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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생의 불확실성을 잘 확신해 나가라.
더욱더 세세하고 제대로 한번 확신해 나가 보아라.
그래서, 진정한 당신을 발견해 보아라.
진짜배기의 당신을 드디어 찾을 수 있어라.
더욱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당신 스스로를 통해서 말이다.
당신의 진정한 깨침과 큰 내공의 힘을 통해서 말이다.
당신의 지속적인 의지를 통해, 그러한 확신을 잘 발현해 나가 보아라.
그래서, 결국 매우 가치로운 당신을 이루게 하여라.
오늘날과 같은 아주 미혹한 세상에서, 매우 혼미한 세상 속에서, 당신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렇게 추구해 나가야 한다.
기꺼이 그러한 방향으로 제대로 추구해 나가야 한다.
당신에게는 이미, 그러한 방향을 추구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잠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신의 신은 이미 당신이 이 세상에 나와, 필요한 만큼의 모든 능력을 충분히 부여해 놓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속속들이 발굴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무궁무진할 것이니 말이다.
마치 초능력 혹은 화수분의 능력이라도 발현해 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당신은 이렇게 이미 잠재된 능력을 잘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당신 스스로의 자신감을 제대로 한번 지녀 보아라.
그러한 방향으로 당차게 한번 추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세상에 와, 아주 온전한 당신을 제대로 한번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차피 세상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면, 그것을 확신할 필요가 무애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반문은 상당히 피상적인 시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세상이 불확실하는 것을 제대로, 마음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을 잘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아주 크게 다를 것이기에 말이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아주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그냥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서 어설프게 살아가는 것은 아주 천양지차일 것이기에 말이다.
매사를 제대로 알고서 대처하는 것과 그냥 앞뒤 분별없이 대처하는 것과는, 가면 갈수록 엄청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특히,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불완전한지를 속속들이 잘 깨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인심을 여러 각도의 관점으로 잘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깨침을 통해, 당신은 세상의 큰 파고를 지혜롭게 건널 수 있어라.
아주 거침없이 건너뛸 수 있어라.
그러나, 매우 낮은 자세로, 가장 겸손한 자세로 건널 수 있어라.
그래서, 당신 생이 자고로 ‘만사불여튼튼’이 되도록 만들어 나가라.
또, 이러한 깨침은, 결코 세상에 대한 한탄이나 회의적 시각이 아닌, 폭넓은 이해와 그윽한 연민 혹은 위로로 바뀌어 갈 수 있게 하여라.
세상 모든 존재가 아주 불확실하고, 매우 불완전한 존재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어라.
또 자신 또한 다른 존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라.
그러니, 항상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낮아지려고도 하여라.
이렇게 모든 것을 잘 인지하고, 마음으로 인정하게 되면, 당신 속에서 맨바닥으로부터 솟구치는 감사와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에 대해 연대와 위로의 소망, 깊은 감사와 사랑의 소망이 돋아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이 첨차 더욱 커져 가기만 할 것이다.
과연, 우리의 생이란 것은 참으로 불확실한 상태인 것이다.
이른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어질 수 있다.
즉, 앞 날의 일은 그 누구도 감히 장담할 수 없다.
현실이 너무나 어려운데, 더욱이 엎친데 덮칠 수도 있다.
즉, 설상가상의 상태가 되어버릴 수 있다.
모든 것이 새옹지마와 같을 수도 있다.
즉, 모든 것이 구름과 안갯속에 잠겨 있는 양, 까마득하기만 할 뿐, 전혀 분간해 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울 수 있다.
무엇인가를 잘하려고 노력을 열심히 하였지만, 결과가 영 엉뚱하게 나올 수도 있다.
즉, 자신의 노력과의 정반대의 결과를 직면할 수도 있다.
어떤 시험이나 평가의 결과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가 없다.
즉, 어떤 시험이나 평가에 열심히 준비를 하였는 데도 낙방할 수 있고, 너무나 준비가 부족하였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합격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대가 반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은 뜻으로 이야기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는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내가 퉁명스럽게 이야기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친구가 뜻밖에도 “그렇게 말해 주어 너무 고맙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행복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또 다른 재앙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나의 행복을 시기하는 자들의 농락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주변에 온갖 반목으로 얼룩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유명인이 되었느니, 이제 좀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그러나. 가짜뉴스나 모함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큰 차와 큰 집을 갖게 되어서 매우 기뻤다.
그런데, 유지비, 관리비, 온갖 세금 등도 너무 많이 들고, 통장은 점차 고갈되어 갈 수 있다.
결국, 어울리지 않는 차나 집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게 되어서 무척 좋아하였는데, 그 이후에는 전혀 잘 풀리지 못하였다.
블라인드 채용의 문턱을 못 넘어 원하는 곳에 취업도 못하였고, 어쩐지 결혼도 못하고 있어 우울하기만 하다.
성격마저도 점점 망가져 가는 듯하다.
이렇게, 사람의 생에는 여러 불편한 진실이, 어쩔 수 없는 사악한 힘들이 많이 숨어있을 수 있다.
이른바 '악마의 힘'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그러니, 당신의 미래는 온갖 불확실성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으려면, 거기에 치여 결코 다치지 않으려면, 그래서 생의 진정 한 자유를 얻을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원래 세상이라는 것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있는 그대로'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불확실한 세상을 억지로 확실하다고 우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지 않겠는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인 양, 떠드는 것은 심각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때로는 사기성 행각과 연결될 수도 있다.
전혀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매우 확실하다고 속여 가면서, 자기의 잇속이나 금전을 챙긴다면 말이다.
이와 같이, 무엇이든 “확실하다!”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는 일반인들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온갖 거짓을 꾸며 대며 자기 잇속을 챙기는 자들이 있다.
또한, 매우 무지하여 혹은 자기 지식의 폭이 너무나도 좁디좁아, 별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확실한 양으로, 개념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 모두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세상 모든 것이 과연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라.
그래서, 자기 미래의 모든 예상되는 문제들을 미리미리 잘 대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자기 생에서 최악의 경우에도 별 문제가 없도록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생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더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더 나아가, 모든 위기를 아주 태연하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또, 그러한 위기를 제대로 넘어서려면, 세상 모든 것을 아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삶에 대해서도,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나 이치에 대해서도, 참으로 깊은 이해와 통찰이 필요하다.
그래야 모든 문제에 대해 정확한 처방전을 제대로 내릴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야 당신 미래에 대한 그 어떠한 불안감이나 두려움마저도 점점 아주 옅어지게 해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당신의 신은 그 불확실성을 제대로 통찰하고 극복해 나갈 정답을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그리 쉽게 당신의 숙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때로는, 오히려 더욱 큰 고난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니, 어차피 그 해답은 당신 스스로 구해야 한다.
때로는, 당신의 깊은 속에서 구해야 한다.
미래의 온갖 불확실성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묘안에 대한 해답을 말이다.
잘 생각해 보면, 만일 세상이 그리 확실한 것만으로 가득하다면, 당신의 신이 당신을 여기에 왜 보내었겠는가?
모든 것이 확실하기만 하고, 매우 예측 가능한 세상이라면, 애당초 당신이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 그 무엇도 전혀 정해진 것은 없으며, 오직 당신의 이해의 폭과 통찰의 깊이에 따라, 그럼으로써의 당신 선택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되어 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 당신의 미래는 당신이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크게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당신의 미래는 무궁무진하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겠다.
그런데, 당신의 이러한 이해와 통찰의 능력에는 아주 큰 적들이 숨어있다.
바로, 자기 욕심과 고집이다.
자기 욕심에 눈이 멀게 되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니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자기 속이 고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아무런 판단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첫째, 옛이야기 중 하나이다.
어느 한 농부가 짚단으로 자기 집의 울타리를 덮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울타리 근처에서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짚단 속을 아주 조심스레 들추어 보았다.
그런데, 우연히 그 속에서 아주 큰 꿩이 발견된 것이다.
그야말로, 뜻밖의 횡재였다.
그 꿩을 시장에 팔아, 오랜만에 꽤 큰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욕심에 눈이 먼 농부는 매일매일 그 울타리를 짚단으로 새로 덮어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어느 날 드디어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욕심이 커진 나머지, 아무런 조심도 하지 않고서, 그 짚단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아뿔싸, 뱀이 자기 손을 물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농부는 이웃집 사람에 의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덩그러니 엎어져 있는 철제로 된 ‘꿩 케이지’ 하나뿐이었다.
그 속에 과연 뱀이 도사리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예전에 꿩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당연히 조심을 해야 했건만,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이를 간과한 것이다.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로, 그냥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
결국,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둘째, 경허스님의 일화이다.
예전 어느 날, 경허스님과 제자스님이 산중을 걷고 있었다.
산이 워낙 험하고 깊은 지라, 근처에는 민가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너무나 허기가 진 나머지,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상여 하나가 보였다.
상여꾼들이 무거운 관을 어깨에 메고, 곡을 하며, 지나가고 있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에 경허스님과 제자스님은 그 상여 행렬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윽고, 드디어 상여 행렬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제자스님이 그들에게 허겁지겁 말을 건넸다.
“우리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렇습니다만,
먹을 것이 있으면, 무엇이라도 좀 내어 주시오!”
그런데,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술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술이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그들은 스님들이 본래 술이나 고기를 못 먹는 것을 알면서도, 두 스님을 놀려보겠다는 심보였던 것이다.
제자스님이 손사래를 치며, 버럭 화를 내었다.
순간 그 산중은 아주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런데, 옆에서 잠시 이를 지켜보던 경허스님이 제자스님을 가로막으며, 뜻밖의 대답을 내어놓았다.
“술이 있으면 술을 주시고, 고기가 있으면 고기도 좀 내어 주시오.
만약 술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술을 작은 잔으로 주지 말고, 큰 동이채로 좀 내어 주시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두 스님은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감사하다!”라는 인사로 모든 상황이 잘 마무리된 것이다.
경허스님은 이미 세상 돌아가는 것이 모든 게 불확실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상여꾼들이 뜻밖의 농락을 해 와도, 전혀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상여꾼의 말을, 일단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로 했다.
그런 후, 본인 나름의 묘안(해결책)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하여, 배고픔의 위기도, 사늘한 현장의 분위기도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내 친구 이야기이다.
지난번 나와의 술자리에서 그는 이런 에피소드를 하나 꺼내어 놓았다.
한번은, 자기가 지방의 면 단위 지역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다고 한다.
그날 예정된 일과를 다 마치니, 오후 3시에서 4시 정도가 되었다.
점심을 못 먹은 터라, 배가 고파서, 이리저리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인근에서 작은 칼국수 집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배가 고팠던 지라, 칼국수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는데, 별로 양이 차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공깃밥 하나를 추가로 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주인으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웬 공깃밥을요!
그 정도면, 드시기에 충분하실 텐데요!”
순간,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도시 같은 곳이라면, 당연히 손님이 주문을 시키게 되면, 그게 자기에게 어떻게 느껴지든지 간에, 자기 매상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바로 내어주는 게 통상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닙니다, 공깃밥이 필요합니다!”라고 눌러 말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퍼져 나왔다.
소소한 깨달음의 미소였다!
그 주인이 공깃밥을 안 주고 있는 것은, 전혀 사심이 없는 행동일 것이며, 오히려 그를 생각하여서 그렇게 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보기 드물게 양복을 잘 차려입은 사람이 시골에서 칼국수 한 그릇을 시키니, 아마 도회지 사람이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출장차 내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했겠다.
교통수단, 편의시설 등이 이래저래 불편한 시골에서, 출장 일을 보느라고 고생을 좀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에 주문을 하는 것을 보니, 내심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칼국수에 면발을 무척 많이 넣어주었었다.
그래서, 충분히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본인의 의견을 말했을 뿐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쯤에 이르자, 그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답변을 하게 되었다.
"칼국수 양이 무척 많네요!
특별히 양을 많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
그러고서, 공깃밥을 더 먹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렸다.
그 주인이 자기를 생각해 주려는 마음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싶었다.
그러한 이해를 통해 그 주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주문을 재차 하는 대신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순간, 폭식을 하겠다는 자신의 부족한 생각도 기꺼이 접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은 ‘일거삼득’이 되어버린 셈이다.
‘감사’를 챙길 수 있었고, ‘폭식’도 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무엇보다 그윽한 ‘미소’까지 챙길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위에 언급한 소소한 몇몇 사례들에서도 보았듯이, 세상에는 과연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인 것이다.
농부가 짚단으로 덮은 울타리 속에 꿩이 아닌 뱀이 도사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한 욕심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줄이야,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경허스님과 제자스님이, 느닷없이 "술을 먹겠느냐!"라고 반문하는 상여꾼들의 태도를 과연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공깃밥을 달라고 하는 손님에게, 팔려는 욕심도 전혀 없이, "그만하면 양이 충분할 것이니, 안 드시는 게 어떨까요?"라는 식으로 답변이 돌아올지를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우리네 생은 전혀 예측불허인 것이다.
충분히 A라는 결과가 나올 줄로 기대했었는데 뜻밖에도 B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A라는 결과를 원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라는 결과가 실현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러니,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대로 인정하고, 항상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결과를 잘 받아들일 줄 알고, 모든 존재를 잘 공경하고,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아무리 허접하여도, 그 사람이 아무리 미천하여도 말이다.
또, 어떤 형태로든 자기 욕심이나 고집은 자기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주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음도 잘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세상 무엇이든, 근본적으로는 매우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를 충분히 느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 생에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을 조우하더라도, 전혀 당황치 말아라.
당신은 이미 세상의 불확실성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거만하거나 오만한 태도를 절대 보이지 말아라.
그 어떤 형태의 갑질이나 핍박이라면, 더더욱 멀리 하도록 하여라.
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조신하여라.
혹여라도 오해가 없도록 말이다.
그들이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도록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어떤 형태로든 연대할 수 있어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가상세계에서, 모두무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때로는 큰 힘이 되어주고, 때로는 한없는 연민과 위로를 보내줄 수도 있어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큰 격려와 사랑도 듬뿍 전할 수 있어라.
스스로는, 늘 자신의 흐트러짐을 경계하여라.
항상 춘풍추상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여라.
당신 마음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하여라.
세상 이치와 섭리를 지속해 탐구하고, 끝없이 배워 나가도록 하여라.
항상 구도자의 낮은 초심을 지속해 지닐 수 있어라.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이러한 불확실성을 찬미하며, 당신의 무한한 기회를 한번 발견해 보아라.
불확실성이 클수록 그 속에 숨겨진 기회 또한 무척 많게 마련이니 말이다!
세상 형편에 토 달지 말고, 큰 용기와 자신감 하나로 도전하며, 화려한 기회를 적극 맞이해 보아라.
이런 게 바로, 우리 미미한 존재들의 당연한 모습이자, 마땅한 도리일 것이니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