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닻

제1장 _ 자기혐오 (Ⅰ)

by 노하윤

한겨울이었다. 10년쯤 전이었나? 처음으로 혼자 살았던 방은 조그맣고 오래된 채소가게 위층이었다. 30년도 더 된 상가건물이라 들었다. 외벽에 자잘하게 금이 간 부분마다 시멘트를 우겨 바른 티가 나는, 그야말로 촌스럽고 칙칙한 건물이었다.

가게 옆에 달라붙은 유리문은 구닥다리같이 탁한 청색이었고 오래된 경첩은 녹슬었다. 있는 힘껏 밀고 들어가 퀴퀴하고 좁은 시멘트 계단을 한 층 올라야 내 집이었다. 계단은 매우 가팔랐고 경사진 천장은 낮았다. 그래서 내려올 때마다 이마를 다칠까 늘 조심해야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 귀가해서는 짜증 나는 하루에 분해서 구시렁대며 녹슨 경첩에 무겁게 달린 유리문을 열었다. 내게 서운한 소리를 하던 어떤 ‘빌어먹을 놈’을 욕하다가도, 내가 한 한심한 짓들이 그 생각을 밀어버리고서 머리를 부끄러움으로 채운다. 파도가 파도를 삼키듯 생각이 밀려들었다.

곰팡내 나는 잿빛 계단은 오를 때마다 서늘했다. 그러나 철로 된 문고리를 힘겹게 돌려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미리 켜둔 보일러 덕에 방이 잘 데워져 있었다. 쓰고 있던 안경에 김이 잔뜩 서려 어둑한 방이 내 발밑까지 좁혀졌다. 현관 등에 의지해 벽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았다.

형광등이 두세 번 깜빡거리다가 켜졌다. 현관문을 열면 왼편으론 부엌과 그 너머 조그만 화장실이 보이고, 오른편엔 거실 겸 안방으로 통하는 큰 미닫이가 있었다. 안방 등은 그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 오른쪽 벽으로 손을 뻗어야 찾을 수 있었다. 중간에 침대가 있기 때문이다.

김서린 안경을 대충 문지르고 미닫이를 열었다. 그 너머 반대편 창까진 내 그림자가 닿지를 않고, 양측 벽은 내 어깨에 닿을 듯 좁은 길쭉이 방이었다. 희뿌연 창을 물들인 가로등 붉은빛이 비스듬히 누런 벽지를 적시자, 창 바로 아래가 더 새까맣다. 꼴에 높은 층고 탓에 찝찝한 웃풍이 이마와 뺨에 들러붙었다.

추위로 벌겋게 거칠어진 손으로 검은 미닫이를 열었던 그날, 붉은 창 아래 그늘진 바닥에 뭔가가 숨었다. 이물감을 내뿜는 더 까만 물체가 지저분한 안경 너머로 실 같은 더듬이를 씰룩거리는데 그것과 나 사이엔 고작 내 그림자뿐이었다. 부엌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진 내 머리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소름 돋고 분하다. 건방진 놈이다. 불을 켜면 달아날까 가만히 노려보며 잡을 기회를 엿봤다.

저 살아있다는 표식에 나는 전율한다. 그때뿐일까? 저것을 놓치면 그 공간으로 꿰인 며칠이 다 같이 찝찝해질 것이다. 나와 내 방의 하자가 되어 내일이나 모레, 어쩌면 그 너머까지도 욕보일 것이다. 얼추 보아도 내 엄지손가락보다 살짝 컸다. 그것이 달아나선 안 된다.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위협적인 자태를 보라. 만일 내게서 살아남는다면 그때부터 방의 느낌은 달라질 것이다. 구역질이 나도록 내 목구멍을 간질이는 것 같아 침도 삼키지 않았다. 그것을 내 공간의 현재에서는 물론 미래에서까지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혐오감은 대상을 피하고 치우며 없애게 만든다. 그것의 적개심은 훨씬 근본적이고 그 다양한 양상은 강도의 차이일 뿐이다. 바퀴벌레 따위를 증오한다고 하지 않는다. 어떤 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느껴진다. 저것이 단지 징그럽고 더러우며 흉측하고 위험해 보일 뿐이라서, 단지 그 이유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아니면 아주 없애버리려 한다.

거창한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나 자신을 깨끗이 하려고. 그러나 그 ‘나 자신’이라는 말이 깔고 앉은 영역이 자꾸만 넓어진다. 처음엔 내 옹졸한 마음 한구석이었다가 어느새 내 몸이 닿는 모든 것에서 내 이름이 얽힌 모든 것으로 뻗어나간다.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 그런다. 저 발 빠른 벌레를 보면서 난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튀어나오지만 않았어도 다 괜찮았을 것인데. 아마 녀석도 나랑 마주칠 계획은 애당초 없었겠지. 정면으로 마주친 적이 없는 걸 보면.

항상 어딘가를 급히 가다가 들킨 것처럼 그 불쾌한 옆모습을 훤히 보여주는 걸 보자. 뾰족한 털이 난 다리와 검게 번들거리는 등을 보이며 마치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지 않은가? 그 삐죽한 다리로 달아날까, 시궁창을 뒹군 날개를 갑자기 펼쳐 날아다닐까 겁을 먹는다. 나를 곁눈질할 그 역겹고 작은 눈깔들을 지져버리고 싶어 지면서도 옳게 처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아주 짧지만 본원적인 무언가가 들끓었다. 감히 내 세계의 순결을 어지럽힌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밝은 부엌을 등지고서 열린 미닫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그 벌레를 노려보고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른편엔 눅눅한 침대가 있고 왼편엔 빛바랜 책상이 있다. 지난여름에 귀뚜라미가 그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울어대서 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 그 귀뚜라미를 무엇으로 없앴더라? 맞다. 왼쪽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장난감 총이 있다. 말 안 듣는 늦둥이 동생 녀석을 두들기고 빌려온 물건이었다. 전역 전 가스총으로 손바닥만 한 나방을 기가 막히게 잡던 간부가 떠올라 하나 장만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냥에 관한 설화가 하나 있다. 고대 중국에 장주(莊周)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살림이 넉넉지 않아 사냥을 나섰다. 그런데 당시에 사냥터란 왕의 사유지였기에 잘못했다간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배가 고팠던 그는 기어코 석궁을 들고 몰래 왕의 사냥터로 향했다.

배회하던 장주는 멀리서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까마귀를 발견했다. 크고 요상하게 생겼다는 그 까마귀를 조준하며 살펴보니 녀석도 사냥을 하던 모양이었다. 과연 까마귀가 노려보던 곳엔 까마귀처럼 한눈을 팔고 있는 사마귀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사마귀 또한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또 자세히 보니 사마귀도 나무에 붙은 매미를 노리는 게 아닌가? 매미는 수액에 취해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장주는 돌연 깨닫는다. “아! 모든 것이 연루(連累)되어 있구나!” 그리고는 배고픔도 잊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후에 그를 찾아온 누가 그에게 알려주더란다. 장주가 사냥터를 몰래 들어간 그날, 사냥터지기가 그를 발견하고는 감시 중이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그는 당분간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자신의 경험을 반추했다. “모든 것이 그리 연루되어 자신에게 닥칠 화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사물이 변화되는 원리구나!”

왜 하필 ‘연루(連累)’인가? ‘연결’이나 ‘연관’, ‘인과’ 같은 말도 있는데 말이다. 이 말은 그저 맺어져 있다거나 연이어 있음을 중립적으로 나타내는 게 아니다. 이 말엔 타의에 의해 지워진 굴레의 무게가 있다. 즉 서로 모르게 얽혀있는 어떤 구조의 표현이며, 단지 생태적인 관계망을 넘어서 일상을 인간답게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무의식에 드리운 책임의 비가시적 형식이다. 이 말은 공존이나 공감을 위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대한 공포와 연민의 탄식이다.

사물이 연루되어 있다는 말은 존재함이 단순히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 세상 한가운데 ‘엉켜 있는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연루됨은 윤리적 조건에 선행하는 실존적 전제다.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의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은 상징이 아니다. 세계는 무겁고 버겁다. 그것이 바로 보편 된 연루의 정서다. 그래서 나와 저 벌레는 구별되되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타자를 피해 독립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도 끝없이 타자를 파괴하거나 제거하고 싶은 충동에 잠식되는 게 아닐까? 이웃한 것들을 멀리 밀어낼 수도, 안 보이게 치울 수도 없으니 모두 지워버리고 자신만의 질서로 역사를 다시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벌레인가? 아니면 벌레가 나인가?

벌레가 벌레를 잡고자 한다. 그것과의 거리가 대략 4미터 정도 되므로 잘만 하면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심해야 했다. 자칫 큰 소리가 나면 그것이 도망갈 테고, 설령 조용히 총을 잘 꺼내 장전하더라도 너무 정확히 맞추면 벌레가 터져버릴지 모른다. 나는 감행했다. 조심히 몸을 왼편으로 숙여 두 번째 서랍을 열고 총을 꺼내 한 발을 장전했다. 어둑했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부엌에서 흘러드는 빛으로 분간이 어렵지 않았다. 조준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BB탄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녀석의 꽁무니를 맞췄다. 배가 반쯤 날아가고 뒷다리를 질질 끄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레고르, 미안하지만 내 총알은 네 아버지가 던진 사과보다 살짝 더 아플 거야.’ 난 총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휴지를 잔뜩 뜯어다 벌레에게 다가갔다. 앞에 붙은 두 개의 다리로 기어간다. 어쩌면 저 밖에서 나도 저와 같은 모양일까? 순간 생각했다. 아침 해가 뜨고 철문을 나서면서 사방에 각질을 흘리고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멈춰버린 공간에서 어제로 던져버릴 그 허물을 벗겨내려 책상 앞에 앉았던 시간을 이젠 벌레 잡는 데나 써버리는 것이다.

과거라는 휴지통은 이미 포화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지나가는 현재의 옆모습을 역겹다는 듯이 노려본다. 바로 저 해로운 것을 구제(驅除) 해야 한다. 내 마음은 이미 내일로 달아날 태세다. 아니면 그곳이 아닌 다른 장소로 가거나 아예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고 싶은 정동에 나를 맡긴다.

마음이 존재의 빛나는 구멍을 틀어막아 일상에 그늘을 덧칠했다. 그것은 일종의 기호로서, 아기들이 가지고 물고 빠는 고무로 된 알파벳 장난감 같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휴지로 덮고 둘둘 말아 화장실로 가져갔다. 형광등 불빛이 밝게 새어 나온다. 허연 변기와 욕실 타일은 뿌연 물때투성이다. 거무튀튀한 줄눈이 시꺼먼 쇠창살처럼 그어졌다.

불쌍한 그레고르. 그렇게 휴지에 싸여 변기 속으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그러나 그의 소외가 보여주는 부당함은 그 궁상맞았던 일상과 데칼코마니다. 어쩌면 그를 둘러싼 휴지는 자신을 부정한 채 몰래 숨죽여 찢어버렸을지 모를 그의 일기장이 아닐까? 그의 자기혐오가 너무 전형적이어서 결국 나락의 웅덩이에 몸이 던져지고야 만 것일까? 스스로에게 너무도 가혹해져 마침내 그 더러운 바닥에 배를 끌게 돼버린 것은 아닐까? 그에겐 황금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복을 바라며 ‘네가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해주라’는 율법을 따르더라도 정작 스스로 원하는 바가 그 자신에게 가장 유독(有毒)했던 때문이다.

바퀴벌레를 감싼 휴지가 변기 안에서 천천히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때까지도 서운함과 수치심이 교차하는 마음에 잠시 멍해져 있었다. 나도 늘 이타적으로 살려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엉망진창이다. 내가 부족한가 하염없이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개 한 마리를 쫓아다닌다.

어쩌면 이기심이 이타심의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애써 고르고 고른 선행이 진정 누굴 위한 것인지, 그리고 설령 남을 위한 것일지라도 실제로 좋은 결과까지 낳을지는 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게다가 내가 실질적으로 아끼는 이들은 결국 몇몇일 뿐이다. 그러면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이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하기 딱 좋은 영역이 생긴다. 고로 그런 이분법은 조금 내려놓는 게 나아 보인다.

나도 너무 바쁘게만 살아온 탓일까? 나는 여태껏 나 자신을 잘못 해석하고 규정지어 왔으나 오류를 시정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다 늦은 겨울 저녁에 그 해석과 규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그러나 바쁜 삶에서 그 일을 사려 깊게 하기는 쉽지 않았다.

치열하게 살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도 함부로 하기 쉬워진다. 왜 그럴까? 드라마 속에는 종종 그런 부모가 나온다. 한 여자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신붓감을 데려온 아들을 나무란다. 아들이 항변하자 그 여자가 대뜸 나무라는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러면 아들이 대답한다. “누가 언제 그래 달랬어요?” 이런 부류의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헌신했을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 자식의 혐오스러워하는 눈길을 받는다.

그런 이들은 타인을 위해 워낙 되는 대로 살아서 조약돌 마냥 모난 곳 하나 없이 자잘하게 닳아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어떤 바위에서 떨어져 나왔는지도 알 수 없어져서 자기 이해에 애를 먹다가, 이내 포기해 버린다. 심지어 갑자기 자기를 마주하고 설 때면 소름 돋고 민망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둥글어진 개성이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 유치하고 무자비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난 곳이야말로 애정 어린 태도로 보존된 개성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