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닻

제1장 _ 자기혐오 (Ⅱ)

by 노하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속된 말로, ‘갈아 넣는’ 데 특별한 낭만을 가지고 있다. 고행과 희망을 결부시켜 천국은 물론 일상의 뿌듯함까지 챙기려는 욕심이다. 싫다고, 힘들다고 푸념하지만, 그런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곧장 나락에 떨어질 것처럼 불안해한다.

그러나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자신과의 드잡이질에도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게 나 자신을 책임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건 밥벌이 이상의 책임, 나와 세계를 한 걸음씩 전진하게 하는 책임이다. 그러나 머리로 알고서도 여전히 마음에서 벌레 한 마리와 씨름하고 있다. 그것을 잡으려 치켜든 손바닥은 어느새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

예컨대 그레고르는 스스로 제단에 가로누워 희생을 욕망하며 가족의 행복을 바랐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바퀴벌레 따위가 주변인들을 위해 무얼 해야겠는가? 소설 속에서 여동생이 일갈한다. 그것이 정말로 그녀의 다정한 오빠였다면 이미 자신들을 위해 떠났을 거라고. 그런 흉측한 몰골로 자신들의 일상을 위협하며 구차하게 살아있지 않았으리라고.

그러나 그런 타인의 태도엔 자기를 혐오하고 몰각한 주체의 그림자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자기혐오는 단순히 나에 대해, 그리고 남들과의 관계에 관해 멋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다. 마치 타성에 젖어 되는대로 살았던 순간들이 모여 하수구에 쌓인 오물과 같다. 매 순간 분열의 감각에 시달리다가 존재의 바깥은 모두 적개심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차버리고, 자신을 과거로 무한히 폐기하며 오지도 않은 미래나 혹은 자기만의 방으로 도망친다.

나는 다시 화장실에서 정신을 차렸다. 물을 내리길 주저하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휴지가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걸 본 뒤에야 물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아무튼 그것이 내 공간에서 축출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제야 다시 어둑한 거실로 돌아갔다.

방에 불을 켜는 걸 잊고서 아끼는 안락의자에 주저앉았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켰다가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껐다. 창밖이 여전히 불그스름했다. 침투하는 가로등 불빛이 눅눅한 벽지에 쏟아진다. 방은 본래의 순결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하루를 돌아보면 그 방에 사는 나의 허물은 여전하다. 내 방에서조차 어떤 이물감을 느끼며 공간은 여전히 순결함을 요구받는다. 변기에 들어갈 것들이 내 안에도 아직 많이 남아있었던 까닭이다. 머릿속이 여전히 복잡했다.

난 그렇게 자기혐오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것은 모순적이다. 그 불가능한 거리감은 내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떼어내려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 칼을 받아 잘려 나갈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다만 그런 구분을 실제로 열심히 하는 일은 없다. 냉큼 일어나 달아나려고 안달할 뿐이다.

말하자면 빈한한 공간에 결벽증에 걸린 영혼이 살고 있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찌르고 자르곤 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며 이루고자 하는 청결함의 강박은 의외로 일상을 수중에 두고 통제한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러나 밖을 나갈 때도 자신을 찌르고 자르던 칼을 늘 쥐고 있다는 사실은 깜빡한다. 사실은 남들도 그걸 보고서 나처럼 전율한 것이다. 그런데 일상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그런 습관을 그 뿌리까지 추적하면 결국 어린 나와 마주한다.

어릴 적엔 맞는 일이 흔했다. 나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부조리하게 맞는 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맞는 일 자체가 부조리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맞는 이유와 맞았다는 결과가 부당히 얽힌 경우다.

7살 때쯤이었던 어느 날 비포장도로를 걷다가 넘어져 무릎이 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께 왜 다쳤냐고 혼나고 뺨을 맞았다. 물론 상처에 반창고 하나도 붙이지 못해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사람은 시간과 체력을 아끼는 동물이다. 그 후로 난 밖에서 혹여 다치면 절대 말하지 않았다. 몸만 다치면 됐지 마음마저 다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폭력은 반복된다. 그것은 생각을 멈추고 입을 틀어막는 대신 손과 발을 뻗어 표현하는 일이다. 사람은 시간과 체력을 아끼는 동물이다. 누군가로부터 사려 깊은 말 대신 폭력으로 무언가를 배웠다면 그 사람은 그 방식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 배움의 본질에 상관없이 교육자의 의지가 ‘있는 그대로’ 관철되었음을 확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자기혐오를 조장함으로써 가르침에 쐐기를 박는다. 남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거나 가스라이팅만 하면 상대방이 내적으로 자신을 부정하여 예측 불가능한 자유의 여지를 스스로 가지 치게 만든다.

당시 내가 살던 지방에선 사람들이 도시로 유출돼 학교에 아이들이 없어지던 시기였다. 나도 9살 때부터 동급생 없이 혼자 학교에 다녔는데, 저학년은 한두 사람뿐이고 고학년만 많았다. 덕분에 3학년이 될 무렵 5·6학년 선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돈을 빼앗고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옆 마을에 살았던 그들은 그 동네에서 나름 평범한 축이었다. 그 동네 아이들은 9살이면 으레 흡연하고 술도 먹었다. 개울이 흐르는 굴다리에 끌려갔을 땐 알몸으로 애정행각을 벌이던 그 동네 아이들을 죄다 볼 수 있었다. 그런 에덴동산이라면 뱀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루는 조막손으로 막걸리 시중을 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사당 같았는데, 주변에 대나무가 워낙 울창해서 축축하고 아주 추웠다. 눈이 녹지 않아 군데군데 남아있던 시멘트 마당이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 수도 없는 곳이었다.

그들은 절대 얼굴을 때리지 않았다. 언제나 옷으로 가려지는 부분만 때렸다. 둔부에 피멍이 든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당시에는 교사들의 체벌도 많아 설령 들켜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 선배들은 내게 술과 담배를 강권한 적이 없었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술과 담배가 귀했기 때문이다. 나도 배울 생각이 없었다. 매일 밤 방 안에서 담배를 태우시는 아버지 덕에 흥미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11살이 된 해 여름까지 이어졌다. 그 상황이 발각된 건 내가 침울해 보이거나 아파 보여서가 아니라 빼앗긴 돈이 너무 많아져서였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들킨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둑한 오후였다. 난 발에 차이며 마당을 뒹굴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날 탓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뭘 어찌해야 했을지 모르겠다. 선배들이 결국 어른들에게 검거된 뒤 당시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 점잖게 물으셨다. “왜 말을 안 했니?”

그리고 난 서울로 보내져 큰집에 더부살이했다. 다행히도 대도시엔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 참 많았다. 비록 얹혀살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이라고 내게 더 살가운 것도 아니었고, 문제아 취급을 당하긴 했어도 그전에 비하면 나쁠 게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그 선배들처럼 변해버린 탓에 다시 쫓겨났다. 4년 만이었다.

그러나 단죄와 뉘우침의 순간은 언젠가 오고야 만다. 비겁하고 옹졸했던 아이가 나르키소스를 비추던 수면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고야 말면 마침내 그의 삶 전체가 가라앉는다. 방은 못질한 관이며 고독은 처벌의 일부다. 그리고 그 세계에 굳이 발을 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에 관한 생각은 신중히 다뤘어야 했다. 인간 본성을 함부로 재단하면 결국 자신에게 더 큰 죄를 짓고 만다. 그게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함부로 단정하는 건 섣부른 짓이다. 자신을 비하한다고 더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자신을 비난한다고 책임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걸, 자신을 혐오한다고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만 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 끝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마음에 소외를 되레 마땅히 여기는 외톨이다. 이 사람은 고독이 제아무리 힘겨워도 남들 앞에서 수치심을 견디기보단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무도 말 걸지 않고 찾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바퀴벌레처럼 숨어 지낸다. 밖을 나서면 나도 그 벌레처럼 급히 걸으며 주변을 곁눈질하리라. 그를 비추는 것들로부터 잽싸게 달아나는 모습이 영락없었다. 불분명한 불안감과 수치심이 어린 날에 슬어 구더기처럼 파먹는다.

그 시간이 그때의 나를 더 선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런 순간이 겹겹이 쌓일수록 내 세계는 점차 좁아지며 다시금 문밖에 있는 세상을 향한 적개심을 키웠을 뿐이다. 그렇게 내 안에서 실수를 일으켰던 정동의 힘은 세상의 변천과 더불어 버겁게 나를 짓누른다.

그러나 그 힘은 또한 내 이웃들이 지고 있을 삶의 무게도 헤아리게 도와주지 않았던가? 물론 모든 과오에 정당성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경우가 다르다. 나의 경험으로 남들의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 결국 남들의 실수를 이해할 때도 그 입장을 깊이 들여다봐야만 한다. 피레네산맥의 이편과 저편의 정의(正義)가 다르듯 그때그때의 배경이나 맥락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구의 내일이든 미래는 현재의 소유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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