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남편이 내게 말했다. 너는 '편협'해!

다른 일을 좀 같이 해 봐

by 다롬

글로 먹고살기로 결심한 지 어언 1년 반이 되어가는 지금, 도통 '희망'이라는 빛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어제는 술을 한잔 했다. 남편은 늦게 퇴근해서 쓸쓸히 혼술을 즐겼다(남편이 일찍 퇴근해도 그는 술을 마시지 않기에 어차피 혼술). 그리고 남편이 귀가한 여덟 시 언저리, 2차전으로 떡볶이, 순대, 잔치국수까지 후루룩 먹고는 남편과 밤산책을 나갔다. 날씨 어플이 경고한 영하권 강추위에 얼굴이 와자작 얼어버릴 것 같았다.



몇 겹으로 껴입은 상하의와 서로의 따땃한 온기에 기대어 오들오들 걸었다. 그러면서 꺼낸 오늘의 산책 대화 주제는 '왜 내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였다. 물론 여기서 '내게'는 나. 회사를 성실히, 열심히, 잘 다니고 있는 남편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1년 반 넘게 죽자 사자 글을 쓰고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왜 나만 이렇게 아직까지 지지부진하고 있느냐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원래 아주 조그마한 우울의 감정조차 타인에게 내비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영원한 내 편이자 내 사랑인 남편에게만큼은 솔직한 마음을 매일 내보이고 마는데, 그래서 '왜 기회가 오지 않지? 역시 나는 영 아닌가?' 하는 우중충한 속내 역시 제법 자주 꺼내보였기에 남편에게는 익숙한 대화 주제였다.



시꺼멓고 새까맣게 가라앉은 나의 침침한 감정에 대해 남편은 늘 비슷한 결의 다정을 내어주며 보듬는다.



다희. 잘하고 있어.

내가 너 알잖아. 너는 잘하고, 잘 될 거야.

곧 누군가 너를 알아볼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내가 옆에 있을게.



말투만큼이나 따듯한 눈길을 사르르 내리며, 글만 쓰느라 며칠 안 감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지만 그래도 제법 큰 위로가 되는 말. 그러면 나는 간지러운 뒷머리를 삭삭 긁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속으로는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흑흑' 남편의 위로에 셀프 위로를 더해 새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을 삭삭 달래 본다. 그리고 또 다음 날은 리셋되어 힘차게 글을 쓰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남편의 위로를 받고, 다음 날 리셋되어 다시 열심히 살고…. 이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니 어제도 마땅히, 남편은 그런 말을 해야 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잘하고 있어. 그러나 살갗을 뚫을 만큼 맹렬한 추위에 남편이 약간 화가 났나? 어쨌든 "오늘도 종일 썼는데, 유난히 진도가 안 나갔어. 역시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가. 난 언제 기회가 올까?" 나의 하소연 짙은 물음에 그는 대뜸 이런 답을 시전했다.



내가 볼 때, 다희는 지금 뭐랄까
너는 약간 '편협'해졌어.


'펴… 편협…?'



느닷없는 공격을 당한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왜 이러지? 남편은 나한테 이런 말 한 적 없는데…. 늘 나를 어화둥둥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부드러운 쿠션어를 쓰는 남편이라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단호하게 고쳐 짓고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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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끼! 편협이라니! 어디 하늘 같은 마누라한테 그런 방자한 단어를 쓰느냐!"



내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르렁대자 남편은 워워, 손짓을 내렸다. 일단 진정해. 내 말을 들어봐. 리슨. 그리고 남편은 늦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니, 들어봐. 지금 그게 문제야. 너무 글만 쓰는 거. 너는 지금 네가 글쓰기밖에 못 하는 줄 안다니까? 아니야. 그거. 넌 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아.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해 봐. 너무 그렇게 종일 글만 붙잡고 있지 말고."



남편은 저가 언급한 '편협함'을 이렇게 풀어냈다. 다소 직설적인 단어였으나, 이리 풀어놓고 보니 그럴싸했다. 이것도 사실 남편이 늘 하던 얘기였다. 다른 걸 해 봐. 너무 그것만 하지 말고. 막 너무 글만 그렇게 쓰면 네 마음이 다쳐.



"다희야. 내가 늘 말하잖아. 글만 쓰지 말고, 다른 걸 좀 해보라고. 병행하라고. 그래야 너도 편해."

"하지만 글만 쓰기에도 시간이 없…"

"시간을 만들어."



오들오들 전신이 떨리는 추위에 남편은 볼살을 벌벌 떨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꼿꼿이 유지했다.



글 같은 건 빨리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매일매일 그것만 붙잡지 말고 동시에 다른 걸 해라. 알바 같은 건 안 해도 되니까 학교를 가든가 아니면 취미를 만들든가. 술 마시는 거 취미라고 우기지 말고, 그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운동이나 뜨개질이나 아무튼 삶에 일절 도움이 안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글이 아닌 다른 것 하나라도 좀 해봐라. 제발, 플리즈!



아무리 말해도 들어먹지 않는 황소고집 와이프에게 오늘이야말로 꼭 제 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그의 빳빳한 의지가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지? 갑자기 남편에게 혼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나는 또다시 당황하고 말았으나 한편으로는 어쩐지 마음이 살랑거렸다.



단호한 남편의 모습을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으로 봐서일까? 그의 색다른 면모가 주는 압박이 제법 섹시해 보였던가. 아니면 역시 볼살 턱살 뱃살까지 와르르 떨리는 살인적인 추위가 나의 사고를 마비시켰던가?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다른 일을 좀 해'라는 남편의 익숙한 말이 내 머릿속에 제대로 꽃혀 들었다.



"그럼… 나 전에 해보려던 거, 심리 상담 대학원. 그거 해볼까?"



나의 입술이 쭈물쭈물 열리자 남편의 안색이 곧장 환해졌다.



"그래! 그거 진짜 해보자, 이제. 그거 하면 너 글 쓰는 데도 도움 많이 될걸? 해외에서 석사해도 되고! 사실 그게 베스트지. 내가 다 밀어줄게. 다 도와주고."



심리, 상담이라는 키워드는 언제나 나의 가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였으니 그 역사가 제법 길기도 길었는데, 어째서인지 내 인생은 다른 루트를 열심히 밟게 되었다. 역시 계획하는 대로 결코 흘러가지 않는 인생. 그렇게 꾸깃꾸깃 접힌 채 안쪽 깊숙이 잠들어 있던 꿈이었다. 그리 간절하지는 않았으니 딱히 '꿈'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하긴 하다. 내 확실한 꿈은 분명 '글'이기 때문에.



하지만, 평생 끌고 갈 '글' 외에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면, 그게 건강하고 건전한 라이프를 이끌 수 있는 살길이라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심리상담'이 적격이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늘 글만 쓰기에도 여유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 멀리 미뤄두었던 목표. 이제 진지하게 시작할 때가 되었나?



산책에서 튀어나온 결심은 비단 산책길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한밤중에 공유오피스에 들어가서는 국내외 심리상담대학원, 석사, 자격증 등등을 검색했다. 정보를 좌르륵 정리하니 일단은 '아이엘츠' 점수 만들기와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심리학 선이수과목 수강'부터 우선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메인은 글, 부업은 상담심리.



40세에는 한국 혹은 해외 어딘가에 책방 겸 심리상담소를 오픈하는 작은 꿈이 생겼다. 5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하니 아, 두근두근하다! 해외에서 상담심리 석사를 하게 되면 차후에 한국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까지는 알아보지 않았으나, 어쨌든 새로운 모험길이 하나 열렸다. 오로지 글, 글글글, 글밖에 없던 인생에 갑자기, 그러나 당당히 끼어 들어온 새로운 목표.



"내일부터 진짜, 분배 깔끔하게 해서 이거 준비하는 시간 만들어본다, 내가!"



공유오피스의 커피를 후루룹 마시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새벽 1시 반, 부푼 가슴을 안고 잠들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니나 다를까 내가 또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금까지 내리 글만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다시금 '글이 아닌 다른 일을 하자'는 어제의 다짐을 되새기자는 뜻깊은 마음으로 쓰는 브런치. 이제 이 브런치 글 발행하고 나면 당장 한글 파일을 끄고, 아이엘츠 교재 주문하러 간다.



평생 지속할, 건강한 글쓰기 라이프를 꾸려가기 위해, 으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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