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파도 소리가 천천히 귀 안을 채웠다.
“행복했어.”
나는 바다를 보며 말했다.
목이 조금 잠겼지만 멈추지 않았다.
“되게, 되게 행복했어. 내가 그런 행복을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파도가 한 번 크게 부딪히고 물러났다.
그 바다가, 그 웃음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찬영이에게 더 많이 말했을 것이다.
함께해서 행복했다고.
네가 있어서 좋았다고.
나는 3년 전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같이 있어서… 진짜 좋았어,찬영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재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나도…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 없었어.”
재민은 괜히 모래를 발로 툭툭 차며 말을 이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그 땐 더 오래.. 재밌게 놀자”
괜히 웃는 척했지만,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때 선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보고 싶다!”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진짜 보고 싶어!”
선우는 항상 솔직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한 번만 나와봐!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괜히 씩 웃으며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민혁도 벌떡 일어나 따라 소리쳤다.
“아! 보고 싶다, 진짜!”
그리고 괜히 투덜댔다.
“너 빠지니까 재미없잖아!!”
하지만 마지막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재현은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파도를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지.”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 같았다.
“우린… 네 덕분에 아직도 이렇게 웃어.”
재현은 바다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거기에 정말 찬영이 서 있는 것처럼.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차가운 겨울 바람, 발끝에 남아 있는 바닷물의 감각, 옆에서 느껴지는 친구들의 체온.
“보고 싶어, 찬영아.”
이번엔 작게 말했다.
소리치지 않아도 닿을 것 같아서.
파도가 밀려왔다가, 천천히 물러갔다.
그날의 바다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 마지막 날이 마지막인 줄 몰라서, 우리는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던 거라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우리는 분명히,
정말로 행복했으니까.
우리는 한 참 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이후 주변을 걸어다니며 골목과 빈 건물을 들어가봤지만, 딱히 건질만한 것은 없었다.
어느새 우린 산 아래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와버렸네”
재현이 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벚꽃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재민이 아무 말 없이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들었다.
“뭐 찍어?”
재현이가 물었다.
“그냥.”
대답은 짧았다.
찰칵.
사진이 찍혔다.
“그게.. 찍히네?”
선우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어?”
사진을 확인한 재민이 놀란 표정으로 굳었다.
“벚꽃나무..”
재민의 중얼거림을 들은 우리는 놀라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 산 중턱에, 엄청 크게 자리한 벚꽃나무가 있었다.
만개한 분홍빛으로..
“보여? 이제 보이는 거야?”
선우가 나와 재민을 보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까 찍었던 방향을 다시 바라봤다.
산은 그냥 산이다. 푸르고, 텅 비어 있다.
하지만 다시 사진을 봤을 때, 벚꽃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주 선명하게.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있어..”
그때, 아주 약하게 재민이 말했다.
재민의 시선은 카메라가 아니라 산 위를 향하고 있었다.
아, 그도 이제 벚꽃나무가 보이는 구나..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보여.. 저기 벚꽃나무가!”
재민이 소리쳤다.
“..너는?”
선우가 내 앞으로 와 물었다.
숙인 고개를 드니 민혁과 재현, 선우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시선을 산 위로 향해 한 번 더 확인했다.
하지만.. 역시나
“없어”
내 대답은 똑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더 꽉 주었다.
“괜찮아”
그 때 내 손을 잡은 건 재현이었다.
재현은 주먹을 쥔 내 손을 풀고 빨개진 손바닥을 살짝 쓸었다.
“응. 괜찮아”
재민이 이어 말했다.
“올라가 보자”
민혁의 한 마디에 우리는 다시 벚꽃나무를 향했다.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만약, 올라갔는데도 보이지 않으면?
나만 영원히 보지 못한다면?
왜?
안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는 뭘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발걸음은 계속 느려졌다.
산 위 공터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
저 멀리, 아이들은 이미 벚꽃나무가 보이는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분홍빛이 번져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발이 모래에 박힌 것처럼, 숨이 가슴 안에 걸린 것처럼.
“무서워?”
민혁이 먼저 눈치채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응.”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아직… 찬영이를 못 보내줘서 그런 걸까.”
말은 작았지만, 바람에 실려 다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나만 안 보이는 걸까.”
민혁은 잠깐 머리를 긁적이더니, 조금 더 조용히 덧붙였다.
“못 보내는게 왜, 보내고 싶지않은게 왜”
재민이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보내주는 게 아니라.”
창민이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젠 잊지 않고 같이 가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따라 되뇌었다.
같이 간다.
그는 계속 말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버리려고 온 거 아니잖아.”
“그냥… 네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려고 온 거지.”
그 말은 이상하게 단단했다.
붙잡는 말이 아니라, 기대도 되는 말.
선우는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내 옆에 슬쩍 서며 말했다.
“보이든 안 보이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우리가 여기까지 같이 온 게 중요한 거지.”
늘 그렇듯, 가볍게 말하지만 이상하게 힘이 되는 말이었다.
재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내 앞에 섰다.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 것도,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아닌 위치였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지금 안 가도 돼.”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며 덧붙였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아무도 먼저 가지 않아.”
그 말에 가슴이 조금 울렸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저 멀리 분홍빛이 있다고 했다.
모두가 본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 갈래.”
정말로, 못 가겠다는 사람처럼 말했다.
“확인 안 해도 돼.”
바람이 세게 불었다.
벚꽃이 흩날리고 있을까.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그 자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혹시, 내가 아직 놓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놓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건, 조금도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뒤에서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산 위에 서 있었지만
조금 다른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