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konyvesmagazin.hu)
“자신의 근본을 흔들지 말아라.
타인의 근본도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세상에 그 무엇의 근본도 절대 흔드려 들지 말아라.
그 근본은 곧 본인의 정체성이요, 뿌리 그 자체일 것이니 말이다.
인간의 근원적 자존감 그 자체일 것이니 말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의 이유이자 의미’ 그 자체일 것이니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떤 나라도 그 나라의 근본이 있을 것이고, 어떤 민족에게도 그 민족의 뿌리와도 같은 그러한 근본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은 사람들 가슴속에 담기고, 역사적 여러 흔적 속에 담기어, 설화나 실사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오늘날의 사회에 끊임없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웬만해서는 잘 잊히지도 않는 편이다.
또, 비록 이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크고 작은 여러 세상사에도, 여러 조직이나 단체에도, 심지어는 개인에게 마저도 비교적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속성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결코 지협적이지 않아, 비교적 큰 범위와 긴 시간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그러한 근본의 틀과도 같은 것이 바로 근본일 것이다.
어떤 이념에도, 어떤 철학에도, 어떤 종교에도, 어떤 문학이나 예술에도, 그 분야나 장르별 큰 틀에서의 근본적 사상이나 이념적 뿌리 같은 것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또, 어떤 학교나 단체, 조직 등에 있어서도, 그 역사나 전통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그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념이 더욱 짙게 배어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근본들은 잘 케어되고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늘 새로이 그 의미를 되살려 내거나, 더욱 빛을 발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혹여 누군가가 이를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마구 뿌리째 흔들어 대려 한다면, 이는 큰 사고 혹은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 가족을 욕한다든지, 자기 출신 학교나 출신 단체 등을 욕할 경우에는, 자기 개인 인격체에게 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민감해지고, 반발을 할 수도 있고, 더욱 분노를 나타낼 수 있는 이유도, 그러한 문제가 바로 자기 근본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구나 현재 살고 있는 타향보다는 자기 태어난 고향에 더 근본적 애착을 느끼게 되는 것 또한 고향이라는 개념이 타향보다는 훨씬 더 인간의 근본적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여러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도, 자기 출신 연고팀에 유독 환호를 보내는 이유 또한 인간의 깊은 심리적 근본을 자극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를 악용하는 측면에서는, 사회적으로 아주 악랄한 사람일수록, 매우 악독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이러한 근본을 건드려서, 보다 손쉽게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한다.
즉, 상대의 가장 큰 약점 혹은 근본적 요소를 건드려서, 비교적 용이하게 상대방을 제압하거나 무너뜨릴 찬스를 잡아보겠다는 심리일 것이다.
특히, 사람들 개개인에 있어서도, 저마다의 타고난 근본이 있을 수 있고, 비록 타고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후천적으로 쌓아 올린 여러 취득과 생장의 가장 근본이 되는, 마치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그러한 근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떠한 사유로 인하여, 이러한 근본이 흔들리게 되면,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고, 그 정체성의 흔들림은 결국 사람을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불안정 혹은 불안적 상황이 심화되어, 크고 작은 여러 비극이나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리의 소중한 삶을 잘 케어해 내려면, 서로가 서로의 한계선 혹은 마지노선을 함부로 침범하는 일을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이며, 웬만해서는 이러한 영역 근처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한 한계선을 월장하여, 마구 넘어가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하겠다.
이와 관련된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연산군이 그렇게 포악해진 데에는 그의 근본 혹은 정체성의 혼란이 크게 한 몫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중전(성종의 왕비)이었던 어머니 ‘윤씨’가 폐위되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는 진실을, 어릴 때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진실을, 왕이 된 이후에 아주 신랄하게 대하게 되었을 때, 아마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는 누구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대한 혼란은 심리적으로 아주 극심했을 수 있다.
급기야는, 이유가 어떻든, 자기 모친이 사약을 받는 과정에 참여하였거나 조금이라도 관련되었던 신하들을 모조리 도륙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기 모친은 전혀 잘못한 점이 없었고, 그럼에도 아주 부당하게 폐위 및 사사(賜死)되게 되었으며, 모든 것이 신하나 궁인들의 정치적인 모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즉, 자기 모친이 폐위되고, 결국 사약을 받게 된 모든 이유는 백 퍼센트 신하나 궁인들의 책임이었고, 이는 매우 악랄한 음모였다고 스스로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그 분개가 극도에 치달았던 것이고, 이를 계기로 결국 폭군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명확한 역사적 기록(실록)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매우 부족하고, 단지 추측성 혹은 구전의 사실들이 많이 포함되어 전해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당시 연산군 자신의 근본(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이로 인한 폭정은 크게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매우 결과론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당시 성종이, 폐비 윤씨의 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사사를 명하지 말고서, 그냥 세자의 어머니로서의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게 좀 배려를 해주었더라면, 과연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그렇게 하였더라면, 우리 역사의 비극도 많이 줄일 수 있었고, 그만큼 우리 역사에 순풍을 많이 보탤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인간은, 어렸을 때는 부모가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과 조건 없는 보호를 해주고, 험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한 방어막을 쳐주므로, 이러한 다소 절대적인 보호막을 토대로 하여, 자기 자신의 근본을 만들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즉, 갓 태어나서 모든 것이 미약하고 낯선 상태에서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고, 이이의 욕구와 감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을 해주면, 아이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식하여 점차 자아를 형성하고, 그러한 귀한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여 자기 근본을 형성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결혼도 많이 하지 않고, 출산율도 매우 낮은 편이기도 하거니와, 이혼 또한 엄청나게 많이 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이혼을 하지 않아도 이혼과 거의 다르지 않은 상태로 놓이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이러한 이혼 혹은 이혼 유사 상황은, 아이들이 자신의 근본과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많이 혼란스러워하게 할 것이고, 나아가 그 정체성 및 자존감 성립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이러한 점을 항상 잘 고려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피할 수 없는 이혼 혹은 이혼 유사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철저한 보완책(아이들의 근본 혹은 정체성, 자존감 등의 확립을 위한 제반 지원 수단과 활동 등), 법적 보호 방책 등에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 미래 세상을 짊어지고 나갈 아이들에게, 만약에 그들이 여러 비행이나 악행의 소굴에 잠시 빠졌다고 하더라도, 솜털로도 때려서는 안 된다.
즉,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가능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므로, 어떤 아이가 현재 시점에 다소 부족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설령 매우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미래의 엄청난 가능성마저 꺾어버려서는 절대 안 된다.
그래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많은 기회와 많은 배려를 해주어야 마땅하다.
어른들의 이러한 배려의 손길이, 지속적인 보살핌이 절대 멈추어져서는 안 되겠다.
또한, 어른들에게 있어서도 근본의 위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만약, 자기 삶에서 여러 피치 못할 좌절로 인해 심하게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다든지, 무엇을 해도 잘 안 되는 현실이 연속된다든지, 자기 열등감에 빠져 사는 기간이 길어지는 등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결국 이러한 자기 근본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상태가 지속해 심화된다면, 각종 우울증, 소시오패스 등의 병증으로 변할 수도 있으므로, 더욱더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어른들의 근본에 대한 위기는 결국, 자기 자존감의 위기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
그러니, 어른들의 이러한 근본에 대한 위기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존감을 여로모로 잘 챙기려는 다각적인 노력이 매우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조직 혹은 시스템적이든 말이다.
이렇게 어른이든, 아이이든 간에 똑같이 자기 생에서 매우 중요하고, 자칫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자기 근본의 위기를 과연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현대 사회일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있고, 각종 우울감, 상실감, 허무감 등의 사회적 현상을 많이 유발할 수 있는 이러한 근본에 대한 위기를 과연 어떻게 하여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 무리한 갈라치기를 하지 말아라.
단적인 예로, 어린아이의 경우를 한번 보자.
어린아이에게 우리가 짓궂은 말투로, 혹은 장난 삼아, 이렇게들 많이 물어본다.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
사실,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우문(愚問)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똑같이 소중할 것이고, 누가 더 좋다는 그러한 갈라치기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
물론, “엄마나 아빠 중 누가 더 아이를 잘 돌보아 주느냐, 누가 더 아이를 잘 챙겨 주느냐!”라고 하는 객관적 평가를 제삼자가 내릴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평가는 정작 그 아이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그 아이에게서, 엄마나 아빠 중 한 사람이라도 떼어내어 버리게 되면, 그게 누구이든 간에, 그 아이는 아주 심각한 자기 근본에 대한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말로 표현은 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엄청난 혼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아마, 그 아이는, 마음속으로 자신은 과연 어디로부터 왔으며, 엄마는 누구이며, 아빠는 누구이며, 자기 존재의 의미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소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어느 가정에 소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정신적 혼란이 아주 극심해질 수도 있다.
우리의 일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마음에 좀 들지 않는다고 하여 상대를 왕따 시키고,
마음에 안 드는 이웃을 향해 마구 뒷담화를 하려 하고,
정치적 성향면에서, 자기 진영이 아니라고 하여, 말이나 댓글로 폭탄을 날리려 하고,
심지어는,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게 되면, 마구 책잡으려 들기도 한다.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때로는 마치 원수지간이라도 된 듯이 마구 잡아먹으려 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려 날뛰기도 한다.
과연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사회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자기 이기적 행태가 마구 난무한다고 하면, 결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자기 주변의 그 누구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결국은 파국의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과연, 순차적으로 자기 근본이 심히 흔들리는 사태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개개인의 자존감 또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다.
결국, 누구나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이고,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는 육체적으로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더라도, 이러한 굴레를 결코 쉽게 빠져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에서도, 과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절대 갈라치기 같은 수준 낮은 모습을 보이지 말고서, 오히려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포괄적 인정을 잘하여야 하겠다.
절대 아주 편협된 생각, 자기 이기심으로부터 발로한 갈라치기 등을 잘 자제하고서, 제발 아주 넓은 이해와 인정(認定)의 마음을 지녀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흐름이 매우 상승적 기운을 띨 수 있을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며, 가장 훌륭한 사회적 공동체의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부정하려 들지 말아라.
상대의 의견을 쉽게 부정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또,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결코 너무 쉬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때로, 모두가 다 당신을 부정하는 것 같아도, 당신의 과거를 잘 회상해 보면, 분명히 당신을 참으로 아껴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정말로 귀히 여겨주고, 항상 진실하게 대해주고, 언제나 한결같이 지지해 주고, 늘 사랑의 눈길을 보내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당신에게 너무나도 따뜻하기만 하였던 당신의 부모님, 친지, 선생님, 친구, 선후배님, 이웃 등, 잘 생각해 보면, 생각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이 그러했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당신을 지지해 주고 사랑해 준 그러한 사람의 인원수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
단 한 명이라도, 당신이 매우 어렵고 방황할 때, 서슴없이 그렇게 행해준 그 사실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즉, 그 인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존재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
단 한 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전정성, 위대한 사랑 등,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이 아주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을 때, 험난한 세상을 매우 헤매고 있을 때, 당신을 진정 아껴준 분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당신의 큰 에너지를 다시 한번 소환하여 보아라.
다시 아주 기운찬 에너지를 잘 끌어내고, 당신 마음속을 차곡차곡 채워나가 보아라.
또한, 오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와 자신감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꼭 잘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지금 외롭다면, 근본에 대한 혼란을 겪고 있다면,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다면, 일부러라도 웃음을 띠려 노력해 보고, 어떠한 모임에도 적극 참여해 보고, 일부러라도 밖에 나가서 아무라도 붙잡고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온 세상과 한번 마짱을 떠볼 수도 있어야 하겠다.
그러한 자신감을 제대로 한번 가져보아야 하겠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도 잘 극복해 나가야 하겠지만, 그 반대 측면에서, 타인에 대한 부정 또한 절대 하지 말아야 하겠다.
즉, 근본에 대한 자기 소중한 마음의 간수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그러한 마음 또한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 주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 너무 쉽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를 말아야 하듯, 상대가 자신과는 많이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마구 공격하려 들거나, 마구 멸시 혹은 핍박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항상, 자신만큼이나 상대방 또한 아주 소중한 존재일 것이니 말이다.
결국 무엇에든, 누구에든, 너무 쉽게 부정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도, 상호 간에도, 서로 아끼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외에는 별로 답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자기 내면을 아주 가치롭게 만들어라.
자기 근본에 대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아주 아름답고 가치롭게 가꾸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무엇이든 활기차게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독서, 예술, 문학, 철학, 자기 최애 등을 최대한 가까이하려 하고, 그 집중도도 높여 나가는 것이 참으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진정, 자기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고, 또 제대로 추구할 수 있기 위함이다.
자기 내면 중에서도, 특히 자유 의지의 힘을 잘 주목하여 보아라.
자유 의지란 무엇에도 무리하려 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추구하여 나가려는 마음의 다름 아니다.
그래야 과연, 제대로 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고, 지속해 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셈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 및 결정을 하고, 스스로 추구하였으니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를 바탕으로, 자기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도전할만한 목표를 만들어낸다면, 자기 근본에 대한 위기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삶의 회의감이나 우울감 또한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라면, 자기 마음속에 무한한 희망과 끝없는 행복만이 가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자기 근본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하여, 자기 생의 무한한 가치와 미래의 가능성 자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과연 자기 마음이 이러한 생태라면, 무엇이든 자신 있게 도전하고, 무엇이든 자신 있게 추구하려 할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또한, 자기 스스로가 이미 충분히 가치로워졌으니, 아마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였을 것이니, 절대 남들과 비교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현재 존재 그 자체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근본에 대한 확신이 생겼을 것이니, 무엇을 대하여도 항상 행복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이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늘 감동과 감탄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고, 무한한 소통을, 무한한 교감을 기꺼이 이어나가려 할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