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오니 부엌에 초파리들이 윙윙 날아다닌다. 싱크대 안에 겨우내 보관해 두었던 묵나물에서 나온 걸까? 참지 못하고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녀석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죄책감을 덜어보고자 “미안하다. 미안해.” 용서를 빌면서.
‘겨우 하루 정도 사는 초파리들을 왜 죽였냐?’라고 따져 물으신다면 주절주절 변명하겠지만 실은 귀찮아서다. 내 눈앞에 어른거려서 죽은 거다. 화장실에서 갑자기 기어 나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리마도 죽였다. 가족들은 다들 무서워해서 매번 내가 죽이게 된다. 지네처럼 발이 많지만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정도로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발이 너무 많아 놀라서 죽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잔인하다.
생명의 죽음에 뭔가 큰 대의가 있을 것 같지만 큰 존재의 귀찮음과 놀람이라는 이유로 작은 존재는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초파리와 그리마는 인간들이 왜 자신들을 죽이는지 평생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큰 존재를 그저 귀찮게 하거나 놀라게 했다고 죽임을 당한다는 걸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초파리와 나의 삶은 서로 다른 구석이 있는가?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허무함이 훅 덮쳐온다.
삶의 허망함을 인정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허망함은 존재 자체를 힘겹게 만든다. 그래서 어쩌다 살아남은 우리들은 다른 이의 죽음(삶)에서 차원을 뛰어넘는 큰 존재(신)의 뜻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죽음의 합당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애씀’이라는 그 행위 자체야말로 이 허망한 삶을 살아갈 이유가 된다는 걸 일찍부터 인간들은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종교가 되고, 가치가 되고, 이념이 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라고 보기 힘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움직임)을 통해, 인간들은 역설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유지해 온 게 아닐까? 기왕 그런 비합리적 움직임 없이는 삶을 유지하기 힘든 존재라면, 나와 친구들을 파괴하는 것보다 웃게 만드는 신나는 움직임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시시각각 애쓰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고는 이 허무의 무게를 이겨낼 방도가 없다.
그저 신나게 춤추지 않고는….
허무함이 봄비처럼 내리는 4월
이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천국에서 흥겹게 탱고를 추고 계실
프란치시코 교황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금 한라산을 넘은 거친물결구름이 우울함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