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 날의 바다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해가 다시 저물어 어두워진 밤 하늘을 봤다.

나는 이 세계가 그려진 종이를 펼쳤다.

‘이 쯤에.. 벚꽃나무가 있어..’

산 위에 손을 올리며 생각했다.

“뭐해?”

선우가 방에 들어오며 물었다.

선우는 잠시 내 손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곤 말을 이어갔다.

“같이 가자”

선우의 말에 웃음이 났다.

선우는 늘 내가 혼자인 순간에 손을 내밀어 줬었다.

전학와서 친구가 없을 때도, 사고 후 혼자 방 안에 있을 때도.. 늘 먼저 손을 내밀어준 건 선우였다.

“.. 넌 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

나는 선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같이 가자는 달콤한 말, 조용히 내민 손은 늘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

내 말을 듣던 선우는 살짝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치며 내 옆에 앉았다.

“너는 그냥 옆에 있어. 근데 너무 심각하게 붙잡고 있으면 좀 무거워, 알았지?”

선우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 한쪽에는 은근한 슬픔이 스며 있었다.

“그거면 돼.”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을 잡고. 내가 닿을 곳에만 있어.”

선우의 말에 살짝 장난끼 섞인 목소리가 더해져, 묘하게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그 때도. 지금도 계속 함께하자고 해줘서”

나는 선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는 찬영의 병실에서 울던 선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 앞에선 한 번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었다.

“힘들었지.. 제대로 잡고 있지 않으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거든.. 너”

선우가 장난끼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꽉 쥐고 있느라 힘들었어. 그러니까.. 이젠 내가 잡지 않아도, 너가 그냥 내 옆에 붙어 있어줘”

선우가 무릎에 얼굴을 숨기며 말했다.

끝 말은 조금 흐려졌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응.. 그럴게”

나는 고개 숙인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내 손길에 선우는 어리광을 부리듯 머리를 더 가져다 댔다.



다음 날 우리는 다 함께 산 반대편을 향했다.

벚꽃나무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어야 한다며 민혁이 제안한 방안이었다.

산 반대편은 우리가 이 세계에 처음 와서 걸었던 길이었다.

분명.. 이대로 쭉 가면..

“바다다..”

재민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 바다는 재민을 발견한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졸업여행으로 갔던 바다와 같다.

“근데 넌 왜 여기있었던거야?”

선우가 재민을 보며 물었다.

“글쎄.. 눈을 떴는데 이 모래사장 위에 누워있었어”

재민이 바다를 보며 말했다.

“그 때는 이 바다가.. 되게 슬퍼보였는데”

그의 시선 끝에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보였다.

우리는 잠시 바다를 바라봤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월의 바다는 투명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여름보다 더 깊은 파란색이었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빛은 눈부셨고, 모래사장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발만 넣어보자.”

민혁이 괜히 파도 쪽으로 달려갔다.

“미쳤냐고!”

선우가 소리치면서도 결국 따라갔다.

재민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들어갔다가 감기 걸린다”

민혁과 선우의 이끌림에 결국, 우리 모두 파도 앞에 서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발끝에 닿기 직전 멈추는 걸 보며 괜히 긴장했다.

“하나, 둘, 셋!”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아아아악!”

찬영이 제일 먼저 비명을 질렀다.

차가웠다. 정말 차가웠다.

발이 얼어붙는 느낌에 다들 파도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가, 또 웃으면서 다시 다가갔다.

재민은 끝까지 안 들어오는 척하더니, 우리가 방심한 순간 뒤에서 밀었다.

“야아악!”

덕분에 선우는 결국 물을 더 깊이 밟아버렸다.

찬영은 그 틈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가만히 있어봐!”

그가 바닷물에서 나와 모래사장에 쪼그려 앉았다.

찰칵.

찰칵.

바다를 배경으로, 발을 담근 우리를,

파도에 놀라 뛰는 모습을 계속 찍었다.

선우와 민혁은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다가 넘어질 뻔 하기도 했다.

둘의 장난에 재민까지 합세했고 나는 차가운 바닷물을 피해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젖은 발에 모래가 달라붙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사진찍는 찬영의 뒤로 가 바닥에 앉았다.

언제 바다에서 나온건지 따라나온 재현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괜히 들어갔지?”

재현은 빨개진 내 손과 발을 보며 물었다.

“근데 좋았어.”

나는 고개를 들고 바다를 봤다.

파도 위로 겨울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는 거 알아?”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행복해서.”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나는 재현이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만족한다는 듯한 웃음으로 답했다.

“나도”

짧은 대답 후 그는 내 젖은 발목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워!”

나는 놀라 내 발목을 잡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손은 바닷물보다 훨씬 따뜻했다.

순간 숨이 조금 멈춘 것 같았다.

“손도 차갑네. 닦을 거 가지고 올게”

그는 맞닿은 내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가지러 갔다.

재현이 가져온 수건을 차례대로 받으며 우리는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발끝에는 아직 차가운 바닷물의 감각이 남아 있었지만, 붙어 앉은 아이들의 체온이 느껴졌다.

파도가 한 번 더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웃음도 이어졌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 바다, 이 공기, 이 웃음소리.

아.

나 지금 진짜 행복하구나.

언젠가 다 흩어지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분명히 내 안에 남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또 웃었다.

바다보다 더 반짝이게.


작가의 이전글21화, 꽃잎이 흩날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