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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Guyt Jan 05. 2017

축구로 영국 채우기 (1)

1 - 출발

 

 (*여행기간동안 틈틈히 관광지도 둘러봤지만 남들보다 열심히 둘러보지는 않았기에 철저히 축구 위주로 쓰겠습니다. ㅎ)

 

수능이 끝났다.

 

 수능 전부터 극심한 자존감 부족으로 고생했던 나는 수능으로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수능날 깨달았고, 내 자존감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속되었고, 나는 숨만 쉬고 눈치나 보면서 살아가는 고깃덩어리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그런 나를 지탱해준 것은 수능 전부터 친구와 기획했던 영국여행이었다.

 

 생애 첫 홀로 떠나는 해외여행. 오롯이 내가 계획하고 내가 결정하는 여행이었고,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던 상태였던 나는 미친듯이 '내 취향의' 여행계획을 세웠다. 살면서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무언가를 쫓아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친구 역시 학교에 딱 둘 있는 진성 축덕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내 미친 계획(그걸 계획이라고 한다면)을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었다. 이자리를 빌어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축구보러가자 친구야.

 

 먼저 이 글을 누가 얼마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므로 여행 전에 세세한 준비과정이나 개인적인 팁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쓰도록 하겠다. (근데 딱 하나, 라면이랑 고추참치는 꼭 가져가라고 하고싶다. 먹을거 진짜 없다.) 그래서 크게 중략을 하고 나는 결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만큼이나 기대 그대로 우중충한 날씨를 뒤로하고,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소화불량과 피로누적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영국에서 맞는 첫 아침, 대책없이 일찍 일어나 해도 뜨기 전에 빅벤을 보고, 영국의 기운을 가득 받고 온 우리는 첫 행선지를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정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출발했지만, 날씨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았고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매우 친절했다. (하이버리&이스링턴 역에서 내리면 쉽게 갈 수 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예상보다 훨씬 웅장했다. '새것'티가 물씬 나는 분위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새것 치고는 클럽의 아이덴티티가 잘 드러나 있고, 직원들도 손에 꼽을만큼 친절해서 오히려 아스날이라는 클럽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는 시간이었다.


Emirates Stadium. 킹앙리 만세!

 

 투어 역시 정해진 루트가 있었지만 영국에서 유일하게 '자유투어'인 경기장 투어였다. 락커룸 역시 매우 기억에 남았는데, 원정팀 락커에는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 유니폼이 매우 걸려 있어 쇼핑 아닌 쇼핑을 즐길 수 있었고(이때 반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산 유니폼이 있다.) 그리고 홈팀 락커에는 살면서 본 가장 호화로운 욕조가 있었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축구를 모르는 사람과 가도 충분히 팬샵>투어>박물관 루트로 즐길 수 있는 경기장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 와서 축구장을 하나만 본다면(사심없이) 에미레이츠에 가라고 추천하고 싶다.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원정팀 락커룸. 이쪽 면에는 강등팀이 없다!

 

 다음 행선지는 세븐 시스터즈 역으로 가면 찾을 수 있는 토트넘 핫스퍼의 홈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이었다. 다음날 리그 경기를 관람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우리SON의 유니폼을 사러 간거였는데, (이때 점심을 먹었어야 했다.) 얼떨결에 구장 투어까지 하게 되었다. 확실히 깔끔한 에미레이츠 주변보다는 부산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느낌도 있는 동네였는데, 화이트 하트 레인 역시 80년대 주공아파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장이었다.


White Hart Lane.


 보다시피 내부는 깔끔하다. 그리고 스타디움 투어는 구장을 사람들에게 구석구석 많이 내어주는 느낌이었다. 에미레이츠가 '세련된 축구장' 느낌이라면 하트레인은 '영국의 축구장'느낌이었다. 마침 날씨까지 우중중해져 하루만에 내가 영국에 왔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구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 주변에서 제대로 밥먹을 생각은 왠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0분 걸어서 겨우 맥도날드 하나 찾아 먹었다. 하지만 빅맥은 꿀맛.


Jumo! Give me Son!


 이제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영국에서의 첫 축구관람이었다. 참고로 우리는 처음 일주일 동안 런던의 출근&퇴근시간 지옥을 온몸으로 겪고 (출퇴근시간 모든 역이 고터나 강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뒤로는 '출근시간 피해 출발>움직임>퇴근시간 전 숙소 도착>퇴근시간 피해 다시 나감' 루틴을 충실히 지켰다.

 

 아무튼 영국에서의 첫 축구관람은 바로 브렌트포드 : 미들즈브러의 챔피언십(2부리그) 경기였다. 런던에서 한경기라도 더 보기 위해 미친듯이 알아보다가, 챔피언십 경기까지 생각이 미쳐(원래 여행계획은 4부리그까지 보고오는 거였다. 그럼 두달정도 걸렸겠지.) 밀월이나 찰튼같은 런던연고팀을 찾다가 결국 브렌트포드의 홈경기가 딱 좋은 시간에 있는 것을 찾고 주저없이 예매했다. 원정팀이 미들즈브러인것도 경기를 보러가게 한 이유였다. 나는 스튜어트 다우닝의 아주 오랜 팬이기에... (그래도 승격했으니까 다행이에요 다우닝형..)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브렌트포드의 홈구장 그리핀 파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그냥 빅토리아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로 가는길이 없는 애매한 위치일때는 철도어플을 찾아보는것이 좋다. Trainline 매우 추천.) 정말 아담하고 세월이 묻어나지만, 깔끔한 축구장이었다. 게다가 팬샵에서 세일을 세게 해서 기분이 더 좋아졌던 것 같다. 충동적으로 산 바람막이를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3대째 브렌트포드 팬으로 변신하여 설레는 마음을 안고 입장을 해 경기를 기다리는데, 이후에 찾은 다른 축구장에서는 느끼기 힘든 가족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도 승리를 위해서라기보다 즐기기 위해, 가족과 산책나오듯 보러왔다는 느낌이었고,(특히 뒷자리 형제들) 경기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진심으로 즐기면서 일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영국 날씨를 우습게 보고 바람막이 하나 입고 경기를 봤다가 죽을 뻔 했지만, 경기 수준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매우 즐겁고 기억에 가장 남는 순간들 중 하나였다. 경기는 0:1로 졌다. (이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영국을 떠올릴 때면, 여행 둘째날 뒷자리 형제가 브렌트포드 선수에게 참다참다 내뱉었던 욕이 떠오른다. for God's Sake!! (주님?)

 

Griffin Park. Brentford FC.


 어떻게 다음날로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이제 셋째날이다. 전날 추위에 고생을 좀 했지만 여행이라는 강력한 항생제 덕분에 (이것도 일주일이지) 어찌어찌 일어나 왓포드 정션 역으로 향했다. 왓포드는 런던 바로 위에 있는 위성도시인데, 해리포터 스튜디오가 이곳에 있어 한국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도 해리포터 스튜디오 때문에 왓포드에 갔지만 (여긴 꼭 가봐야한다) 전날 이곳이 왓포드라는것을 깨닫고 여행 계획에 급하게 비커리지 로드 스타디움을 추가했다. 그렇게 해리포터 스튜디오 관람을 마치고 왓포드 정션 역에서 버스를 타고 비커리지 로드로 향했다. 이 길은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정말 친절하게 다 알려주고, 구글맵짱짱맵이 있으니 찾아가긴 꽤 쉽다. 유독 왓포드에서 날씨도 좋고 도시 느낌도 좋아 '이런곳에서 살고싶다. 돈 많이 벌어야지.'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게 비커리지 로드에 도착을 했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아담한 축구장에 아기자기한 팬샵까지 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돌아다니다 '엘튼 존 스탠드'를 발견했는데, 좋아하는 축구 팀을 소유할 수 있고, 그 홈 구장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탠드가 있다는 것이(퍼거슨이나 할 수 있는건데) 너무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도 스탠드 명칭이나 경기장 명칭을 클럽 레전드 이름을 따서 짓는다고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전주 최강희 경기장이라던지... 점점 일기 느낌으로 가는 것 같지만 아무튼 성공적인 왓포드 여행이었다. 비커리지 로드는 유독 프리미어리그 경기, 특히 왓포드 홈경기를 볼때마다 생각이 많이 나는 구장이다.


Vicarage road Stadium. 여행사진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이제 생애 첫 프리미어리그 관람을 위해 다시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 갔다. 토트넘과 레스터시티(저때는 킹스터)의 경기였는데, 확실히 큰 클럽의 경기이다보니 분위기 자체가 남달랐다. 경기장 입장 시스템이 상당히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이런데도 싸우고 사고치는 전투민족 영국형님들.... 좋아합니다. 이번 경기까지는 준비를 열심히 해서 좋은 자리를 잡았는데, 홈페이지에 푸는 자리라 그런지 확실히 주변에 한국 사람이 많았다. 영국이지만 동네 맥주집에서 티비튼것같은 느낌... 아무튼 경기 전 트레이닝때도 오카자키도 보고, (나름 한일더비였다.) 바디도 보고 마레즈도 보고 (얘는 진짜 말랐다. 근데 진짜 잘한다.) EPL 매치볼도 잡아봤다. 레스터시티 고마워요!


 SON이 후보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은 90분이었다. 내가 가장 감탄했던 것은 레스터시티의 수비, 그리고 캉테였는데 현장에서 보니 수비에 있어서 조직력이라는 부분이 크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캉테는... 경기장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도 태클을 할 수 있고 공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였다. 정말 구석구석 뛰어다니며 말그대로 '모든것'을 해냈다. 또 한 선수를 이야기하자면, 알브라이턴은 정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쉼 없이 뛰었다. 바디나 마레즈 같은 선수도 대단했지만, 알브라이턴 같은 선수가 있어야 결과를 낼 수 있고, 장기 레이스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트넘은.... 워커가 빠르고 델레알리가 잘한다 정도...? 경기는 0:1 레스터시티의 승리로 끝났다. 두번째 홈팀 무득점 패배..


 첫 프리미어리그 경기 직관이었지만, 남은게 가장 많은 경기이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SON이 뛰는 것도 눈앞에서 지켜봤고, TV중계화면도 타보았고, 무엇보다 2010년대 축구계 이변의 끝, 15-16 레스터시티의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았다는 것이 정말 운이 좋았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꼭 손자들한테 자랑해야지.


No 7. H.M.Son


 그렇게 꿈같았던 첫 프리미어리그 관람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내리는 비와 싸우며 겨우겨우 숙소로 돌아와 이틀간의 고생을 뒤로하고 말그대로 '뻗었다'. 이제 넷째날이다. 크게 일정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여유롭게 축구장을 돌아보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었다. 이날은 전부터 정말 가보고싶었던 곳을 가보는 날이었는데, 바로 풀럼fc의 홈구장 크레이븐 코티지였다. 친구도 나도 전부터 늘 이곳을 가보고 싶어 했었기 때문에 풀럼이 챔피언십으로 떨어져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이곳만큼은 런던에서 꼭 가보기로 하고 출발했었다. 크레이븐 코티지는 푸트니 브릿지 역에 내려서 구글맵짱짱맵과함께 걸어가면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풀럼 궁과 비숍스파크라는 곳을 지나쳐야 한다. 이곳은 꼭 여유를 가지고 가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둘러보면서 경기장으로 가길 권한다. 분위기에 있어서 만큼은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순간이었다.

  

Craven Cottage Stadium


 크레이븐 코티지 옆쪽 벽이다. 이 반대편 벽은 강을 바라보고 있다. 보다시피 얼핏 봐서는 축구장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가정집 벽면이라고 생각해도 될만큼 소박한 경기장이다. 군데군데 보이는 좁은 경기장 입구와 조명으로 인해 축구장이라는 최소한의 표시만 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coffee cottage는 구단에서 운영하는 카페인데, 한번 들러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크레이븐 코티지는 크고 멋진 경기장은 아니지만, 계속 보고싶고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곳이다.



 두고두고 아쉬운것은 구장 투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리 언제 구장투어가 있는지 알아두고 가는것을 추천한다. 사진은 팬샵 직원이 알려준 미니 투어인데, 딱 사진에 있는 그라운드 전경만 돌아볼 수 있다. 그래도 경기장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 마냥 좋았었고, 내부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직원들도 작은 구단 특유의 친철함이 몸에 배여 있었다.


스탬포드 브릿지 담장에 지소연!


 떠나기 싫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금 무리를 해서 풀럼의 유니폼을 사들고 첼시의 홈구장인 스탬포드 브릿지로 향했다. 스탬포드 브릿지는 풀햄 브로드웨이 역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금방 찾을 수 있다. 크레이븐 코티지와 가까우므로 축구여행을 하고 있다면 이 두 경기장은 묶어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사실 스탬포드 브릿지는 크게 기억에 남지는 않는 경기장이다. 애초에 첼시라는 팀에 대해 애정이 없기도 했고 그렇다고 경기장을 둘러보며 크게 인상이 깊을 만한 포인트도 없었다. 프레스룸을 조금 더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다' 라는 느낌을 많이 주는 경기장이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첼시 팬과 함께거나 시간이 부족하다면, 접근성도 좋고 박물관-메가스토어까지 잘 준비되어 있는 스탬포드 브릿지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풀햄 브로드웨이역 쇼핑몰도 같이 돌아보기 좋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투어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번째로 실망스러운 경기장이었다. 나머지는 추후에 하나씩 나온다.


Stamford Bridge Stadium


 이렇게 여행의 시작, 넷째날까지의 일정이(축구 관련)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이미 일년가까이 지난 일이고 사진을 잘 찍거나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 저 당시의 감정과 느낌을 모두 담을 수는 없겠지만, 한명이라도 이 글을 보고 '이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떠날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나 개인적으로도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여행의 마무리까지 쓰려면 3-4편은 더 써야할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음 편에서 뵙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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