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달빛을 머금은 밤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by 프리지아


나와 재현은 한 참을 산을 바라보다가 내려왔다.

“이제 내려오는거야?”

비상구 계단을 내려오던 재현과 나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민혁과 선우를 마주쳤다.

“어디갔다와?”

나는 둘이 올라온 방향을 보며 물었다.

“잠깐 주변 순찰?”

선우는 웃으며 말했다.

“재민이는?”

재현이가 물었다.

“쉬고 싶다고해서. 집에 있을거야”

민혁이 집 문을 열며 말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서재민”

선우가 창민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눈을 마주보다가 문이 닫힌 방 하나에 시선이 모여졌다.

방 안은 조용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잠시 뒤, 재민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찬영아.”

그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너무 익숙해서 마음이 내려앉았다.

“여기, 네가 쓰던 거랑 똑같은 카메라가 있어.”

작은 숨.

“웃기지.”

잠깐 침묵이 흐르고,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긴 좀 편해?”

“아픈 데는 없어?”

“나 있잖아..”

목소리가 아주 조금 갈라졌다.

“나만 제일 아픈 줄 알았어.”

“나만 계속 그날에 멈춰 있는 줄 알았어.”

숨을 삼키는 소리.

“근데… 아니더라.”

긴 정적 끝에 이어진 말.

“여기와서 보니까.”

“민혁이도도, 재현이도… 다.”

“웃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버티고 있는거였더라.”

문 밖에 서 있던 우리는 숨을 멈췄다.

“사실은 우리 모두 아픈데.”

“그냥 내색 안 하고 있었던 거더라.”

그 말이 조용히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만 힘든 줄 알고, 나만 붙잡고 있었어.”

“나 혼자 계속 벌 받고 있는 줄 알았어.”

조용히 웃는 기척이 났다.

이번엔 자조가 아니라, 조금은 정리된 웃음이었다.

“근데 그게… 너를 위한 건 아니었나 봐.”

한참의 침묵.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가 먼저 너를 놓아줘야겠지..그래야 다른 애들도 마음이 편해지겠지”

그 말은 차분했다.

결심에 가까웠다.

“잊겠다는 거 아니야.”

“그냥… 네가 없는 나도 인정해보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소리.

“나 이제 좀 살아볼게.”

“미안해하면서 멈춰 있는 거 말고.”

“도망치지 말고.”

“친구들이랑..”

아주 낮게 덧붙였다.

“그래도 되지?”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문 밖에 서 있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같이 슬퍼했고, 같이 기억했고,

같이 견뎌왔다고.

그런데 재민이 혼자서 얼마나 오래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재현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혁은 고개를 숙였고, 선우는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나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재민은 이미 혼자서 가장 깊은 싸움을 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방문을 열지 않았다.

재민에게 이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와 재현은 옥상에서 나눈 이야기를 민혁과 선우에게 해줬다.

우리 이야기를 듣던 둘의 눈동자는 조금 흔들리다 곧 단단해졌다.

“그럼.. 여긴 우리의 기억 속일까”

민혁이 말했다.

“왜?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건데”

선우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 말했다.

“…”

아무도 답 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찬영이일까..”

침묵 속에서 내가 작게 말했다.

이 모든게 찬영의 뜻인 걸까.

우리 대화는 의문만을 남긴 채 밤이 깊어져 갔다.




고3 4월의 밤이었다.

낮엔 분명 따뜻했는데 해가 지고 나니 바람 끝이 아직 서늘했다.

하늘은 완전히 까맣진 않았고,

짙은 남색 위에 희미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고 3이 된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을 꼭 해야했다.

나는 교실 형광등 아래에서 문제집을 붙들고 있다가 선우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야.”

선우가 작게 속삭였다.

나는 책상 아래 숨겨둔 작은 케이크 상자를 꺼냈다.

상자 모서리가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급하게 사느라 예쁜 건 고르지 못했다.

어두운 계단을 올라 옥상 문 앞에 섰다.

선우가 성냥을 켰다.


탁- -


불꽃이 짧게 튀었다가, 작은 촛불 하나에 옮겨 붙었다.

내가 케이크를 들고, 선우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밤공기가 먼저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그 안에, 먼저 와 있던 애들이 있었다.

난간에 기대 선 민혁,

바닥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던 재현,

그리고재민.

그 옆에 서 있던 찬영은 선우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상자 위 촛불을 보고는 멈췄다.

“생일 축하해.”

나는 케이크를 찬영 가까이 대며 말했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두운 옥상 위, 그 작은 불빛 하나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찬영의 얼굴이 불빛에 물들었다.

눈동자에 불꽃이 작게 흔들렸다.

“야… 너네.”

그는 웃었지만,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재민이 먼저 박수를 쳤다.

“아무리 고 3이어도 생일은 그냥 못 넘기지.”

“고마워, 진짜.”

재민의 말에 찬영은 감동받은 듯 했다.

우리는 그를 둘러싸듯 섰다.

“빨리 불어. 바람 때문에 꺼지겠다.”

선우가 재촉했다.

“소원 빌어야지.”

재현이 조용히 덧붙였다.

찬영은 잠깐 우리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바람이 조금 세졌다.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괜히 숨을 죽였다.

그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내년에도, 같이 있자.”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서 있던 나는 들었다.

그는 눈을 뜨고,

후— 하고 숨을 불었다.

촛불이 꺼지며 가느다란 연기가 밤하늘로 올라갔다.

어둠이 다시 내려앉았지만 이상하게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난간에 나란히 앉았다.

운동장 불빛이 멀리서 희미하게 깜박였다.

도시의 소음은 낮게 깔려 있었고, 하늘은 생각보다 깊었다.

“내년엔 다들 뭐 하고 있을까.”

민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수능 끝나면 여행 가자.”

선우가 바로 말했다.

“어디로?”

민혁이 되물었다.

“좋다”

재민이 웃었다.

재현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그냥 다 같이 또 모였으면 좋겠다. 대학이 어디든, 멀어져도.”

“감성적이네.”

민혁이 장난스럽게 밀쳤다.

나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진짜 어른이 될까.”

찬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을 뒤로 짚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난,”

찬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진 계속 찍고 싶어.”

그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지금 이런 거. 별거 아닌데, 나중에 보면 다 기억날 것 같잖아.”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괜히 마음에 남았다.

“내년에도, 다 같이 찍자.”

찬영이 덧붙였다.

고3 4월의 밤.

바람은 차갑지 않았고,

촛불은 이미 꺼졌지만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직 아무도 잃지 않았고, 아직 아무도 죄책감을 모른 채.


그때의 우리는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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