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목+남편 센스=감다살!

by 다롬

얼마 전, 600매 내외 장편소설 하나를 완결 지었다. 시작 날짜를 보니 12월 말, 그러니까 딱 한 달 정도 걸린 셈. 나는 쓰는 속도가 나름 빠른 편이라 보통 이보다는 더 이르게 끝내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었는데, 중간에 몇 가지 일이 겹쳐서 이 원고를 일주일정도 놓아야 했다.



12월 말부터 1월 말까지, 한 달 동안 차곡차곡 분량을 늘려간 원고는 청소년 소설. 사실, '청소년소설' 공모전에 제출할 용으로 만들었기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이건 청소년 소설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으나 기존 청소년 소설과는 몹시 다른 결 같아서 어쩐지 민망스럽다. 문체도 어딘가 영감쟁이스러워 10대들이 뿜어내는 상큼발랄미도 찾아볼 수 없음이다. 청소년소설인 듯 아닌듯한 이 원고는 내내 '가제'를 달고 살았다.



완결을 내고, 공모전에 제출하기 바로 전날까지도 가제.hwp였다. 원래 작품 제목 짓기가 상당히 고난이도라 하지 않나.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말 이 글은 이 제목이 아니면 안 돼! 하는 초반부터 명백한 온 앤 원리 제목이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오르지 않는 이상, 내게 있어서 '제목 짓기'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결국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게 되는 어려운 과제이다.



가제가 제목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혹자는 의문을 품으실 수 있고, 한 달 동안 원고에 붙어있었으니 그만 정이 들어버려 끝까지 인연을 이어가도 되지 않을까? 자문도 가능하겠으나,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에는 어림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정하는 가제는 무척 직관적이기 때문. 보통 주연들 이름으로 정해진다. 단독 주연(ex.김영희)인 경우는 김영희.hwp, 2인 주연(ex.김영희와 박철수)의 경우에는 정직하게 영희와철수.hwp. 고로, 웬만해서는 가제가 곧 제목이 되는 경우가 없다.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은중과 상연, 같은 주연들의 이름 그 자체가 제목이 되는 멋진 작품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이름도 유명세도 대단한 실력도 없는 무명일 뿐인지라 제목에서라도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큽)



그러면 이제, 고통의 '제목 짓기'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 된다. 와라라 장문으로 풀어쓰는 글에는 자신이 있지만, 내용을 함축해야 하는 요약 줄거리나 로그라인 등에 다소 약한 나이기에 제목은 특히 곤란하다. 제목이 무엇인가. 아리따운 표지가 책의 얼굴이라면 책의 제목이라는 건, 한 작품 전체를 대변하는, 작품의 첫인상과 '이걸 한번 읽어 봐 말아' 독자님들의 고민에 결정적인 한방 역할을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책,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모든 콘텐츠의 최전방에서 저마다의 자태를 달고 고객들을 유혹하는 이 '제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 그러니까 나는 더더욱 곤란해지는 것이다.



제목이 그렇게나 중요한데, 과연 내게는 좋고, 예쁘고, 세련되고, 톡톡 튀고, 600매나 되는 이 모든 소설의 내용을 함축하며, 메시지도 잘 드러나고, 내용과 주제와의 묘한 아이러니함을 담으면서도 또 어렵지 않은 간결한 제목을 지을만한 그런 센스가 없다. 개탄스럽다.



글 다 써놨는데! 제목이 없다니.

이야. 이건 진짜 자신 있는데 말이야.

... 이대로 영희와철수.hwp로 가야 하나?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기 직전이었다. 정신이라도 또렷하면 각 잡고 생각이라는 걸 해보겠는데, 그때 나는 공모전 마감에 맞추느라 이틀 동안 원고지 200매 정도를 몰아치듯 쓰고 난 후였던 터라 시야가 흐릿하게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다. 흐릿한 시야에 흐릿한 정신, 완벽한 제목을 떠올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 나는 괴로웠다. 이것만 하면 이제 프린트만 하고 집에 갈 수 있는데. 내일 우체국에 가서 우편 보내면 끝인데. 조금이라도 쉴 수 있는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야속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천정을 뚫을 법한 간절함을 발사한다면 언제나 길은 열리는 법, 내게 반짝이는 작명 능력은 없지만 세상이 내게 보내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아. 제목, 제목. 제목이 안 떠올라. 대체 뭐로 지어야…." 양 손바닥을 삼각형으로 세운 채 고통받고 있으니, 퇴근 후 내가 있는 공유오피스로 달려온 남편이 슬쩍 물었다. "제목 고민해?" 그러고는 턱을 괴고 '흐음-'하는 입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0000"



남편은 툭, 뱉었다. 정말 가볍게, 툭. 고민의 시작부터 그 '0000'을 내놓는 순간까지 불과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순간 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이. 그건 좀.



그러나 나는 일단 고개부터 내저었다. 자동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어쩐지 배우자의 의견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친구 같은 동갑내기 부부'라는 묘한 사이의 종특이 아닐까?) 그러자 남편은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다는 듯 "그래~" 하며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남편과 나 둘만 남은 새벽의 공유오피스, 그 정적 속에서 나의 상념은 무심코 아까 그 단어를 따라가고 있었다. 0000, 0000…. 남편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나온 그 제목은 한글로도, 영문으로도 입에 쫙쫙 달라붙는, 듣자마자 '…어?' 하는 맛있는 단어였다. 그뿐만 아니라 '좋고, 예쁘고, 세련되고, 톡톡 튀고, 600매나 되는 이 모든 소설의 내용을 함축하며, 메시지도 잘 드러나고, 내용과 주제와의 묘한 아이러니함을 담으면서도 또 어렵지 않은 간결한' 제목……이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아, 이럴 수가.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았다.



내 소설의 유일&최초 독자인 남편은 이 원고 절반 이상을 읽은 상태였다. 그는, 첫 장부터 끝장까지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제목을 생각해 낸 것이다. 이번에도.



남편이 이렇게 특출난 '제목 짓기' 센스를 발휘한 건 처음이 아니다. 시작은 나의 첫 책이었다. 원고 수정이 3교로 마무리되는 중, 출판사와 함께 제목 짓기에 골몰했었다. 작가인 나 역시 좋은 아이디어를 잔뜩 내고자 제목 리스트를 나름대로 쫙 뽑았었는데 영 와닿는 게 없었다.





야레야레… 제목 하나 똑바로 못 짓는 나 자신이 미웠다. 그런데 옆에 있던 남편이, 역시 느릇한 숨을 뱉으며 덥석 말했다.



"해외로 도망친 신혼부부? 이런 거 어때."



듣자마자 나는 눈썹을 비스듬히 꺾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뭐? 해외로 도망… 뭐? 아냐. 그건 좀 아니지. 좀 그래. 약간 장난 같잖아. 뭔가 범죄 같기도하고. 해외로 도망친 신혼부부라니… 일단 너무 길고. 아냐 아냐. 젠젠 가능성이 없다우.



그러나 몇 분 뒤….



"음…."



해외로 도망친… 신혼부… 부…? 잠깐, 잠깐만. 이거 꽤괜, 이잖아? 일단 이만한 한 줄 요약도 없을뿐더러 요즘은 긴 제목이 또 유행이라고들 하니까. 여기에 '철없는'을 추가한다면… 더 꽤괜, 이잖아?



그리고 며칠 뒤, 출판사와의 최종 제목 확정을 지은 후 남편 앞에서 손을 번쩍 쳐들었다.



"나의 첫 에세이, 제목을 <해외로 도망친 철없는 신혼부부>로 하기로 한다!"



그에 남편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엥? 별로라며."

"내가?"

"응!"

"그랬나?"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자 남편은 참 우리 와이프 못 말리겠다는 듯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나의 남편은 특출한 작명 센스를 발휘했다. 바로 지난주까지, 벌써 몇 개의 내 원고들에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 청소년소설의 제목을 '0000'로 짓기로 했다니까 남편은 익숙한 반응을 내보였다.



"이거 잘 되면, 나 인세 30%는 줄 거야? 제목 내가 줬잖아."



그에 대해 나는 역시 모르쇠로 일관할 예정이지만, 어쨌든 고마운 마음은 결코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제목, 감다살. 남편이 바람처럼 '잘 되면'까지 바라지는 못해도, 그래도 언젠가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와 '0000' 제목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면 좋겠다.



나만의 제목 요정 남편, 고마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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