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무의식까지 가버린 자기이해의 늪.
인스타를 둘러보다가 발레를 하는 어떤 여자의 사진을 보고선 한마디로 뻑이가서 발레에 대해 알아보다가 결국 발레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그렇게 보게 된 영화가 <블랙스완>이다. 영화 <블랙스완>은 발레 때문에 보게 되었지만 결국 내게 인생영화 중 하나로 남아버렸다. 이 영화는 발레뿐 아니라 자기 자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이다. 처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충격은 감히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봄에 새순이 싹트듯 꿈틀거리는 상상력을 주었지만 어떤 상상력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다 보니 여러 방면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영화의 주인공 니나는 명문 발레단에서 백조의 호수를 연기한다. 그러나 백조의 연기는 잘 하는 반면 흑조의 연기는 매번 부족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는 도중 릴리라는 동료가 흑조를 완벽히 연기하는 것을 보고 불안함을 느끼면서 점점 진짜 흑조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 부분이 자기이해에 대해서 탐구할 쟁점을 준다.
니나가 흑조를 연기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엄마라는 환경적 제약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시시때때로 엄마에게 전화가 오고 항상 정해진 시간에 니나는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니나는 엄마가 원하는 발레리나를 꿈꾸면서 살아왔다. 완벽한 백조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니나 엄마였을 테고 그렇기에 니나는 완벽한 백조가 되어야 했다. 니나 자신도 아마 자신이 백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나는 백조뿐 아니라 흑조도 연기해야 했다. 단장은 흑조를 끄집어내기 위해 니나를 자극한다. 그 감독이 순수한 마음으로 흑조를 끄집어 내려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그 감독의 제스처와 모호한 말들은 니나가 자극받기에 충분했다.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했던 열망이 그 자극을 수용했을 수도 있고 자기안에 내재되어있는 욕망의 결과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되었던 그 자극은 니나 자신이 이해했던 자기를 완전히 뒤엎게 된다. 자기 안에 있는 흑조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 망상을 넘나들면서 점점 블랙스완이 되어가는 니나를 보면서 내가 인지하는 자아와 진정한 자아는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청순 고결한 존재라고 자신을 여기지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변화하고 변모하게 되는 자기 안의 질투와 불안, 욕망을 마주했을 때 니나는 점점 망상을 보인다. 우리도 니나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니나처럼 망상을 보이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는가. 자신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며 그렇게 정의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정의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는가.
지금 내 삶이 불만족 스럽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더 잘 알아야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나를 이해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믿었다. 많은 책을 읽고 고민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매슬로우 욕구 5단계 이론에 따라서 난 그 최상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썼다. 나는 누구인가. 난 어떤 것을 하고 싶은 걸까. 난 무슨 꿈을 꾸는 걸까. 그리고 난 왜 그 꿈을 꾸고 싶은 걸까. 나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틈 나는 대로 나는 나에 대한 탐구를 계속해갔다. 본질적인 나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내가 싫어하는 것을 뭘까. 그렇다면 내가 나의 호불호를 결정하는 기준은 어디서 왔을까. 어떤 환경이 내게 이런 영향을 끼친 걸까. 그 환경을 배제하고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내가 이런 질문들을 나에게 하면서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내려 가면서 난 결국 이 질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리 예견된 일일 수도 있다.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도 자신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했다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처럼 난 위대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나를 이해하는 그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표면적인 것이 아닌 심층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 근본적인 나를 찾아가는 것은 내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어쩌면 나를 이해하는 그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풀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찾아가자 하면서도 그 찾아가는 순간의 생각과 환경에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난 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추상적으로 나는 어떠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뿐이지 확신을 가지고 나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에 빠져 살아가다 보니 어떠한 것에도 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판단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아주 사소한 것들도 판단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토마토 파스타보다 크림 파스타를 더 좋아해”라고 말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난 과거의 전적을 찾아보아야 했다. 내가 파스타집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어떤 파스타를 먹을까 선택할 때 크림 파스타의 비율이 얼마였고 토마토파스타의 비율이 얼마를 차지했을까를 따져보았다. “그래 대략 짐작으로 크림 파스타의 비율이 많았어 난 그렇기 때문에 크림 파스타를 더 좋아해”라고 말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또 의문이 생겼다.
크림 파스타를 먹다가 친구가 먹는 토마토파스타를 한입 먹었는데 “오 맛있네’라고 느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크림 파스타만을 먹다가 토마토 파스타를 한입 먹어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까지 생각하다 보니 내가 미쳐가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1년 뒤에는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짧으면 5분 뒤에도 바뀔 수 있었다. 결국 난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되었다. 내가 어떤 파스타를 좋아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인정하기로 했다. 난 나를 모른다. 이런 작은 것도 판단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게 나였다. 그래서 내가 난 어떤 사람이야 라고 명제를 내리려고 하면 할수록 난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릴 수도 없어지는 것이다. 난 의식적으로 내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결론을 냈다. 그것은 무의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은 의식적 자각에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정신적 활동으로 이해된다. 한마디로 직관이라는 것이다. 농구를 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지 않고도 우리는 공을 잡을 수 있다. 아직 컴퓨터가 날아오는 농구공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으로 농구공을 잡을 수 있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에 더 많이 영향을 미친다. 의식할 수 없게 받아들여진 우리의 경험과 환경적인 영향은 우리의 선택에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예일대의 존 바그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따뜻한 음료는 마시면 상대를 더 좋아하게 되고 찬 음료를 마시면 더 조심스러워지게 되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사람들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토론을 하게 되면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이지만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할 때는 타협적이고 온건했다고 말한다. 존 바그 박사는 사람의 행동이 의식적이라 여겨졌지만 결국엔 더욱더 무의식적인 행동임을 밝혀낸 것이 더 많다고 말한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신경과학자 스티븐 매크닉은 인간의 뇌 회로에는 수많은 전기화학 신호가 돌아다니는데 뇌는 창문이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오직 감각 회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한다고 말한다. 이 전기화학 신호들이 세상에서 보는 것은 현실을 흉내 내는 다른 기관으로부터 나오는 다른 전기화학 신호들이다. 분명 우리의 주의에 세상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세상에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과 몇 프로 되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하려고 할수록 의식적인 것은 더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무의식과 의식이 타협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나의 무의식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를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과학적인 이론과 실험들은 다 이해하고 나서 나라는 존재에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으면 난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일까. 과학자의 이론을 이해한 것일까. 또 내가 이해했다고 한 주체는 나인 것일까 내 무의식인 것일까. 이쯤 되면 신은 있는 것일까 까지 의문이 가게 되고 난 결국 밤잠을 설쳐가며 이 고민을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풀게 되었다면 아마 난 노벨상을 받을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을 구분해서 자신을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실험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경로로 이뤄지고 내 행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은 꽤나 흥미롭다. 나처럼 나를 이해하기 위해 끝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버린 경험이 있다면 그 혼돈의 블랙홀이 아주 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즉 굉장히 괴롭지만 또 흥미롭다. 매슬로우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갔냐고 묻고 싶다. 그리고 그 자아실현은 이루어졌냐고 묻고 싶다. 자아실현은 한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실현은 둘째치고 자신의 자아를 안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자기이해가 불완전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자신을 알아가야 하는 걸까. 정신분석학적으로 들어가자면 굉장히 복잡한 이론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이론들을 읽어가다 지레 포기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한 때 자아존중감이라는 키워드가 굉장히 유행했다. 자아존중감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 각 방송사를 가리지 않고 방송을 탔고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에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자아정체성, 자아효능감, 자존감 등 자아를 이해하는 것에 바탕을 둔 많은 단어들이 여러 SNS, 방송, 책에서 다방면으로 다루고 있다. 결국 이 많은 것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이해하든 나라는 주체이다. 우린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여러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또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인 속성일 것이다. 많은 20대 또는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어서도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런 잡다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지만 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있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은 아니에요” 자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려진 행동과 선택들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자신, 무의식, 의식 이런 것들을 다 통틀어서 한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일 것이다. 무의식과 의식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이고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어떠한 여러 속성들도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어떤 영향들을 받아서 내게 기생충으로 나타날지 또는 하나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지 모르지만 내가 그것들의 뿌리이고 그 뿌리도 나이다. 좋은 책과 긍정적인 생각들, 건설적인 인간관계들이 모여 꽃봉오리가 맺어지고 내게 만개한 꽃 한 송이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질투와 오만함, 끝없는 욕망들이 내 안의 좋은 것들을 갉아먹는 벌레가 되어 기생충을 키워낼 수도 있다. 꽃이 만개한 들판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소풍을 떠나 따스한 햇살을 맞는 것이 내겐 기쁨일 것이다. 여러 가지 유혹에 이끌려 기생충이 만들어진다 해도 다시 한번 나를 생각해보면서 기생충 약을 먹는 것이 내게는 배움일 것이다. 기생충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지 않는 것이 내게는 인내일 것이다.
하나의 문장으로 나를 정의 내리거나 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난 시시각각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기에 변화무쌍한 자아이다. 그러나 그 변화무쌍한 성질이 자석의 N과 S극을 전자 운동하듯이 왔다 갔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달려가면서 여러 사람과 환경들에 의해 변화할 것이다. 내게 여유와 행복함을 주는 그 행동과 사물과 생각들이 존재하는 그곳에 닿기 위해 걸을 것이다. 내가 걸어 도달하고자 하는 그곳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걷는 그 과정이 여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이 거기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움직이는 것이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내 자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무의식이 날 행복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좋은 영향과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