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세상

2025. 04. 12

by 도토리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은 이제야 공부라는 걸 좀 해보겠다며 주말마다 영어 학원을 다닌다. 중산간 마을에서 제주 시내에 있는 학원까지 가려면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주말엔 승용차로 데려다준다. 딸이 수업을 듣는 시간은 2시간 정도인데, 날씨가 좋을 때는 끝나고 알아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오늘처럼 비와 강풍이 부는 궂은날이면 딸바보는 결국 기다려서 모셔온다.


보통 기다리는 시간 동안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켜놓고 뭔가를 끄적이곤 했다.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 번 앉아있으려니 지겹기도 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괜스레 주지도 않은 눈치가 보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커피값이 비싸기도 하고.


그래서 새롭게 찾은 대안이 바로 목욕탕이다. 커피 한 잔 값인 6천 원으로 2시간 내내 신나게 물에서 놀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매번 가는 목욕탕에는 20미터나 되는 해수냉탕이 있어 헤엄치는 재미도 있고, 가스비가 아까워서 집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따뜻한 물도 펑펑 나온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긴장해 있던 몸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느낌이다. 카페에서 커피잔에 담아 제공하는 300ml 정도의 물의 양보다 수 만 배나 많은 물을 이용할 수 있으니 본전 생각보다는 너무 물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되레 미안해질 지경이다.

나의 ‘목욕탕행’을 가장 반기는 이는 바로 아내다. 평소 물을 아낀다는 구차한 핑계로 샤워를 잘하지 않는 남편에게 냄새난다며 갖은 구박과 핀잔을 줬던 그녀는 요즘은 내가 목욕탕에서 바르고 온 강한 로션향을 맡으며 예전 복장검사를 하던 선생님처럼 ‘잘했어’하는 표정으로 만족해한다.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목욕탕은 좀 신기한 공간이다. 인간들이 자신을 그토록 소중히 포장하던 옷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던지는 탈의 의식을 거친 후, 하얀 수증기가 훅 끼쳐오는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왕궁이나 큰 절에도 들어가는 초입에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주는 물길인 해자(垓子)를 건너가지 않던가?


그렇게 힘껏 밀고 들어간 그 공간에는 그토록 많은 민초들이 꿈꾸던 평등세상이 펼쳐진다.


여기서는 누가 부자이고 가난한지 따위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알 수 없으니 비교기준이 되지 못한다. 물론 부자들이 우리와 함께 때가 둥둥 떠다니는 온수탕에 몸을 담글 확률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겠지만! 암튼 이곳에서 작동하는 비교기준은 그저 탄탄한 몸매를 가진 상남자의 도도한 자태 정도이니, 그 정도는 세상에 판치는 극단적 자본주의에 비할 바 없는 애교 정도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이런 헛된 생각들을 하며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금세 딸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된다.


74번 사물함에서 옷을 꺼내 입고 다시 학원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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