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상업 시설과 최소 요구치, 재화와 서비스의 도달범위
서울에서 살 때는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참 편리했다. (편리한 것이 좋기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걸어갈 수 있는 지척에 상설 시장과 한살림 생협이 있어 자주 이용했다. 차를 타고 10분 거리엔 대형마트, 조금만 더 나가면 백화점이 있었다. 갑자기 밤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을 땐 아파트 문 앞을 나서면 서너 개의 편의점들이 24시간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제주, 그것도 해발고도 300미터 정도에 이르는 중산간 지역에 살다 보니 간단한 식료품을 구입하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쁘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바나나 우유 하나 먹고 싶어도 근처에서는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인구가 적은 중산간 마을에서는 가게를 운영하기 위한 ‘최소 요구치’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 요구치’란 어떤 가게(중심지)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수요 수준을 말한다. 인구가 많지 않은 중산간 지역에서 최소한의 수요 수준을 만족시키려면 먼 곳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와야 할 텐데,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자고 10여km를 자동차로 움직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에는 아직 백화점이 없다. 그 이유 역시 큰 건물과 화려한 매장에서 고급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요 수준을 창출해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안 섰기 때문이리라.
백화점은‘돈이 될 만한’곳에 들어서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문제는‘돈이 될 하다’는 기준. 과거에는‘점포 한 곳당 배후 인구 60만~70만 명 이상’이 불문율이었다. 백화점 상권 범위는 점포 한 곳당 반경3~5㎞를 기본으로 한다. 이 안에 적어도60만~7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해야 백화점 점포 한 곳이 들어설 만하단 얘기다.
(출처 : 중앙일보 2010년1월 5일, Special Knowledge <118> 백화점 입점 요건)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제주 인구가 약 70만(제주시 50만, 서귀포시20만)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백화점 업계의 불문율을 기준으로 보면 제주시는 도심으로부터 3~5km 미터 이내에 60~70만명의 배후 인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제주시의 인구가 50만명 정도로이 기준에 근접하기 했지만, 제주도의 면적이 서울보다 3배 정도 넓어 인구 밀집도는 떨어진다.
최근 제주에 백화점이 들어선 것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돈과 사람들이 제주로 몰리면서 곳곳에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이 세워지고, 고급 외제차 전시장도 즐비하다. 자연 환경이 아름다워 관광객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면세점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백화점의 수요가 아직은 충분하지 못하다고 업계에선 분석하고 있는 듯 하다.
대형마트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신흥 중심지인 노형동에 주로 몰려 있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 그곳에 가려면 20km가 넘어 자동차를 이용한 시간 거리로도 40분 이상이 걸린다. 이렇게 재화나 서비스를 얻기 위해 도달해야 하는 거리가 너무 멀어 쉽게 움직일 수 없다. 물론 서울에서도 대형마트를 거의 이용하지 않긴 했다.
제주도로 내려 온 이 후 우리가족은 이렇게 물건을 구입한다. 다행히 평소 이용하던 한살림 생협이 일주일에 한번 배달을 해 주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주문해 물건을 받는다. 매장은 수요가 많은 노형동에 있어 쉽게 갈 순 없지만, 온라인 주문의 경우 공간적인 제약이 사라지고 운송비 또한 절약된다.
그럼에도 갑자기 손님이 오거나 필요한 물건들이 생기면 평소 메모해 두었다가, 일주일에 한번 정도 10km거리(시간 거리로는 25분 정도)에 있는 함덕이나 봉개동으로 나가야 물건을 구입한다. 제주도는 농업이 활발한 곳이 농협이 운영하는 마트가 지역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 곳에 가면 아파트나 빌라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 만큼 인구가 몰려있는 곳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급자족일텐데, 아직 텃밭 농사가 서툴러 제대로 되는게 없다. 어떤 시기에 어떤 작물들을 심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텃밭에는 배추, 쪽파, 당근, 브로컬리, 비트 등을 심어 놓았는데 제대로 수확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1년 정도는 지나야 어느정도 감이 잡힐 듯 하다. 그 동안은 멀리있는 시장을 의지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