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강원동해안 자전거 여행1

정동진해변에서 해안단구를 놓치지 말자

by 도토리
일이 자꾸 꼬일 땐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행동하자

출발부터 삐그덕거린다. 아파트 문을 나서다가 자전거 전조등의 고정장치가 부서지고, 며칠 전부터 극성이던 기침은 멈추지 않는다. 피곤한 탓인지 잇몸도 살짝 부어있다. 아이들이 잠든 밤 9시 25분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섰다. 신호를 어기고 질주하던 승용차와 부딪칠 뻔해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하철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1호차에 타서 장애인용 휠체어를 고정하는 바에 자전거를 고정시키고, 바퀴가 움직이지 않도록 가방을 바퀴 밑에 쑤셔 넣고, 아무도 없는 경로석에 앉아서야 겨우 한숨 돌린다. 나이가 들더니 참 많이 뻔뻔해졌다. 예전 같으면 비어있어도 앉지 않을 경로석에 일단 앉고 본다.


청량리에서 밤 11시 25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동해로 향했다. (이 기차에는 자전거를 고정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 자전거 여행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단 미리 기차표를 예매할 때 자전거 좌석으로 선택해야 한다.) 이번 자전거 여행을 위해 자전거 타이어를 교체하고, 자전거 짐받이와 짐받이용 가방도 구입했다. 하지만 짐이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냥 배낭을 메고 가기로 했다. 그 결정이 나중에 큰 후회로 다가왔다. 기차에서 잠을 자 두어야 할 텐데 옆자리 아저씨의 코고는 소리에 도통 잠 들수가 없다. 가끔 마른 기침이 올라와 보온병에 싸온 따뜻한 유자차를 홀짝거려 본다.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아침 일정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청량리역에서 밤 11시 이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자전거를 싣는다.
기차안에는 자전거를 거치할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01. 해뜨는 동해 추암


새벽 4시쯤 동해역에 도착했다. 오늘 일정은 동해에서 강릉까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다. 이 기차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에 도착할텐데 하는 마음이 나를 유혹했지만, 계획대로 동해역에 자전거를 끌고 내렸다. 고정장치가 부서진 전조등은 역무원 누님께 투명 테이프를 빌려 핸들에 둘둘 감아버렸다.


동해에 내리자마자 걱정이 몰려왔다. 동해 추암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새벽에 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해는 아직 뜨지 않아 주위가 어두워 시야가 불량하다. 특히 시멘트 공장을 비롯한 공업단지가 근처에 있어, 큰 트럭들이 자주 통행하는 곳이다. 그 큰 바퀴에 쥐도새도 모르게 깔릴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왔지만, 출발하는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추암 해수욕장까지 가는 자전거 길은 생각했던 것 만큼 엉망이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공포스러워 진땀까지 났다.


우여곡절 끝에 해뜨기 전에 동해 추암에 도착했다. 추암이라고 하면 잘 모르지만, TV 끝날 때 나오는 애국가에서 해뜨는 곳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 거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평일인데도 일출을 담기 위해 대형 카메라를 이고 오신 분들이 많다. 해돋이보다 해안 지형을 촬영하는 게 우선인 나는 그분들과 자리잡는 위치가 다르다. 그 분들의 사진 중심에는 해가 있지만, 내 사진의 중심은 지형이 있다. (물론 해뜨는 장면이 환상적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내가 이곳에서 살펴 볼 것은 시 스택(sea stack)과 해안 카렌(karren)이다. 시 스택은 파도에 의해 침식된 완만한 파식대지 위에 침식되지 않고 남아있는 바위를 말하는데, 바다(sea)에 있는 돌더미(stack)를 표현한 용어이다. 해 뜨는 모습이 아름다워 촛대바위로 불리는 동해 추암도 대표적인 시 스택이다. 또 이곳에는 물에 약한 석회암이 파도 때문에 침식을 받아 형성된 뾰족한 모양의 바위들(해안 카렌)이 사뭇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하단부가 더 많이 침식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질도를 살펴보면 삼척, 동해 지역은 고생대에 바다에서 만들어진 석회암이 분포하는 지역인데, 여행하다 보면 석회석으로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을 쉽게 볼 수 있다.

주변은 이미 밝아졌는데 해가 예쁘게 떠오르지 않았던 듯 사진 찍는 분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난 무겁게 가지고 간 DSLR 카메라에 에러메시지가 뜨는 바람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조차 없었다. 결국 스마트폰으로 사진 몇장을 찍었을 뿐이다. 여행시작부터 참 안 풀린다.



#02. 일이 꼬일 땐 단순하게


오늘 일진이 좋지 않다. 묵호 등대로 가겠다는 계획은 시원하게 포기했다. 경험 상 일이 안 풀리는 날에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 곧바로 금진해변과 정동진으로 페달을 밟았다. 7번 국도를 따라가보니 지나가는 차들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대형트럭들이 많이 지나가 혼자 자전거 타기가 무서웠다. 결국 샛길로 빠져 얼떨결에 하천 주변에 나있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 다시 동해역으로 돌아왔다. 처음 출발지였던 동해역에서 다시 가야할 길을 점검했다. 스마트폰 지도가 알려 주는 빠른 길이 아니라 무조건 해안 쪽에 있는 좁은 도로로만 달리기로 했다. 비록 거리는 더 멀지만 해안도로 일부 구간에는 자전거길이 나 있고, 자전거길이 없는 곳도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 오히려 자전거를 타기엔 더 좋았다.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모래 해변을 끼고 자전거를 달리니 이제서야 마음이 가벼워지고 여행을 온 듯 하다. 힘들면 그저 해변 소나무 숲 그늘에서 쉬면 된다.



#03. 해안단구의 교과서 '정동진 해변'


정동진하면 시작하는 연인들의 무박 2일 해돋이 기차 여행 코스로 유명하다. 연인과 하룻밤을 기차에서 보내고 새벽에 바다가 보이는 정동진에 도착해 해돋이를 보는 여행이다. 나같은 옛날 사람(?)에겐 고현정과 최민수의 강렬한 연기가 유명했던 드라마의 촬영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해변에서는 손을 꼭 잡고 온 연인들이 맨발로 서성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강릉과 삼척을 왕복하는 관광열차인 '바다열차'도 있는데, 시원하고 큰 창문으로 아름다운 동해바다를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많다. 정동진(正東津)은 조선시대 한양의 광화문 기준으로 정확히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최근 발달한 첨단 측량기술로 측정해보니 실제로는 서울 도봉산의 동쪽이라 한다.) 정동진역은 세계에서 가장 바닷가에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 여행에서 가장 꼼꼼히 보고 싶었던 지형은 아름다운 정동진 해변이 아니다. 바로 정동진과 금진해변 사이에 있는 언덕이다. 이 언덕은 북쪽에 있는 정동진 해변에서도 잘 보이지만, 남쪽에 위치한 금진 해변에서 바라본 이 언덕이 더 전형적이다. '이깟 언덕이 뭐라고 그리 보고 싶으냐?'고 물으실지 모르겠다. 이 언덕이 바로 '해안단구(coastal terrace)'라고 불리는 지형이다. '해안단구'는 말 그대로 해안가에 나타나는 계단모양의 언덕을 말하는데, 과거에 파도에 의해 침식되어 평평해진 파식대지가 (육지가 상승하거나 바닷물이 하강해서, 또는 두가지가 결합되어) 계단처럼 드러나 보이는 해안 언덕을 말한다. 특히 동해는 황해보다 비교적 신생대 제3기말 이후 융기량이 더 많았기 때문에 해안단구를 전형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데, 정동진 해안단구가 바로 교과서같은 곳이다.



고등학교 한국지리 수업시간이면 정동진 해변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오늘 이 수업을 잘 들어야 나중에 대학가서 연애를 잘 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친다. 함께 간 남친(여친)이 정동진 해변 옆으로 길게 보이는 언덕 위의 배(리조트)를 보고 그냥 "와~, 노아의 방주다."라고 말한다면 여행 후 조용히 연락을 끊으라고 조언한다. 한국지리 수업시간에 그렇게 강조해 배우고, 시험에도 단골로 출제되는 해안단구를 모른다면 고등학교 때 공부 안하고 놀았던 게 뻔하다고. 그나마 이런 우스개 소리라도 해줘야 지루한 수업시간을 웃으며 보낼 수 있다. 아무튼 그 정도로 한국지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지형이라는 말이다.



#04. 해안단구로 가는 길


금진해변까지 가는 길은 한적하고 경사가 급하지 않아 자전거 타기가 안성맞춤이다. 금진해변을 지나 심곡항부터는 해안을 따라가던 도로가 급경사의 언덕으로 올라간다. 바로 해안단구의 단구면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해안에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있어 도로를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사가 급해 자존심이 좀 상하지만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서야 겨우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니 넓고 평평한 단구면이 펼쳐진다. 금진해변과 정동진해변 사이에 있는 이 단구면의 해발고도는 70~85m 정도이고, 폭은 800m 이상으로 우리나라 해안단구 중에서 가장 넓다. 넓고 경사가 완만하다보니 이곳에는 농경지와 집, 공원, 모텔, 리조트 등이 눈에 띈다.



#05. 이 언덕이 옛날엔 바다였다고?


그럼 이 언덕 위의 평평한 단구면이 예전에 바다였다고 말하는 근거는 뭘까? 조금만 둘러보면 그 증거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도로 옆에 드러난 흙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둥근 자갈들이 그 증거다. 오래 전 파도에 의해 침식을 받아 동들동글해 진 자갈들이 땅의 융기로 높아진 언덕(해안단구) 위에 여전히 그대로 남은 것들이다. 특히 단구면 위에 지은 배 모양의 리조트에서 정동진역 쪽으로 내려가는 급경사의 절단면에서는 수많은 둥근 자갈들이 붉게 산화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둥근 자갈 하나 하나가 바로 이 땅의 역사다. 경사가 급한 도로가에 겨우 자전거를 세워놓고 보물을 찾은 듯 흥분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보여주려고 그 증거물 하나를 살짝 가방에 담아 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언덕길을 내리달려 정동진 해변으로 향했다.


해안단구의 단구면 위에 있는 리조트

아침도 제대로 안 챙겨먹고 자전거를 달렸다. 목표하던 해안단구를 다 둘러보고 나니 더 허기가 몰려오는 듯 하다. 역무원 아저씨께 먹을 만한 식당을 추천받아 갔더니 예약손님이 많아, 그 옆에 있는 초당두부 식당에서 허겁지겁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로 허리가 아파왔고, 왼쪽 다리 근육도 계속 당겨 빨리 숙소에 가 쉬고 싶어졌다. 아침에 입었던 두꺼운 겉옷을 가방에 쑤셔넣고 숙소가 있는 경포대 방향으로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막 구간에서 다리의 통증은 갈수록 심해지고 자전거의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내 옆으로 다른 라이더들이 보란듯이 휙 지나쳐 간다. 옛날 같으면 오기로라도 따라잡으려 했겠건만 이젠 '내 체력이 이정도겠거니' 하고 쉽게 인정한다. 오죽헌, 경포호와 경포 해수욕장을 지나 오후 3시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방을 배정받고 간단히 샤워를 한 후 바로 곯아 떨어져 3시간 쯤 꿀잠을 잤다.



#06. 색깔있는 게스트하우스


서로 모르는 손님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삼겹살 파티를 했다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난생 처음으로 방문했다. 제주도 올레길 주변에 게스트 하우스가 생긴 이래로 요즘 관광지 주변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특히 자기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진 곳들이 많아 젊은이들과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단다.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서 지낸다는 건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꼭 한번 체험해 보고 싶어 2박 모두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했다. 물론 숙박비가 저렴하다는 것도 선택에 큰 몫을 했다. 강릉에서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는 머무르는 손님들을 위한 저녁 삼겹살 파티로 유명한 곳이다. 별명이 '두목'인 주인장이 큰 불판에 고기를 구워주고, 손님들은 편안하게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군대 가기 전 20일을 앞두고 온 21살의 풋풋한 대학 1학년생,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로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청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살다 한국으로 여행 와 이곳에 이틀간 머물고 계시다는 맑고 명랑한 이모님, 걷기를 좋아해 매년 걷는 여행을 한다는 50대의 여고 동창생 2분, 그리고 나, 이렇게 불판 주위에 모여서 이런 저런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2차로 주문진 항에서 사온 골벵이와 술들이 나오고, 늦게 오신 다른 손님까지 합류해 분위기가 새로워졌다. 대학시절부터 술자리 모임을 좋아하지 않아 겉돌았었는데, 나이가 드니 이런 만남에도 당황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본다. 나는 내일 여행을 위해 11시쯤 조용히 빠져나왔지만, 새벽까지 모임이 이어졌다는 후문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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