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_ 자기혐오 (Ⅳ)
장 발장처럼 과거로부터 한참을 달려왔음에도 수심 어린 눈으로 언제나 주변을 살피며 홀로 기도하는 이들, 그런 이에게도 소박한 꿈이 있다. 저 밖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내가 어울릴 만한 파티와 화목한 모임, 그럴듯한 동반자. 하지만 그때쯤에 운명론이란 모든 찝찝한 과거에 대해 청구서를 들고 나타날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인연은 신에 관한 모든 성가신 의무나 매한가지다. 자유가 아닌 율법이 지배하는 것이다.
사실 혼자라고 반드시 외로움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차이는 오묘하다. 다른 사람이 내 일상에 얼마나 필요한지, 나아가 절실한지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혼자 있는 게 천성인 사람들에게 외로움은 관능적 충동 외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게다가 함께 있어도 외롭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 말의 의미를 발화자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외로움은 참 아리송한 구석이 있다.
나는 단지 한 사람과만 멀어져도 세상 모든 것들과 헤어진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방의 세간을 정성 들여 정돈하곤 했다. 바닥을 예전보다 좀 더 자주 쓸고 닦는다. 내 사지도 저 밖의 나무들처럼 지하와 창공을 향해 뻗어 세계를 더듬어야 하는데. 그것이 더듬거린 곳마다 나를 증명하는 내가 있다. 내가 닦는 그 바닥에 나의 몸과 마음이 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눈을 뜰 때마다 세계에 이름표를 붙일 의지도 함께 눈을 뜨는 것이다.
내게 한 사람을 가슴에서 지우는 일이 벽돌 한 장을 쌓는 것과 같았다. 그 벽돌이 계속 쌓이다 벽이 되고 방이 되며 감옥이 된다. 주변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을 그렇게 지워나간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들을 볼 때면 살아있는 감옥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다. 아주 심한 경우엔 이미 떠나갈 준비가 된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그것은 방이 아닌 관이다. 그들은 이제껏 예민한 감각을 간수 삼아서 자기 삶에 난잡히 그어진 선을 넘지 않으려 얼마나 조심했는가. 그 감옥을 이루는 벽돌마다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 감옥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세계는 여전히 지워버린 사람들의 시선과 존재감으로 채워져서 나서려는 발을 묶는다. 그렇지만 곧 둔감해져 특별히 힘든지도 잘 모른다.
배우 ‘제이크 질렌할’은 주연을 맡은 영화 《데몰리션》에서 그런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는 성공한 증권맨이지만 사고로 아내를 여의었다. 그의 아내가 죽은 영화 초반부는 껍데기로 돌아다니는 주인공을 비춘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부모와 형식적인 슬픔을 나누고서 대뜸 헛헛함을 느낀다. 격식에 맞지 않는 경박한 허기와 생각들이 당위적 슬픔에 자꾸만 끼어든다. 그는 둘이 살기에도 넓었던 집에서 더 공허해 보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청회색 새벽, 흔들리는 앵글은 그가 주방에서 말없이 시리얼을 먹는 걸 비춘다.
그는 성공을 위해 달려온 자신의 세상이 어땠는지 점차 깨닫는다. 어쩌면 속으로 “원래 빈자리였어. 빈자리라 그래. 빈자리에 뭐가 있겠어? 아무것도 없는 게 당연하지. 아무렴”이라 말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오롯한 세계란 결국 그 곁을 묵묵히 채우던 무언가가 있었기에 가능했기에, 단 한 사람과만 헤어져도 모든 것이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둔감한 그는 그걸 너무 느리게 알아간다.
그러다 문득 지평선을 뚫고 오는 무법자처럼 슬픔과 우울감이 덮친다. 그 무법자의 오른손에 들린 권총이 불을 뿜고, 떠오르는 생각이 총알이 되어 가슴에 구멍을 낸다. 그런데 사실 이는 무법자가 찾아왔다기보다 그 자신도 모르게 무법자에게로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서 과거로부터 적당히 멀어진 뒤에야 보이는 시꺼먼 빈자리에 황망히 뭐든 집어 쑤셔 넣었는데, 가슴의 밑바닥, 그 시궁창에서 급히 건져 올린 것들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는 결국 밀려드는 상실감과 외로움에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그렇지만 떠나간 이의 빈자리는 결국 어떻게든 채워진다. 자연이 황무지를 쑥대밭으로라도 채우듯 현상하는 삶도 그렇게 무언가로 채워진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기 삶에 다시 등장하는 인연과의 미래를 예고하며 마무리된다. 현실의 구멍도 영화처럼 단순하게 채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결국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다.
외로움은 어쩌면 의미에 관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의미란 나라는 주어에 어울리는 술어가 연결될 때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완성을 위해 우릴 자꾸만 타자에게 떠미는 힘이 작용한다. 누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외로움은 그저 마음에서 자리만 차지하지 않고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로 나를 어찌 됐든 실현하려 애쓴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에겐 의미의 기회를 얻으려는 간절함이 있다. 그것은 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표상이다. 타인은 내 의미에 가장 쉬이 반응한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남들 시선이나 끌려고 아등바등하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관계의 법칙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 내게 어울리는 것을 줄 뿐이다. 이 희곡을 지배하는 개연성의 원리는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정작 주체인 내게는 발끝으로 서야 겨우 보이는 담장 너머의 그것처럼 희미하고 모호한 진실만 가르쳐준다. 그 진실이란 모두에겐 각자가 머무는 층위가 있어서 같은 층에 속한 사람끼리는 서로 더 잘 마주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그 층위에서 함께 어울려 사고 칠만한 이들. 그들은 한 층에서 동종으로 엮여있음으로써 앞으로 만나게 될 이웃이자 동료다. 그들이 누구든 같은 층에 있다는 것은 현실에서 제아무리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기압의 영향으로 태풍이 만들어져 제자리를 찾아가듯 나도 그렇게 내게 어울리는 층으로 옮겨진다.
고독은 물리적인 고립 이상이다. 사는 모양과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외로움을 느끼는 양상도 다양하다. 자기 자신에게만 소용돌이칠 뿐인 메아리 없는 관계는 확실히 함께 있어도 외롭다. 또한 혼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들리는 소리도 그런 외로움의 소리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그래서 관계를 주도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 그저 나 하나 스스로 최선을 다함으로써 만남의 지평과 결이 달라지길 기도할 뿐이다. 완벽한 인연은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다만 나 자신이 개연성의 재료가 되어 만남을 끊임없이 조건 지울 수 있다. 조르바가 그랬듯 어쩌면 사는 일이란 사고 치는 것이다. 다만 누구와 어울려 사고를 치게 될지는 내 소관 밖이다. 나와 만들어갈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이 희곡의 등장인물이 될 수 없다. 그것이 곧 관계의 일반원칙이다.
독특하게 고양된 삶에는 아무나 발을 딛기 어렵다. 높은 산꼭대기처럼 좁고 가파른 곳에서라면 함께할 사람 자체가 적을 것이다. 반대로 누구나 소풍 가고 싶은 곳, 이를테면 봄볕이 산란(散亂)하는 휴양지나, 초여름 바람이 시냇물에 발을 담갔다 닦는 부푼 초원 같은 곳이라면 북적임을 감당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선택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 그게 내가 위치하게 될 곳까지 정하도록 허락해 주진 않는다.
수도승처럼 살아도 함께하는 즐거움은 여전하다. 다만 홀로 자신만의 작업을 해나가는 사람들, 혼자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외로움에서조차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외로움의 조건도 참 다채롭다. 어쩌면 그들 일상을 채우는 과업이 마음속에서 타자의 자리마저 잠식해 버린 것일까?
사실 내겐 인연이 즐겁고 영양가까지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악연은 늘 넘쳐나서 인생을 외줄 타기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 선량한 이웃과 동료를 두는 일이야말로 부러운 일이다. 주변에서 못된 사람들 때문에 삶이 어렵다는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주억이는 이유다. 다만 내가 그 못된 사람이었던 시절이 함께 떠올라 눈에서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애를 먹는다.
이래저래 종합하면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함께 어떤 사고도 일으킬 수 없는 사람끼리는 만날 일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이며 실존은 그 궤적과 말단을 나타낸다. 내가 박혀있는 표적지엔 비슷한 궤적을 그린 화살들이 함께 꽂혀있을 것이다.
결국 그 문제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차라리 교제보다 자신만의 과업을 갖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외로움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경험과 지식을 재료 삼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은 없으리라. 내가 세계에 작동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일에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실 진정으로 홀로 된 그 순간에야 내게 맞닿은 세계를 면면히 돌아보고 스쳐 간 인연들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교제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는 것으로, 타자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여지를 두는 일이다. 어울림과 얽힘을 음미하면서 타인의 의미도 더 깊이 들여다본다. 그런 상태에서나 이웃들이 내 들러리가 아닌 줄 알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혼자서도 어엿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이어야 주변을 더 아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로써 이웃들을 병풍 정도로 삼지 않고 오히려 동반자로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인군자가 될 필요는 없다. 이타심을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그저 단 몇 명이라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타적으로 사는 데는 그걸로 족하다. 다만 방법이 늘 문제다. 괜히 스스로에게 많은 짐을 지울 필요가 있을까? 완전히 지쳐버린 몸으로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어깨를 빌려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가장 큰 해가 되지 않는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살 이유를 잃어버릴 테니까. 세계라는 술어를 빼면 자신이 존재할 의미가 없음에도, 그는 자신의 본질을 멋대로 잘라내어 버리다가 결국 자기 손과 발까지 베어버리고 말 것이다.
요컨대 세계를 미워하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혐오는 가장 이기적이다. 그건 자기만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필연적인 나를 도출하고 지지하는 타자까지 부정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부정하고 싶은 자아상’을 솎아내 불살라버리고 싶어 한다. 단지 혐오감을 견딜 수 없어 그 짓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 할수록 그에 혐오감을 느낀다면 대체 위협받는 건 누구인가? 그건 바로 그 현재에서 이어지는 자기 자신, 즉 내일로 이행하는 ‘평가하는 현재’인 ‘나’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자신이 혐오적 배제의 객체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경우란 오직 자살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혐오의 극단은 실존의 절멸, 즉 자살이다. 그런데 우린 타인을 혐오하는 것에는 격렬히 반대하지만, 자기혐오에 대해서는 고작 위로나 상담 치료 정도로 다루려 한다.
사실 자기혐오는 단순한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 방식의 선택인 동시에 그것에 낸 균열이다. 어떤 이는 자기혐오를 특정 사건의 결과로 파악하거나 자존감의 결핍으로만 해석하지만, 어쩌면 세계와의 소통에 실패함으로써 비롯되는 실존적 사태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에 불만족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채로 자신을 세계와 단절된 잉여로서 느끼는 타락이다.
세계와 결부됨을 느끼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될지 몰라 불안해하며 자아의 의의를 의심한다. 그가 느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다는 부적절감 혹은 애초에 세계는 자신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근본적 이물감이다. 그리고 점차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전체를 정화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나아간다.
소외와 소외감은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오는 처벌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나는 세계의 노이즈이자 결함이다.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나’를 떠올릴 때마다 세계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자아는 그렇게 세계라는 술어와 붙어있다. 그래서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그 결점인 자신을 도려내던 칼이 쉬이 세상을 향한다. 그럼에도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존재 의미를 외부에서 수급하라고 압박한다. 그렇게 자기혐오는 고립된 개인의 고통에서만 자생하지 않고 구조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럴 때 자기해석의 실패는 존재의 당위성을 타자의 평가로 구속하고, 그 기준을 존재 경쟁에 원용한다.
나아가 자기혐오는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강화된다. 건전한 자기해석을 위한 비교가 아니다. 주체성을 상대화하고 침묵시킬 뿐인 비교다. 그런데 인간은 타자와의 우열 관계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할 수 없다. 그 비교는 그저 주변인들이 누구에게 더 많이 웃어주는가를 보려고 두리번거리는 일일 뿐으로, 우리가 유치원 재롱잔치 무대에서 보던 공연의 엄숙한 버전에 불과하다.
자타가 하나의 장 속에서 제대로 공명하고 있을 때 고유성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지만, 내가 누군가와 배타적이고 경쟁적인 비교를 할 때 난 고유성을 포기하고 전형에 속하길 택한다. 그러한 경쟁은 말하자면 실존 조건을 외주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 공존한다는 의식을 교묘히 왜곡한다. 결국 세계로부터 자연히 주어지던 고유성을 상실하고서 세상에 부유하며, 그 흔들리고 격변하는 기준을 좇다가 자기부정에 빠져버린다.
그런 세태에 경도된 채 외치는 ‘공정’은 단지 권리와 이익에 관한 외침이 아니다. 가소롭게도 그 숭배자들 눈에는 공정한 실존과 아닌 실존이 구분된다. 그 공멸의 문화는 끝없이 주체를 뒤흔들어 끝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온갖 잡동사니로 채워져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알 수 없이 어지럽혀진 방처럼 난잡해진다.
그 현상을 존재론적 병리로 보면 진보된 자기해석을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사유의 붕괴다. 결국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제거의 대상으로 느낄 때면 세계와 하나의 의미망으로 성립되기를 거부당한 이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만 볼 수 없다. 자신을 미워하는 모두가 자기 세계를 부정하며 벌이는 진흙탕 싸움일 뿐이다.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는 이들이 결국 타인 또한 불편하게 여기게 되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위무하려 한다.
이러한 정서적 전이와 투사가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고 결국 자기혐오가 사회 전체로 확산한다. 따라서 자기혐오는 단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조적 병폐다. 내 존재가 정당하지 않다는 시달림은 나를 수식하는 타자의 정당성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정합성을 지키는 역설로 겨우 버틸 수 있게 된다. 사회는 그렇게 불신과 적대의 장이 된다.
자기혐오에 깊이 빠진 이의 폭력은 그 자신을 부정하며 짓눌린 자아의 반발심이 뒤섞인 분노의 실현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 주체가 실제로 제거하고 싶은 대상은 그 자신이므로, 그렇게 일어나는 범죄는 자기 제거의 충동을 자극하는 타자에 대한 증오범죄이지 혐오범죄가 아니다.
자존감은 자신의 필연성에 대한 감각이다.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 속의 내가 불가결한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는 감각, 곧 내가 “여기 있어야만 한다.”라는 내적 수긍(首肯)에서 비롯된다.
실존은 연루되어 드러난다. 자아는 타자에 의해 그리고 타자와 함께 드러나며, 자아의 정당성은 타자의 정당성에 대한 긍정을 통해 확보된다. 따라서 자타는 대립이 아니라 공명해야, 분리된 실체가 아닌 하나의 장(場)에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자기혐오는 이 장(場)을 잃어버린 주체가 자기를 온전히 홀로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몸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게 무엇이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내게 따듯한 심장이 있는지, 아니면 차가운 머리가 있는지, 손과 발은 제대로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 이것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한 땀 한 땀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우린 오로지 부여받은 것들로만 자신을 해명한다.
사지가 나를 둘러싼 허공을 향해 뻗어나간다. 아이처럼 손을 뻗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 가지 끝에 잡힌 열매의 색깔과 맛을 본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은 오로지 이 사지로부터 뻗어나가 우리에게 닿는 것들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손끝에서, 발바닥에서,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부터 설명된다.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나무는 그것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혐오에 빠진 이는 이 뿌리를 망각한다. 그런데 그가 느끼는 바와 달리 이미 그 숲의 일부로서 그 자신 없이는 달라졌을 구조를 지탱하고 있었다. 세계는 결코 개체를 낭비하지 않는다. 개체가 스스로 낭비하는 것이다.
일련의 생각을 마친 뒤 남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곱씹어본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생각처럼 되진 않았다.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변하지 않았을까? 여태껏 마음을 닦으며 의미를 규정짓는 과정도 앞서 말한 과업이 아닐까?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내 이웃들이 자기혐오의 굴레를 쓰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변에 대고 흘길 게 아니라 아무리 늦더라도 홀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데 천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로써 자신을 어제보다 조금 더 양해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여유가 생기면 자신들의 일상에 무아지경인 이웃들을 좀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길. 그렇게 세상의 일부를 견고히 지지해 주어 자신의 세계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어가길.