렇게 항상 생각했다. 아니 위로했다. 오로지 주말만 보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삶은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슬프고 어두웠다. 그러다 책에 빠지게 되었고 거기서 저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항상 찬란한 순간, 내게 다가올 행복한 순간을 위해 이 하루를 희생한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만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내 인생인데 이 순간순간 모든 나의 순간을 찬란하게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내 인생이 찬란하겠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내 삶도 가벼워졌다. 어둡고 무겁고 매번 주눅 들어있었는데 그냥 좀 더 적극적으로 하고 배우려 하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또 일이 쉽게 쉽게 잘 풀려가고는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인생이 엄청 즐거워지고 행복하고 찬란해진 건 아니다. 여전히 어렵다.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내 잘못이 아닌데 억울하게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있고 몸이 천근만근 힘들어서 걷지도 못하겠는데 계속 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상황은 똑같다.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 직장의 시스템은 체계가 덜 잡혀있고 변화하려 하지 않고 의견을 내라 하지만 의견은 묵살당한다. 그러나 여기를 나가면, 그다음 해에는, 조금만 참고 견디면, 이런 생각은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미래에 행복이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다.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많은 것이 흐트러진다. 시간은 정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도착지를 행복이라 정해놓으면 그 시간이 흘러 도착지가 행복이 아니었을 때 난 또 엉망이 된다.


유세윤이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최악은 없다"라고. 이게 우리는 긍정적인 말로 들리지만 유세윤은 이렇게 해석했다. 지금이 최악일 것 같지만 내일은 더 최악이고 그다음은 더 최악일 것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끝이 더 이상 바닥이 있을까 싶겠지만 더한 지하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는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내일이 더 최악이니까 오늘 빨리 놀아아겠다. 아 뭐 하는 거지? 빨리 자전거 타러 가야지!"



그래 이거다! 인생을 멀리 계획해놓고 행복을 저기 있다고 생각하고 또 버티고 버티다 보면 여전히 난 행복을 만지지도 못할 것이다. 행복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이 스물다섯의 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보내기로 했다. 내가 가져야 할 동력은 찬란한 순간을 보내는 것.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다. 내가 스물다섯 해에 좀 더 생동감 있게 내 삶을 보내는 것이 나의 스물다섯이다. 내 삶에서 가장 어린 나이. 가장 주름이 없을 때 가장 이쁠 때 가장 날씬할 때 그 순간순간을 찬란하게!


오늘이 내겐 La belle épo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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