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행복의 의미

by 프리지아

나와 재현은 공터에 남았다.

재민과 민혁, 선우는 벚꽃나무가 있다는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빨리 갔다 올게!”

선우가 뒤돌아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멀어 보였다.

우리는 공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겨울 공기는 맑았고, 마을 지붕들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은 뭘 할까?”

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은… 뭘 먹을까.”

잠시 후, 그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고민을 너희랑 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야.”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내일을 생각하는 대화.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은 고민.

“그러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내일 얘기하는 거… 좀 이상하면서 좋다.”

재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 있는 거, 나쁘지만은 않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다시 모였잖아. 우리.”

“웃고 있고.”

“어제도… 진짜 웃겼고.”

어제 저녁.

우리가 라면을 끓이겠다며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민혁은 면을 두 봉지나 쏟아버리고,

선우는 물을 너무 많이 부었고,

재민은 괜히 요리사 흉내를 내다가 국자를 떨어뜨렸다.

찬영이가 있었으면 분명히 그걸 다 찍고 있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나는 아직 산 위를 보지 않았다.

재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말했잖아. 여기 있는 거,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은 잠시 손을 잔디 위에 내려두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가 있어서 괜찮았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산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다 같이 있는 것도 좋았는데.”

“너가 옆에 있는 게… 더 좋았어.”

심장이 조금 느리게 뛰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재현은 웃지도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말했다.

“너가 무너지면, 나도 같이 주저앉을 거고.”

“네가 웃으면, 나도 웃고.”

한 박자 쉬었다가.

“벚꽃나무가 안 보이면 어때.”

그는 고개를 들어 산 위를 보았다.

“네가 안 보이면, 나도 안 보는 거지.”

그 말은 이상하게 단순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여기서든, 밖에서든.”

그의 손이 내 손 가까이에 내려졌다.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거고.”

“끝까지 못 봐도, 상관없어.”


나는 숨을 들이켰다.

“왜 그렇게까지 해.”

작게 물었다.

재현이 이번엔 조금 웃었다.

“네가 보는 세상이 나한텐 더 중요해.”

“벚꽃이 아니라.”

그 순간,

산 위에서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직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리.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금 덜 아팠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럼 나 안 봐도 되겠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봐도 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재현의 눈이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바라봤는지는, 사실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마음을 설명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떠올려보면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시험을 망쳤다며 재현이 교실 뒤 창가에 혼자 앉아 있던 날이 있었다.

점심시간이었고, 애들은 이미 다 운동장으로 내려가 있었다.

교실에는 햇빛이 길게 들어와 있었고, 재현은 그 빛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나는 괜히 그 옆자리에 가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창밖만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괜찮아. 오늘은 그냥 날씨가 안 좋았던 거야.”

밖은 맑았다.

재현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창밖을 보던 시선을 조금 내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재현은 종종 내 옆에 앉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것처럼, 늘 자연스럽게.




우리는 한 동안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셋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벚꽃나무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괜찮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선명했으니까.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갈 때까지 나는 산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용기가 부족했는지 볼 필요가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재현의 말대로 내일은 어디를 가고, 무얼 먹을지 생각이 더 크기도 했다.

‘이렇게 이기적이어도 되는 걸까’

나는 마음 한 켠이 간지러웠다.




다시 밤이 되었다.

이 세계에 와서 몇 번째로 함께하는 밤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는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같이 가자”

혼자 다녀오겠다는 내 말에 민혁이 답했다.

그에 이어 재현,선우,재민까지 .. 결국 모두가 밤하늘을 보러 옥상으로 갔다.

밤공기는 시원했다.

우리는 옥상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학교 옥상에서 진짜 많이 놀았는데”

재민이 말했다.

“거기에 축구공 아직도 있을까”

선우가 답했다.

나는 기분좋게 들리는 아이들의 말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아주 살짝.

어두운 밤 하늘 위로 분홍 꽃 잎이 날렸다.

나는 놀라 바닥을 짚고 앉아서 산을 바라봤다.


벚꽃나무가 보였다.

아주 크게.

분홍빛으로 물든.


“왜 그래?”

한창 대화를 하던 민혁이 놀라 나에게 물었다.

“..보여?”

재현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정말로??”

재민이 신나하며 물었다.

“내일은 정말 다 같이 가보자. 벚꽃나무 아래에”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그렇게 기다리던 벚꽃나무가 보이지만 어쩐지 반갑지 않았다.

가슴 한 켠이 답답했다.

벚꽃나무를 바라보는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부턴가 이 세계에 있는 우리가 당연해졌다.

함께 웃고,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순간들이 다시 익숙해졌다.

그렇게 익숙함에 잠겨,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다는 걸.

이 세계의 곳곳에는 찬영이 있었다.

여기서 웃었고, 여기서 함께했고, 여기서 우리였다.

어쩌면 나는 벚꽃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 세계를 떠나지 않으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곳은 우리가 두고 온 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곳 같았으니까.

미지근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지저귀는 새소리마저도 그 시절의 공기 같았다.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희망이 너무 많아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선 아직,

찬영이가 웃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 세계에선 찬영이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웃고 있는 그가 더 잘 보였다.


“가고 싶지 않아..”

나는 작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니.. 괴물이 가득한 이 세계에 남고 싶다는 내 고백이 충격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나조차도 이 마음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돼. 근데, 진짜 괜찮을 것 같아? 여기 멈춰있어도 돼?”

선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의사를 존중하는 듯한 말과 함께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찬영이도 우리가 멈춰있는 건 안좋아할거야”

민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우리라니.. 떠나고 싶지 않은 건 나뿐일텐데, 나와 우리를 동일시하는 그의 말이 마음속에 박혔다.

“여긴 기억이야. 기억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데려가는거야.. 같이가자”

재민이 덧붙여 말했다.


아, 어쩌면

이 세계를 떠나는 게 아니라 이 아이들과 함께 다른 이야기를 쓰러 가는 것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재현이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재현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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