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다음 날 해가 떴다.
재민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보였다.
우리는 어젯 밤의 재민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재민은 카메라를 계속 목에 걸고 다녔다.
특별히 말하지도 않고, 굳이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그냥 들고 다닐 뿐이었다.
무언가를 놓지 않기 위해서 보다는 이제는 함께 가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산에 올랐다.
선우와 재민이 나뭇가지에 걸어둔 노란 끈은 우리를 어딘가로 인도해주는 것 같았다.
푸른 나뭇잎들 사이에 노란 끈이 흩날렸다.
노란끈은 마치 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노란끈을 따라 재민과 선우가 봤다고 했던 공터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정말 그 공터였다.
나는 찬영과 앉았었던 벚꽃나무 아래의 벤치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벚꽃나무도, 벤치도 모두 발견하지 못했다.
공터의 쓰레기통, 작은 골대, 들어가지 말라고 표시된 표지판까지 그 때 그 공터가 분명했다.
모든 것이 똑같았지만 벚꽃나무만 없었다.
“뭘 찾는거야?”
어느새 내 옆으로 온 재현이가 물었다.
나는 잠깐 말설이다가 재현이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다. 벚꽃나무를 찾고 있다고, 어쩌면 그게 현실로 갈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재현이는 내 말을 들은 후 잠시 산 위를 올려다 봤다.
“벚꽃나무..”
재현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후, 재현과 민혁은 공터를 넘어 더 위쪽까지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와 선우, 재민은 공터에 남았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나와 재민의 표정을 살핀 선우가 물었다.
“이 세계는 우리의 기억이라며, 그럼 다른 곳도 다 같이 가보면 되지”
선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위로해줬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재현과 민혁이 멀리서 뛰어왔다.
“찾았어”
얼마나 빨리 뛰어온 건지 재현이 숨이 찬 채 말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선우가 재현을 보고 놀라 물었다.
“찾았어.. 하 .. 벚꽃나무”
재현이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놀라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재민을 바라봤다.
그 역시 놀라 입이 벌어진 채로 굳어있었다.
“어디서..?”
나는 재현이에게 조금 다가가며 물었다.
“그 공터에서 조금 올라면 꺾이는 부분이 나와”
재현의 뒤로 뛰어오던 민혁이 말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간신히 두 팔로 무릎을 지탱했다.
‘하.. 찾았구나..’
안도의 한숨이 몰려왔다.
“갑자기 왠 벚꽃나무? 그걸 왜 찾아”
선우가 이 상황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 말했다.
“그거 원래 있었는데”
이어지는 선우의 말에 우리는 모두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의 목소리에는 긴장감도, 떨림도 없었다.
“여긴 우리 기억 속이니까. 그럼 벚꽃나무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재민도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 크고 꽃이 활짝 피었어.”
재현이 덧붙였다.
“그게..원래 있었다고?”
민혁이 선우에게 물었다.
“무슨 말 하는거야.. 저기 산 위에 혼자만 활짝 핀 벚꽃나무가 안보인다고?”
선우가 재현과 민혁이 뛰어온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재민은 산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안보여.”
순간, 공기가 무거워졌고 침묵에 잠겼다.
보이는 사람과 아직 보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이 묘하게 느껴졌다.
“너는?.. 너도 저게 안보여?”
선우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산을 쳐다봤다.
“.. 없어”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와 재민 빼고 모두가 보는 벚꽃나무..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만 안보이게 되는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 그래서..”
선우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벚꽃잎을 가지고 내려왔거든?.. 근데 내려와서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둔 벚꽃잎이 안보였어”
선우가 바지 주머니를 만지며 말했다.
“난 그냥.. 오다가 떨어뜨린 줄 알았는데..”
선우의 말에 아무도 선 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나는 선우에게 찬영이 말해줬던 벚꽃나무에 대해 말했다.
끝 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찬영이 분명 언급한 적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내 말을 들은 후 선우의 눈썹은 살짝 떨렸다.
“나도 .. 언젠지 모르겠지만 들은 적 있어”
민혁이 조용히 말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무슨 벚꽃나무의 세계.. 찬영이가 늘 말하던 게 있었어..”
민혁은 기억을 되짚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응.. 돌아갈 방법은 분명.. 그 벚꽃나무일거야”
재민이 더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민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만약.. 그 나무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면..”
나는 말을 머뭇거리며 민혁과 재현, 선우를 쳐다봤다.
“.. 그러면.. ”
나는 끝내 그곳을 통해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같이 가자.”
선우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다 같이 왔잖아. 그럼 갈 때도 다 같이 가야지”
선우는 재민과 나를 보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너희가 보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걸 찾으면 되고”
민혁이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재현은 끝까지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나와 재민은 슬픈 웃음을 지었다.
언제 볼 수 있을거라는, 돌아갈 방법이 더 있다는 확신의 말을 하지 못한 채 우리는 고개를 끄떡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