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닻

제1장 _ 자기혐오 (Ⅲ)

by 노하윤

거센 바람이 불면 더 큰 날개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더 자주 그리고 강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본성들 덕에 우린 자신을 날로 알아간다. 자유의 미묘한 의미가 나이를 먹어가며 경계가 모호하면서도 색은 선명한 무지개처럼 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본성은 변화무쌍하지만, 속속들이 겪어볼 가치가 있다.

집에 숨어만 있던 그때의 나도 집 밖을 나서면 멀쩡한 척하며 이웃이나 친구들과 평범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현실 속 선악의 협곡에서 외줄 타는 일을 대개 잘 해낸다. 그런데 우리가 그 문제에 현명히 대처할 수 있는 까닭도 양 날개를 띄우는 대기처럼 미리 주어진 본성 덕분이다.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나는 자신을 다스리기 더 쉬웠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자신의 고장 난 부분을 살피고 고치도록 북돋는다. 즉 본능에 속하여 우리를 매번 찝찝하게 하는 물때 같은 욕구들조차도 순수한 선행을 걸러내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참회와 개심의 과정은 가닥가닥 실을 자아내듯 생각과 말, 행동을 새로 뽑아낸다. 그리고 경험의 좁은 구석을 벗어나려고 다른 재료를 찾게 된다. 그럼으로써 어제와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이어 나간다. 무의식을 들먹이며 무언가가 실제로 결정되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전혀 알 수 없는 우리에겐 무의미한 이야기다. 오히려 그것을 더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기 위해 애써야 할 이유가 될 뿐이다.

사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기적으로 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관점이 도리어 이타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 문제는 보기보다 훨씬 미묘하다. 어쩌면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예지적인 존재로서 사물의 변화를 미리 감지하는 힘이 있다. 덕분에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상상을 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돌이켜보며 그때가 좋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나날이 쌓여 어느새 새로운 색감의 경험이 생기며, 그로부터 희망의 가설은 준칙이 되고 경험은 경이가 된다.

자기혐오에 빠져 나를 가둔다는 건 내 안의 세계도 쪼그라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연접(連接)한 세계가 고작 방 하나에 불과하던 시절은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방구석구석 내 자취가 묻어있다. 그러면서 눈이 녹으며 물이 샌 천장에 검은 얼룩에서 나는 곰팡내가 내 몸에도 밴다. 배워서 알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기에 관성에 맡겨 함부로 한 생각들이 다시금 내 마음에 기괴한 구조물로 서 있다. 믿음이란 그런 곰팡내 나는 구조물이다.

그것은 나를 암묵적으로 조종하며 인생의 향방에까지 영향을 준다. 아주 허무맹랑한 게 아닌 한 무얼 믿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어찌 됐든 난 바퀴벌레를 잡고서 이제 그 방에 벌레가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 한구석이나 침대 밑, 불그스름한 가로등이 으스스한 창밖의 안전 따위에 관해 무슨 지식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런 어둠 앞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것은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흐리멍덩한 믿음뿐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러한 믿음의 나무가 제대로 크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불신이다. 그런 상태에서 불안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그런 경험을 여럿 해보면 사실의 부존재나 불확정성이 불안을 초래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불성립이 불안을 초래한다. 그래서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든 조리(條理) 있는 믿음 체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삶을 안정시키는 닻이 되기 때문이다.

꾸준한 헌신 끝에 약속받은 기회의 땅이 있으리라는 생각엔 단단한 바닥이 없다. 대신 거기엔 우리가 정성스레 깎고 다듬어 쌓아 올린 믿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런 믿음이 있다고 일상의 풍경이 괄목하게 변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훨씬 역동적인 변화를 맞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독은 평생의 숙제다.

자기혐오는 사람을 소외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그 시절의 내게 방이란 일종의 증거이자 선언이었다. 그 늪엔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의 유골이 가라앉아있는데, 서로 연대할 줄 모르던 그들 모두가 묻히기는 한 데 묻힌 셈이다. “날 그리워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발로 기어들어가 세상을 금식한다. 거기엔 어떤 미움이 있는데, 그게 나를 향하는지, 아니면 남들을 향하는지 어느 순간 알 수가 없다. 마음에 선 세계가 쪼그라들수록 근원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벼려진다. 그렇게 비겁한 마음만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음속에서 타인의 스케치를 조금씩 지운다. 열심히 그렸던 선과 선, 광대와 이마 가장자리, 턱선 밑을 채운 그림자를 벅벅 문지른다. 음영이 짙은 곳을 지울 땐 쉽게 더러워지는 지우개에 괜히 짜증이 난다. 그러나 힘겹게 지우다 보면 다시 마주한 백지 같은 마음을 흡족히 바라본다.

그렇게 그 시절의 나는 아끼는 안락의자에 파묻혀 차디찬 창밖을 노려본 채 밤을 지새웠다. 밖에선 눈보라가 몰아쳤다. 거센 바람이 좁은 골목을 거세게 휘몰아치며 울어댔다. 고독하면 그저 외롭기만 한 게 아니라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실감한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면서 살 수 없다. 벌써 새벽이 밝아오고 있지 않은가? 어슴푸레 창밖에서 퍼런 생각이 차게 들어오는 새벽, 어둑한 방에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 의미 없이 들여다보다가 일어나 물을 마셨다. 다시 문밖으로 나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려움에 떠는 나는 마음을 다잡으려 옛일을 상기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개를 많이 키웠다. 그러나 직접 번식시킨 적이 없었다. 종종 풀려나 활보하고 다니는 수놈 한 마리 때문이었다. 그 발정 난 ‘톨로미에스’가 마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동네에 묶여있는 ‘팡틴’이 죄다 새끼를 배는 것이다. 목줄만 우리 것일 뿐, 실상은 임자가 없었다.

그 개자식을 덫으로 잡을 수도 없으니 참 난감했다. 아버지는 논밭도 일구랴, 축사도 돌보랴, 일이 많아서 개들은 그저 함부로 묶여있거나 엉성한 철창에 갇혀 살았다. 그런 녀석들이 산책이나 제대로 해봤을까? 밥이나 제때 먹으면 다행이었다. 한여름에 물도 못 마셔 죽은 녀석들과 한겨울에 눈보라와 한파를 몸으로 맞서며 죽은 녀석들. 돈이 안 되는 가축은 본래 그렇게 기르는 것이라며 귀찮다는 뜻을 대신하던 아버지.

나는 고향에 갈 적마다 개들을 돌봤다. 수당 한 푼 안 받고 연민으로 임했다. 밥과 물을 주고 집을 고쳐주거나 주변을 청소하는 게 내 일이었다. 혹서기에 순한 녀석들은 풀어서 제 스스로 더위를 피하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축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끼니 다 챙겨주는데 무슨 주접이냐고 핀잔이었다. 하긴 그런 일에 무슨 시간과 돈을 쓰겠는가?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애초부터 알았다. 그래서 개들을 안락사시킬 것을 진지하게 권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불결한 고해(苦海) 위에서 주인도 바란 적 없는데 태어난 개들은 바로 그 죄 때문에 죽는 것이다. 밥이야 배고프다고 짖으니 안 줄 수가 없다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게 죄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재산을 버릴 줄 모르는 아버지라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한파와 눈보라가 매섭던 어느 날 고향에서 축사 일을 도왔다. 혼자서 여물을 주러 가니 축사 앞 개장이 보였다. 낡고 녹슨 철창에 갇혀 어김없이 낑낑대는 강아지가 밥을 보챘다. 밥 주는 사람이 왔다며 무한히 반기기만 하는 녀석이 가여워서 녀석을 철창에서 꺼내주었다. 오물이 빠지라고 엉성한 철망으로 바닥을 깔아 마치 겨울바람에 둥둥 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녀석.

혼이 날 게 뻔했지만 대수인가? 그렇게 꺼내놓으니 밥 먹는 것도 잊고 내게 몸을 비비는 녀석을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 녀석에게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안길까? 자기가 받은 고통의 원흉이 우리들이라는 생각은 못 하고 그저 개의 본성대로 몸을 굽혀 좋아하는 걸 보니 생각이 복잡했다. 차디찬 누린내가 가엽고 슬프게 풍겨왔다.

그 강아지의 행동거지에 대한 모든 감성의 겉껍질을 벗길 때, 나는 그 속에서 드러난 어떤 사랑의 모양을 엿봤다. 이해득실이나 조건을 초탈한 그 순수한 지향에는 분명 어떤 신성(神性)이 있다. 개의 뻔한 본성이라는 범주를 잠시 치워놓아야 볼 수 있는 진실. 즉 초월적이고 순수한 사랑은 본래 이렇게 뻔하고 단순한 모양이다. 난 밥을 수북이 주고서 그냥 풀어놨다. 그런데 한 달쯤 뒤에 고향에 갔을 땐 녀석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께 들으니 다른 개에게 잡아먹혔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세상일을 온종일 불평하며 주변에 화를 쏟아냈다. 불공평하다고 한 맺힌 소리로 바락바락 대들면 맥락을 모르는 어른들이 들어줄 리가 있는가? 그러면 애꿎은 약자들만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께 괜히 소리를 지르고 방에 있는데 주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난 송구한 마음에 안절부절 어머니께 달려갔다. 그때 내 가슴속에서 무언가 바뀌었다.

내가 서울에서 돌아온 뒤 시종 내 편에서 참고 견뎌주시며 한 마디 꾸지람이 없으시던 어머니에게 무슨 짓인가. 나는 죽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 집구석에서 죽은 강아지보다 나은 존재는 어머니뿐이었다. 사랑은 뻔하고 단순한 것이지만 아무에게나 허락된 자유가 아니었다. 나처럼 교만하고 천박한 사람에겐 너무도 어려운 경지였던 모양이다.

죄책감에 개가 묻힌 과거에 절하고서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던 시간이 제법 흐르고, 그렇게 멍하게 새벽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집을 나설 때였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서 문 앞에서 호흡을 한 번 더 가다듬었다. 밖은 분명 몹시 춥지만 움츠러들지 않기로 다짐하며 문을 나섰다.

주위를 보면 과거의 나처럼 세상을 증오하는 이들이 여럿 보인다. 남들 때문에 서러워진 마음을 달래려 그 가치를 어떻게 하면 멋지게 깎아내릴지 고민하다가 인터넷에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손절에 관한 무수한 조언들에서 그런 뾰로통함이 엿보인다. 누구는 자신들이 혐오의 피해자라고 핏대를 세운다. 특정한 범주로 경계를 나누고서 그밖에 있는 것들을 매도하는 경우가 몹시 흔하다. 정치적 입장이나 국적, 종교와 인종, 세대와 성별이 모두 그런 범주다.

그런데 그들이 명백한 증오의 말과 행동으로 서로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걸 보다 보면, 그들을 진정 혐오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닐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진정 아끼는 사람이 자기 머리를 오물로 채우고 입으로 배설할 리 없지 않은가?

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바는 그런 이들이 적어도 자신을 별로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역겨운 말로 저주를 퍼붓거나 심지어는 구체적인 공격에 나서는 이들도 있는데, 그런 이들은 먼저 마음을 비출 거울을 찾는 게 급선무다. 자신의 의미를 최초로 몰각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웃들이 즐겨하는 과업 하나를 택했다.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다가 뭔가 생각나면 한참 글을 쓰곤 한다. 이 일이 후에 생업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항상 바라는 바다. 사람에겐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일상복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들은 돈이 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 어느 것을 해야 하느냐고 서로 묻고 씨름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제일인 것 같다.

자연스러운 일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또한 즐거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즐기기 어렵다지 않는가? 그렇다고 돈 되는 일만 좇는 것도 별로다. 효율성이 안 좋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오묘한 중간 지대를 미리 알긴 어렵다. 결국 이런저런 경험을 쌓다가 알게 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런 과업은 그야말로 ‘어른의 과업’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어른의 과업에 집중하다 보면 되레 가족이나 국가와 같이 여럿이 함께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들이 오히려 소외의 원흉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본능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높은 생산성과 안전을 담보하는 담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담을 안쪽으로 쌓아버리면 곧 서로를 갈라놓는 벽이 된다. 그러면 수혈받던 삶의 의미는 오히려 자신이 추방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벽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신이 전형에 어긋나는 사람인지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전형에 어긋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높은 벽이 아니라 쉬이 넘나들 수 있는 두렁 같은 것이라면 그것 때문에 누군가 외로워질 일이 줄어들지 모른다. 그 경계 밖에 있더라도 서로 눈을 맞추고 이야기할 수 있고, 원할 때마다 다시 그 선 안으로 들어와 어울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촘촘해진 경계가 날로 높아져 그 가운데는 좁은 방이 되고 가두어지는 사람이 생긴다. 사람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일과 자신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일상에서 축출하는 과정은 묘하게 닮아있다. 만일 혐오가 대상을 치워버리도록 하는 마음이라면 자기혐오와 소외는 실존적 표리관계에 있다. 그리고 삶의 의미는 고독감 속에서 자꾸만 왜곡된다. 자기혐오가 삶의 의미를 왜곡한다는 것은 그 자신으로부터 인식의 그물로 연결된 세계 전부를 왜곡하는 일이다. 그때부터 자신을 혐오하는 일이 곧 세계를 혐오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땐 으레 남들도 섣불리 다가가 도와주기 어렵다. 그러니 잘못된 믿음은 소외 속에서 실제로 지지받고 굳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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